404화
그렇게 새진주를 바라보던 정성국은 발걸음을 옮겨 바다가 보이는 반대쪽으로 이동해 저 멀리 보이는 조선소와 가까운 곳의 선착장들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흠. 생각보다 배들이 꽤 많은 것 같은데? 단순히 높은 곳에서 확인해서 그런 건가?”
이에 뒤따르던 웅크린 늑대가 대답했다.
“2년 전과 비교하면 잉글랜드, 네덜란드, 에스파냐 3국의 배 이외에도 다른 나라의 상선들이 꽤 늘어났습니다.”
“역시 그렇지?”
“아무래도 2함대가 서인도제도에 진출한 후 열심히 해적들을 토벌하면서 서인도제도의 해적들이 대폭 줄어들었고 이것이 점차 알려지면서 그동안 해적들의 위협 덕분에 섣불리 새진주를 방문하지 못했던 다른 나라의 상인들이 교역하기 위해 새진주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북미왕국 선박들이 정박하고 있는 선착장은 한산한 편이었지만 외국 선박들이 정박하고 있는 선착장은 배들이 빼곡했기에 정성국은 웅크린 늑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살펴보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생각보다 작은 배도 꽤 많군?”
“예. 북미왕국의 물품이 무척 고가에 팔리니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넘은 상인들이죠. 솔직히 대단하더군요.”
웅크린 늑대의 감탄에 정성국도 공감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 저들은 뭘 주로 사들이나?”
“뭐 다 비슷하죠. 도자기, 비단, 가죽, 진주, 화장품, 시계 등등. 다만 이런 고가품들이 부담스러운 영세 상인들은 주로 면직물과 모직물을 가득 싣고 돌아가곤 합니다.”
정성국은 웅크린 늑대의 대답에 의아한 표정으로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았다.
“대서양을 건너 이곳까지 와서 면직물과 모직물을 사서 돌아간다고? 그게 돈이 돼?”
고작 100톤도 안 되는 작은 범선이니만큼 더 많은 이득을 위해 도자기, 비단, 진주 같은 고가품 위주로 사들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고작 직물을 싣고 간다는 이야기에 정성국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고 웅크린 늑대는 그런 정성국을 마주 보며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북미왕국에서 생산하는 면직물과 모직물은 모두 최상품이라 유럽에 가져다 팔면 충분히 돈이 된다더군요. 우리야 나름 비싸게 파는데 유럽 상인들은 품질에 비하면 싸다고 놀랄 정도니까요. 그래서 직물로만 배를 가득 채워 유럽으로 돌아가도 충분히 돈이 벌린답니다. 거기에 유럽에서 생산하는 직물보다 훨씬 다양한 색이 존재하니 불티나게 팔린다더군요.”
“아...그래?”
정성국은 직물의 품질에만 신경 썼지만, 시장에서는 직물의 색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천연염료를 이용해 천을 염색했는데 그러다 보니 색상의 다양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북미왕국에서는 전아라를 필두로 한 화학자들이 달라붙어 천연색소에 의존하지 않고 색을 가진 유기물질을 합성해 만들어낸 합성염료를 통해 천을 염색하는 터라 기존보다 다양한 색상의 천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합성염료는 석유 연구와 함께 북미왕국의 화학자들이 매달리고 있는 분야라 시간이 흐를수록 무척 다채로운 색상의 천이 생산되었고 이를 알게 된 유럽의 상인들이 직물을 사서 유럽에 선보임으로써 북미왕국의 직물은 최고급품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새진주에 방문한 영세 상인들은 직물만 사더라도 유럽에 돌아가면 돈방석에 앉는다는 말에 정성국이 그런가 하는 표정을 짓자 웅크린 늑대가 덧붙였다.
“예. 유럽의 직물보다 색감이 훨씬 이쁘다며 과연 북미왕국의 기술은 대단하다고 감탄하더군요. 그리고 유럽엔 녹색으로 염색한 천이 드문지 녹색 천을 최대한 사들이는지라 국영 상단에 이야기해서 녹색 천의 생산량을 대폭 늘려달라고 요청할 정도입니다.”
“아...”
물론 유럽에도 녹색으로 염색한 천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녹색 염료는 식물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으니 오히려 녹색 천은 흔한 편이었다.
다만 이렇게 식물에서 얻은 염료로 염색한 천은 싱그러운 풀빛을 닮은 녹색이라기보다는 어둡고 칙칙한 느낌이 나는 녹색에 가까웠기에 꺼렸던 것이고.
다만 유럽인들도 색의 원리는 알았기에 귀족의 경우는 노란 염료로 염색한 후 다시 파란 염료로 염색하는 이중 염색을 통해 얻은 진한 녹색의 천을 사용하긴 했지만, 촛불 아래에서는 칙칙한 빛깔이었기에 파티복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하지만 북미왕국에서 판매하는 녹색 직물들은 싱그러운 자연을 상징하는 밝은 연둣빛이나 값비싼 보석인 에메랄드를 직물에 녹인 것 같은 우아한 색감을 내뿜고 있었고 촛불 아래에서도 그 화사함을 잃지 않았으니 당연히 북미왕국에서 염색한 비단, 면직물이 불티나게 팔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성국은 전생에 유럽인들이 더 아름다운 녹색 빛을 탐하다가 비소를 염료로 사용하는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결국 녹색은 불길한 색이 되어버린 일화를 떠올리고 묘한 표정을 짓다 정신을 차리고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우리야 연구청에서 새로운 염료들을 개발해 기존보다 다양하고 선명한 색감을 자랑하는 천을 생산하고 있으니 저들의 반응이 이해는 가는데...이러다간 목화밭을 끝없이 늘려야 할 것 같은데?”
직물의 품질뿐만 아니라 염색 덕분에 북미왕국의 직물은 최고급 품질로 인정받고 덕분에 유럽에서 생산하는 직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 미친 듯이 팔린다는 말에 정성국이 좋기는 한데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웅크린 늑대가 이에 동의했다.
“그래야 할 겁니다. 누에바 에스파냐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본국에서도 면직물을 수입하겠다며 수입 물량을 늘려달라고 계속 요청할 정도니까요.”
“어휴. 이거 다른 곳에도 목화밭을 대거 조성하긴 해야겠네.”
“예. 그래야 물량을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시시피 강 유역의 남부도 목화를 재배하는데 적합한 장소였기에 새한성에 돌아가는 대로 개발청장에게 이야기해 치카소 인근에 따로 대규모 목화밭을 조성해야겠다고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급히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았다.
“잠깐. 잉글랜드도 우리 직물을 사들이나?”
“아. 잉글랜드는 직물을 거의 사들이지 않습니다. 아마 자국의 직물 산업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은데...뭐 가뜩이나 물량이 무척 부족한 판국이라 저희로서는 나쁠 것이 없지요.”
“흐음...”
유럽은 면직물의 수요가 꽤 높은 지역이었고 지금까지는 이 수요를 인도의 면직물이 채워주고 있었으며 이 인도의 면직물을 이용해 짭짤하게 이득을 보고 있던 나라가 바로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는 호기롭게 동남아 향신료 무역에 뛰어들었지만, 네덜란드를 감당하지 못하고 동남아에서 철수해 인도에 집중했고 인도의 면직물은 고급품으로 유럽에서 수요가 있기에 잉글랜드 상인들은 인도에서 사들이는 면직물을 자국과 유럽, 아프리카 등에 팔면서 돈을 벌고 그러다 인도의 벵골 지역을 식민지화하면서 원면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고 이를 통해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북미왕국이 먼저 유럽의 면직물 시장을 장악하고 독점할 것이 분명했고 그럼 잉글랜드가 전생처럼 성장하긴 어렵지 않을까 싶어 정성국은 잠시 고민했다.
‘생각해보면 이미 역사는 바뀌고 있고 지금 잉글랜드가 우리와 우호적이라고 나중에도 우호적일 거라는 보장도 없지. 거기에 전생에 대영제국이 인도에 한 짓거리도 썩 마음에 들지는 않으니...그냥 생산량을 확 늘려버려야겠다.’
그렇게 결정을 내렸지만 유럽의 면직물 시장을 장악하면 막대한 은이 유입되는 격이었고 이는 달리 이야기하면 유럽은 막대한 은이 사라지는 격이었기에 중상주의에 심취한 유럽에서 북미왕국을 적대하지는 않을까 우려해 입을 열었다.
“그럼 일방적으로 사들이기만 하는 건가? 파는 건 전혀 없고?”
정성국은 언제나 무역수지를 중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웅크린 늑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들이 가져온 물품들을 최대한 값을 쳐주어 사들이고 있습니다. 해서 철, 구리, 석탄 등을 가져와 팔고 있긴 합니다. 다만 그걸로는 부족한지라 은을 함께 가져와야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나름대로 값을 쳐준다 해도 한계가 있지 않나? 결국, 은으로 결제해야 할 것 같은데? 상인들의 이득도 크지 않을 테고?”
이러한 정성국의 의문에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것 때문에 상인들도 좀 고민인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새진주에서 직접 아프리카 노예를 사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해서 저에게 하소연하는 상인들에게 제가 슬쩍 이야기하긴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
“아프리카나 서인도제도, 남미에 고무나무를 키워보라고 말이지요.”
웅크린 늑대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아! 그거...괜찮은데?”
이에 웅크린 늑대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예. 에스파냐가 무역 적자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고무 생산량을 늘리고는 있습니다만 아직 부족한 상황이니까요. 그리고 다른 나라 상인들도 에스파냐가 고무 농장을 건설해 이곳에서 생산하는 고무를 전량 우리 북미왕국에 팔아 짭짤하게 이득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자 눈을 빛낸 것을 보면...조만간 고무 수급이 원활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잘 했어. 자전거 공방에서도 고무가 부족해 골치 아픈 모양인데 자네 덕분에 일이 해결되겠군.”
자전거가 아직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고무 부족 문제가 컸다.
에스파냐도 점차 북미왕국과의 교역 규모가 커지면서 무역 적자를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북미왕국이 필요로 하는 구리, 구아노, 고무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덕분에 구리, 구아노는 북미왕국에서 필요한 물량을 어느 정도 맞추고 있었지만, 고무는 사정이 달랐다.
특히 최근 자전거를 양산하기 시작하면서 고무의 소모량이 급증했는데 에스파냐는 이를 감당하지 못해 자전거의 양산에 제동이 걸린 상황이었고.
헌데 웅크린 늑대의 묘수 덕분에 고무 부족이 풀릴 것으로 보이자 정성국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예. 아마 시간이 흐르면 유럽의 상인들은 기존대로 아프리카에 팔 물품들을 싣고 아프리카로 이동해 물품을 팔고 노예를 사들여 서인도제도로 올 테고 서인도제도에서 노예를 팔고 고무를 사들여 새진주로 온 후 새진주에서 고무를 팔고 북미왕국의 물품을 사들이고 유럽으로 돌아가는 사각 무역이 활성화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묘한 미소를 지은 웅크린 늑대였고 정성국은 그런 웅크린 늑대의 미소에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서인도제도에 아프리카 노예가 넘쳐나면 위장 상단들이 이를 사들여 해방할 테니 캐롤라이나 지역이나 서인도제도의 인구도 손쉽게 늘릴 수 있고?”
“그렇지요.”
“노예무역을 은근히 방조하는 느낌이긴 한데...뭐 어쩔 수 없나.”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웅크린 늑대는 안도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그리고 최근 저 배들을 타고 새진주를 방문한 유럽의 의원들이 있습니다.”
“의원이라고?”
정성국이 놀란 표정을 짓자 웅크린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예. 아시다시피 북미왕국의 의학 서적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의학 서적의 진위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국 우리 북미왕국의 의학 서적에 신빙성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지요.”
“아. 그건 자네의 보고서를 통해 확인했었네.”
“예. 그래서인지 유럽의 의원들은 북미왕국의 의술을 배우려 했고 대부분은 의학 서적을 공부했지만, 일부는 새한성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이렇게 배를 타고 새진주에 도착한 겁니다.”
웅크린 늑대의 설명에 정성국은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외국인 거주 구역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허어...저들의 열정이 대단하군. 아니. 이건 열정이라기보단 숭고함이라고 해야 할까?”
이 시기 범선을 타고 바다를 건넌다는 것이 꽤 위험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배움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유럽의 의사들에게 정성국이 감탄하고 있을 때 웅크린 늑대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음?”
“제가 면담해 본 바로는 야심 찬 인물들이 더 많더군요.”
“엥?”
정성국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자 웅크린 늑대가 입을 열었다.
“지금 유럽에는 북미왕국의 의학이 무척 대단한 수준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에서 직접 의술을 배운 의원이라면...왕실 주치의도 노려볼 만하지요.”
웅크린 늑대의 설명에 정성국은 김이 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어...설마 다 그런 거야?”
이에 웅크린 늑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물론 다 그렇겠습니까. 개중에는 자신이 열심히 치료했는데도 불구하고 병세가 악화하여 죽은 환자들이 알고 보니 자신의 처치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북미왕국의 의술을 배우기 위해 온 의원도 있고 새한성 대학교에서 북미왕국의 의술을 제대로 배우고 본국에서 의원을 양성하려는 포부를 지닌 의원들도 있습니다. 물론...극히 소수지만요.”
웅크린 늑대의 대답에 정성국은 쓰게 웃으며 외국인 거주 구역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뭐 의원들이 모두 숭고할 수야 없겠지. 하지만 이득을 위해 북미왕국의 의술을 배우더라도 결국 이를 통해 환자를 살리고 유럽에 북미왕국의 의학을 퍼트릴 수 있을 테니 최대한 받아들여 보자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