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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402화 (402/850)

402화

올해 초 사망한 알렉세이 1세의 뒤를 이어 차르의 자리에 오른 표도르 3세는 모스크바에 잉글랜드의 외교관이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외무장관을 불렀다.

“그래. 잉글랜드 외교관이 방문했다지? 무슨 일 때문인지 짐작하는가?”

이에 외무장관은 표도르 3세를 보고 공손히 대답했다.

“아마 아무르 강 유역의 현지 지휘관이 북미왕국의 선박을 공격한 일 때문일 것이옵니다.”

“음? 그런 일이 있었나?”

외무장관은 잉글랜드, 네덜란드 외교관이 모스크바를 찾아와서 건네준 외교 문서를 확인한 직후 곧바로 시베리아로 전령을 보냈고 알바진의 사령관 니키포르는 전령을 받고 자신이 공격하라고 명령했던 보급선이 북미왕국의 배라는 것과 자신의 짐작과는 달리 청나라가 매복해있다가 보급선을 공격한 병사들을 포위해 섬멸한 것이 아니라 보급선에 타고 있던 병사들에 의해 격파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북미왕국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니키포르는 오랫동안 시베리아에 있었기에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지는 못했지만, 모스크바에서 전령을 급파한 것을 볼 때 잘못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니키포르는 모스크바에 제대로 된 연줄도 없었다.

니키포르는 일림스크에서 보이보다를 살해하고 재판을 피해 이곳 알바진으로 도주, 자신을 따르던 자들과 함께 알바진 요새를 점거한 후 이곳에서 왕처럼 지내며 청나라군을 물리쳤고, 이를 알게 된 전대 차르는 알바진 인근을 러시아 차르국의 식민지로 편입하기 위해 사면령을 내리고 니키포르에게 알바진 사령관 자리를 내린 것뿐이었으니 자신으로 인해 다른 나라와 문제가 발생하면 자신을 문책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해서 니키포르는 북미왕국의 배를 공격한 자신의 판단은 정당하다는, 그리고 현지의 사정상 북미왕국의 배를 공격했어야만 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고.

이 보고서를 확인한 외무장관 역시 니키포르의 생각에 동의했기에 굳이 잉글랜드나 네덜란드를 통해 북미왕국에게 외교 문서나 외교관을 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고, 표도르 3세가 즉위하고 어수선할 때였기에 표도르 3세에게도 보고하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표도르 3세는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습니다. 작년에 그런 일이 있었지요. 해서 북미왕국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외교관을 통해 외교 문서를 보내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고요.”

“그래서?”

“그저 자세한 사정을 파악한 후 답을 주겠다고 했었습니다. 이에 알겠다면서 여러 언어로 번역된 외교 문서만 건네주고 돌아갔었으니...아마 이번에 온 잉글랜드 외교관은 그 대답을 듣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말에 표로르 3세는 급히 질문을 던졌다.

“사정은 파악한 건가?”

“그렇습니다. 그게...”

외무장관은 알바진의 사령관이었던 니키포르가 설명한 당시 사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표도르 3세는 이를 유심히 듣다 살짝 인상을 찌푸리면서 손을 들어 외무장관의 말을 막았다.

“잠깐. 배의 모양도 전혀 다르고 깃발도 청나라의 깃발이 아닌 생소한 깃발을 달고 있었는데 그냥 공격했다고?”

“현지 지휘관의 말로는 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유럽 국가들의 깃발은 확실히 아니었고 청나라의 내부 사정이 좋지 않은 터라 주변 국가나 속국을 움직인 것이라고 판단했답니다. 그리고 아무르 강 유역에서 대치 중인 청나라군은 이 보급을 통해 주변 원주민들을 회유하고 있었으니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공격했다고 합니다.”

그동안은 물자가 풍족한 편이 아니라 청나라는 주변 원주민들과 제대로 교역하지도 못했지만, 북미왕국의 배가 꾸준히 물자를 수송한 뒤로는 식량과 무기 등을 주변 부족의 가죽 등과 교환하며 다시 결속력을 강화하고 있었기에 이대로 시간이 흐르다간 아무르 강 유역의 지배권을 뺏길 수도 있다고 판단해 현지 지휘관이 결정을 내렸다고 하니 표도르 3세도 이 부분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어 투덜거리듯 말했다.

“아니. 그러면 성공이라도 했어야지...저들의 보급을 막지도 못하고 적만 하나 늘린 셈이 아닌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현지 지휘관은 북미왕국의 존재를 몰랐었기에 북미왕국을 과소평가하고 부관에게 모든 일을 맡겼고 그 때문에 실패한 것 같다고 합니다.”

니키포르야 당연히 자신의 판단은 옳았고 실패의 책임은 이번 공격을 이끌었던 부관이자 현재 북미왕국의 포로가 된 알렉세이에게 미뤄버렸다.

그리고 외무장관은 니키포르가 알바진의 유력자라는 것과 니키포르가 이전에도 청나라군을 물리친 적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며 니키포르를 계속 알바진의 사령관으로 두는 것이 이득이라고 이야기했고 표도르 3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흐음...북미왕국은 신대륙의 강국이라지. 허면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하나?”

이전까지 동유럽에 북미왕국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무래도 북미왕국에서 생산하는 도자기를 비롯한 각종 교역품은 무척 높은 평가를 받았기에 동유럽까지 교역품이 흘러들어오기보다는 서유럽에서 모두 소화되었던 탓이다.

그렇기에 동유럽에서 북미왕국의 인식은 그저 신대륙에 존재하는 원주민 국가 정도였고.

그러다 북미왕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벌였고 그 결과 프랑스가 완패하며 신대륙에 건설한 식민지를 모조리 포기하자 동유럽에서도 북미왕국의 국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그러니 표도르 3세는 러시아 차르국과 자신의 위신이 조금 떨어지기는 하겠지만 북미왕국이 원하는 대로 사죄의 뜻을 밝히며 약간의 보상을 해줘야 하지 않나 싶었지만 니키포르의 주장에 공감하는 외무장관은 표도르 3세의 말에 조심스럽게 반대의 뜻을 밝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음?”

“이번 일은 먼저 공격한 아무르 강 현지의 지휘관도 문제가 있지만, 분쟁지역에 섣불리 진입한 북미왕국 선박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무르 강과 그 유역은 우리 러시아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북미왕국의 선박이 무단으로 타국의 영토를 침범한 셈 아닙니까. 헌데 저들이 원하는 대로 사죄와 보상을 하게 된다면 청나라의 말처럼 아무르 강과 그 유역이 청나라의 영토임을 인정하게 되는 셈입니다.”

“으음...”

표도르 3세는 외무장관의 말에 공감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을 흘렸고 그런 표도르 3세의 반응에 외무장관은 고무되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가 굳이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저들이 어쩌겠습니까. 분명 북미왕국의 함대는 강력합니다만...우리 러시아 차르국과는 관계가 없지요.”

러시아 차르국은 발트해 연안의 영토가 없었기에 프랑스 대함대를 격파한 북미왕국의 함대 따윈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외무장관의 말에 표도르 3세는 동의하면서도 반문했다.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저들의 영토는 아시아까지 뻗어있다고 들었네. 그러니 군대를 동원해 저 시베리아 방면을 공격할 수도 있지 않나.”

하지만 외무장관은 작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잉글랜드, 네덜란드 외교관을 통해 알게 된 북미왕국의 정보를 언급하며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북미왕국은 아시아의 유민이 북미 대륙에 이주해 건국한 신생국입니다. 영토에 비한다면 인구는 적은 편이라고 알려졌지요. 인구가 적으니 군대의 규모도 그리 크지 않을 테고요. 또한, 시베리아는 무척 광활합니다.”

“섣불리 시베리아 방면을 공격하진 못할 거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차르시여.”

확실히 시베리아는 광활했고 설사 저들이 병력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보급선은 계속 늘어질 테니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한 표도르 3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북미왕국엔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입을 열었다.

“흠...하지만 북미왕국은 부유하지. 저들이 아무르 강 유역의 청나라를 지원하면 우리도 곤란해지는 것 아닌가?”

하지만 외무장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청나라는 반란으로 인해 아무르 강 유역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닙니다. 그러니 200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사라졌음에도 청나라군은 알바진을 공격조차 하지 않았지요.”

그 말에 표도르 3세는 고심하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그렇다면 자네 선에서 이 문제를 처리하도록 하게.”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르시여.”

하지만 표도르 3세는 청나라가 내부 반란을 진압하고 북미왕국이 뒤에서 지원한다면 훗날 아무르 강 유역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덧붙였다.

“다만 이 기회에 알바진에 병사와 물자를 지원하도록 하게. 청나라가 정신없는 틈에 아무르 강 유역을 확고히 우리 러시아 차르국의 영토로 만들자는 걸세.”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지요.”

* * *

다음날 러시아 차르국의 외무장관은 잉글랜드 외교관의 얼굴을 확인한 후 웃으며 말했다.

“작년에도 오시더니 이렇게 또 방문하실 줄은 몰랐군요. 이번에도 북미왕국 문제로 오신 겁니까?”

이에 잉글랜드 외교관은 살짝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도 북미왕국을 대리해 외교 문서를 전달하고자 온 겁니다.”

“흠...그겁니까? 이리 주시지요.”

“여기 있습니다.”

외무장관은 잉글랜드 외교관이 건넨 외교 문서들을 확인했고 그중 영어와 라틴어로 쓰인 외교 문서를 빠르게 훑어보고 중얼거렸다.

“흠. 각종 미사여구와 인사말을 제외한 내용 자체는 이전의 외교 문서와 동일하군요.”

물론 작년에 보낸 외교 문서보다 단어나 문장이 조금은 강경하게 쓰여있었지만, 외무장관의 말처럼 내용 자체는 같았기에 잉글랜드 외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가 작년에 방문했을 때는 현지 지휘관에게 사정을 알아보겠다는 말을 하셨었는데...지금은 이미 사정을 다 파악하셨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럼...”

잉글랜드 외교관은 러시아 차르국에서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해하면서 외무장관을 바라보았을 때 외무장관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현지 지휘관은 아무르 강에 나타난 북미왕국 선박이 문제라고 하더군요.”

“예?”

“아무르 강 유역 전체는 우리 러시아 차르국의 영토입니다. 헌데 북미왕국이 무단으로 남의 영토에 침입한 셈이니 현지 지휘관이 이를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잉글랜드 외교관은 북미왕국에서 흑룡강이라고 칭했던 강 이름을 아무르 강이라고 고집해 부르는 이유를 깨닫고 슬쩍 입을 열었다.

“그곳은 청나라의 영토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외무장관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아. 그 문제로 인해 꽤 오랫동안 청나라와 분쟁 중이긴 하지요. 하지만 아무르 강 유역은 우리 러시아 차르국의 영토입니다. 그곳에 살던 부족들도 우리 러시아의 차르께 충성을 맹세했고 말입니다.”

“흐음...”

잉글랜드 외교관이 알기로 흑룡강은 북만주에 속했고 만주는 청나라 왕실의 발원지였기에 외무장관의 발언에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자 외무장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청나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그 때문에 분쟁이 발생한 상황이니 아무르 강 유역이 누구의 땅인지는 일단 넘어가더라도 이 지역이 분쟁지역이라는 것은 명확하지요. 그리고 북미왕국의 배는 이러한 분쟁지역에 나타났고 우리 러시아 차르국의 적국인 청나라 병영에 보급 물자를 운송하고 있으니 이번 일이 발생한 원인은 전적으로 북미왕국에 있지요.”

러시아 차르국은 절대 북미왕국에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는 외무장관이었고 이를 파악한 잉글랜드 외교관은 내심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고 여겼지만 이를 내색하지 않고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니 귀국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북미왕국의 선박을 공격한 일을 사죄할 생각은 없다...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백번 양보해서 아무르 강 유역이 분쟁지역이라 하더라도 분쟁지역에서 적의 보급을 차단하려는 현지 지휘관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 부분은 러시아 차르국의 말도 일리는 있었기에 잉글랜드 외교관이 동의했다.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그 보급을 맡은 상대가 타국의 깃발을 매달고 있었다면 조금 신중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현지 지휘관은 그 깃발이 북미왕국의 깃발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요.”

“흐음...”

잉글랜드 외교관은 북미왕국의 깃발을 모르는 것이 말이 되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동유럽은 소식이 어둡고 문제가 발생한 북만주 지역은 이곳에서도 먼 만큼 소식에 어두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외무장관은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저들의 반격으로 현지 부대가 큰 피해를 보았으니 오히려 북미왕국이 아국에 사죄해야 한다고 봅니다만...아국은 관대한 만큼 그 부분을 따로 지적하진 않겠습니다.”

외무장관의 말이 끝나자 북미왕국의 강력함을 아는 잉글랜드 외교관은 러시아 차르국이 뭘 믿고 이러나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귀국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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