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화
정성국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조용한 곰이 가져온 신문을 받아들면서 물었다.
“이게 그 조선에서 발행된 신문이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작년에 유철의 편지를 받은 투로시노는 바로 외무청에 인쇄기를 요청했고 유철을 비롯한 개화파 관리들이 인쇄기를 요청한 이유가 민간 차원에서 신문을 발행하기 위함임을 알게 된 정성국은 증기기관으로 동작하는 인쇄기를 개발한 이후 창고에서 먼지만 쌓여가던 구형 인쇄기를 넘겨주라고 명령했다.
해서 외무청에서는 겨우내 이 인쇄기를 다시 정비하고 활자를 대량으로 만들어 북방항로가 열리자마자 몽땅 배에 실어 개항장으로 보냈고.
헌데 이렇게 보낸 인쇄기의 수가 조정에서 사들인 인쇄기의 숫자보다 많았기에 개화파 관리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북미왕국에서 인쇄기들은 판매하는 것이 아닌 선물로 넘겨준 만큼 인쇄기 구매 비용은 들지 않긴 했지만, 북미왕국에서 선물한 인쇄기들을 운용하려면 수백 명은 필요해 보였고 저 인쇄기를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해서 개화파 관리들은 고심한 끝에 절반 가까이는 나라에 바치고 절반의 인쇄기로 신문사와 출판사를 설립해 신문과 책을 찍어내 지방 양반들의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그리고 신문의 경우 겨우내 준비를 다 해두었기에 인쇄기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신문을 찍어내기 시작했고 북미왕국에서 인쇄기를 선물로 보내준 만큼 당연히 이 인쇄기를 통해 인쇄한 신문을 북미왕국으로도 보냈고 그 신문 중 하나가 이렇게 정성국에게 당도한 것이다.
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에게 받아든 신문 맨 앞장을 살펴보고 중얼거렸다.
“세계신문이라...신문 이름이 좀 의외네?”
정성국은 조선신문이나 조선주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뚱맞게 세계신문이라는 글자가 신문 맨 위쪽에 큼지막하니 찍혀 있자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처음에는 북미신문처럼 신문 이름을 조선신문으로 하려 했다는데 함부로 나라 이름을 썼다가 책잡힐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었고 이 신문이 다루는 내용이 조선 내의 일은 다루지 않고 조선 밖의 일을 중점적으로 다루기로 한 만큼 조선신문이라는 이름은 맞지 않는다는 의견 때문에 결국 세계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조선 밖의 일을 중점적으로 다룬다고? 아. 이전에 민간에서 신문을 발행하다 문제가 일어난 적이 있어서 그런 건가?”
조용한 곰 역시 이전에 조선에서 일종의 관보를 발행했다가 문제가 발생했었다는 사실은 조선 사절단을 통해 들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물론 그 부분도 없진 않겠지요. 하지만 소위 조선의 개화파들이 이 신문을 발행해 원상의 도움을 받아 조선 팔도에 뿌리려는 이유가 결국 이 신문을 통해 지방 양반들의 인식을 변화시켜 자신들의 개혁에 공감하거나 최소한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하려는 것이니만큼 조선 내의 일보다는 조선 외부의 일을 주로 다루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듯싶습니다.”
“세계가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줘서 섣불리 개혁에 반대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거군?”
“그렇게 추측됩니다.”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감회가 새롭다는 표정으로 손에 들려 있는 세계신문을 바라보았다.
북미왕국과의 교류로 인해 조선이 점차 변해간다는 증거나 다름없었기에.
그리고 지금은 한양의 양반들만 세상을 파악하고 생각을 고치고 있지만, 이 신문으로 인해 지방의 양반들도 조선이 안주하는 사이 세상은 무척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생각을 고치리라 믿었다.
최소한 지금의 양반들은 어렸을 때 왜란, 호란을 겪었던 인물들이었으니 나라에 힘이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흠. 이 신문이 꾸준히 발행되어 조선 팔도에 뿌려진다면 조선의 변화가 생각보다 빨라지겠는데? 슬슬 조선에 기반 시설을 건설하는 것도 생각해둬야겠어.’
정성국은 그렇게 상념에 젖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들고 있는 신문을 대충 훑어보았다.
“흠. 인쇄기가 달라 신문의 모양은 다르지만, 구성은 북미신문과 거의 같네.”
북미신문처럼 커다란 종이를 사용하진 않았기에 기사가 들어가는 중간 부분은 북미신문처럼 4칸이 아닌 2칸이라는 것과 북미왕국의 인쇄기를 사용했기에 한글로 좌에서부터 가로로 인쇄되었고 기사의 소제목,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 등을 표기하는 것까지 북미신문과 판박이였다.
해서 정성국이 중얼거리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북미신문의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광고까지 그대로 넣을 줄은 몰랐는데?”
북미신문과는 달리 크기를 줄였을지언정 맨 밑에 원상에서 생산하는 화장품과 안경 광고를 보고 정성국이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대답했다.
“계속해서 신문사를 유지하고 신문을 발행하려면 꾸준히 재물이 들어가는 만큼, 그리고 원상의 요청으로 결국 광고를 넣은 모양입니다.”
“그래?”
“예. 원상에서도 꽤 물심양면으로 이들이 차린 신문사를 돕고 있다 보니 그 보답으로 광고 한 자리를 얻게 되었다는군요.”
“계속? 하하하. 나쁘지 않네. 헌데 기사 내용은 묘하게 낯익은데?”
정성국이 소제목과 내용을 대충 훑어보고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기사의 내용 자체가 예전 북미신문의 기사와 무척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성국의 의문에 조용한 곰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저도 처음 읽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유럽과 교류하지 못하다 보니 정보를 얻을 통로가 북미신문뿐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 입장에선 우리 북미왕국도 외국인 만큼...”
“그래서 북미신문에 적힌 기사를 적당히 재구성해서 기사로 쓴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흠...뭐 나쁠 것은 없겠군.”
“그렇습니다.”
세계신문은 한글로 인쇄되었기에 정음을 아는 조선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었다.
거기에 세계신문은 북미신문을 적당히 편집했기 때문에 북미왕국의 소식이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도 했고 신문의 발행 의도 자체가 세상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겠다는 것인 만큼 북미왕국의 발전상을 꽤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세계신문을 통해 조선의 백성들은 북미왕국이 부유하다는 것과 북미왕국의 백성들이 무척 잘 산다는 것을 알게 될 테고 그러면 조선의 백성 중 일부는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려 들 테니 북미왕국으로서는 오히려 환영이었다.
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에게 말했다.
“국영 상단과 원상을 통해 계속 지원해 주게.”
“알겠습니다. 전하.”
* * *
운 좋게 조선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미왕국을 방문한 조선의 선비들은 새한성에 도착한 직후 의욕에 넘쳐 새한성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새한성은 한양보다 더운 편이었기에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새한성 곳곳을 구경하던 조선의 선비들은 이내 더위에 지칠 수밖에 없었고 그때 이들의 눈에 찻집의 입구에 놓인 커다란 입간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입간판에 적힌 내용을 보고 선비들은 홀린 듯 찻집으로 들어갔고.
빈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했기에 질린 표정으로 한 선비가 중얼거렸다.
“허. 사람이 정말 바글바글하구려.”
"그러게 말이외다. 물론 북미왕국 백성들이 커피를 좋아해 찻집은 항상 북적거린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습니다만 이건..."
그때 훤칠한 선비가 찻집 안을 둘러보다가 창가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 저기 보시오. 저기 색목인이 있구려!“
그 말에 다른 선비들도 고개를 돌려 창가 쪽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서양인을 보고 입을 열었다.
“아. 뭐 북미왕국에서 초청한 유럽인들인가 보군요.”
"으음. 색목인이라 그런지 피부나 머리카락의 색깔도 그렇고 확실히 특이하구려."
“이야. 이거 운이 좋군요. 작년에는 유럽 사절단이 북미왕국을 방문해 유럽인들과 대화를 나누어보았다고 해서 참으로 부러웠는데 말입니다.”
훤칠한 선비가 즉각 유럽인들이 앉은 곳으로 가서 말을 걸 기세이자 왜소한 선비가 급히 막았다.
“외무청 관리가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구경거리도 아니고 말도 통하는 만큼 무례하게 굴지 말라고요. 저들이 한창 대화 중인데 갑자기 끼어들어 말을 거는 것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아...“
그 말에 훤칠한 선비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고 뒤쪽에 있던 풍채 좋은 선비가 끼어들었다.
"그렇지요. 그리고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색목...유럽인들 때문이 아닌 얼음이 들어간 냉차를 마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일단 목부터 축입시다.“
이들이 홀린 듯 찻집으로 들어온 이유는 입간판에 적힌 얼음을 띄운 시원한 냉차 판매 개시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그러니 목을 축이는 것이 먼저라는 단호한 기색을 풍기는 풍채 좋은 선비의 반응에 훤칠한 선비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아. 그랬지요.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찻값을 내도록 하지요.”
그러면서 훤칠한 선비는 주문을 받는 계산대 근처에 걸린 차림표를 보고 중얼거렸다.
"어...음. 매실 냉차와 귤 냉차라. 뭘 드시겠습니까?"
"오! 그 귀한 귤로 만든 냉차라니! 전 귤 냉차로 하겠습니다."
"저도요."
아무래도 조선에선 매실보단 귤이 더 귀했기에 선비들은 만장일치로 귤 냉차를 택했고 이에 훤칠한 선비는 계산대 뒤에서 주문을 받는 점원에게 귤 냉차 5잔을 주문하고 값을 치렀다.
그리고 점원이 가리킨 유럽인들이 앉은 자리 바로 옆쪽의 빈자리에 앉았고.
"의외로 찻값이 비싼 편이로군요. 한 끼 식사가 5전가량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고기가 포함된 적당히 배를 채울 수 있는 한 끼 식사가 5전인 것을 고려하면 차 한잔에 3전은 조금 비싼 것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왜소한 선비가 입을 열자 풍채가 좋은 선비가 고개를 저었다.
"음? 오히려 싼 것 아닙니까? 그 귀한 귤에 얼음까지 넣은 차가 고작 3전인데요."
"그렇지요. 물론 이곳의 기후는 따뜻한 편이라 조선과는 달리 귤이 잘 자랄 것 같긴 합니다만...차가 일종의 사치품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하면 의외로 저렴한 편이라고 봅니다."
다른 선비들도 풍채 좋은 선비의 의견에 동의하자 왜소한 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것도 그렇겠군요.“
그때 직원이 주문한 냉차를 가지고 조선 선비들이 앉은 자리로 다가왔고.
"여기 있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감사합니다.“
선비들은 즉각 얼음이 가득 담긴 커다란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오오! 얼음이 가득하군요!”
“허...찻잔에 냉기가 다 도는군요.”
선비들이 유리잔을 집고 그 차가움에 감탄하는 사이 풍채가 좋은 선비는 도저히 못 참겠다는 표정으로 곧바로 유리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냉차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크으...이거 정말 시원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리고 새콤달콤하니 맛도 참 좋습니다.“
“갈증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하군요.”
“이렇게 얼음이 가득한 냉차라니. 이곳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줄은 몰랐습니다.”
“북미왕국의 국력이 대단하긴 하군요. 이런 찻집에서도 얼음을 대량으로 사용할 정도로 얼음을 보관하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물론 조선도 꽤 많은 빙고를 운용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보관하고 있던 얼음의 양이 한정되어 있었기에 얼음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허나 북미왕국에서는 찻집에서 얼음을 사용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막대한 양의 얼음을 보관하고 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왜소한 선비가 질린 얼굴로 말하자 다른 선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북미왕국의 국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은 이미 새한성을 돌아다니며 충분히 느꼈기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이 냉차를 즐기는 데 집중했고.
그러자 떠들썩한 찻집이었지만 자연스럽게 옆자리의 유럽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고 이 유럽인들이 유창하게 조선말을 하자 선비들은 냉차를 마시면서도 자연스레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와우. 이거 정말 시원한데?“
"그러니까. 이들의 기술력은 정말 놀랍기 그지없군. 대체 전기로 어떻게 얼음을 만들어내는 건지..."
"유럽에선 기차 때문에 증기기관에 매달리고 있는데...내가 볼 땐 증기기관보다 전기가 더 중요한 것 같아."
"당연하지. 전기는 만능 물질 같단 말이지? 전기를 빛으로 바꿔 어둠을 밝히더니 이젠 전기로 얼음을 만들기까지. 정말 놀라울 정도라니까."
“도대체 전기를 생산하는 물질이 뭘까? 소문처럼 정말 전기 물고기를 이용하는 걸까?”
“글세...그건 잘 모르겠지만 이 냉장고, 냉동고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진다면 연금술사들은 이제 금이 아닌 전기를 생산하는 물질을 찾기 위해 고생할 것은 뻔해 보이는군.”
“그건 그렇지. 아. 빨리 마시고 일어나자. 슬슬 수업 시작할 시간이네.”
“벌써? 젠장.”
그러면서 유럽인들은 냉차를 벌컥벌컥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훤칠한 선비가 입을 열었다.
“어...들으셨소이까?”
이에 풍채가 좋은 선비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미왕국에서 또 새로운 기물을 개발한 모양이구려. 그것도 전기로 얼음을 만들어내는.”
다른 선비들도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전기를 이용해 여름에 얼음을 만들다니...이들의 기술은 자연의 이치마저 농락하는군요.”
“그보다 저들이 말한 냉장고나 냉동고에 관한 기사도 북미신문에 있을 것 같긴 한데...”
“우리가 몰랐던 것을 보면 분명 우리가 북미왕국에 도착하기 전에 다룬 모양입니다.”
“그럼 일단 숙소로 돌아가 외무청을 통해 이전 신문을 구해보는 것이 어떻겠소.”
“아아. 그럽시다.”
“잠깐! 이 냉차부터 다 즐기고요.”
이야기가 그렇게 진행되자 풍채 좋은 선비가 급히 덧붙였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다른 선비들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뭐 그러시지요. 급한 일도 아니니.”
“부족한듯한데 더 주문할까요?”
“그래도 되겠소이까?”
“하하하. 그러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