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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93화 (393/850)

393화

그렇게 라위터르와 대화를 나누던 정성국은 슬슬 업무 시간이 다가왔기에 집무실로 돌아가기 전 라위터르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질문인데...러시아 차르국에선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까?”

작년 흑룡강을 오가던 북미왕국의 배를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습격한 일이 발생했고 이 기회에 러시아 차르국과 제대로 된 국경 협상을 할 생각으로 북미왕국에선 당시 새한성을 방문 중이던 유럽 각국의 사절단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게 벌써 작년의 일이었는데 아직 러시아 차르국에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정성국이 궁금해서 라위터르에게 묻자 라위터르는 곧바로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 북미왕국의 외교문서를 러시아 차르국에 전달한 것이 맞지요?”

“그렇습니다. 저희도 그렇고 잉글랜드에서도 따로 사람을 보내 북미왕국의 글자로 쓰인 외교문서와 여러 유럽의 문자로 번역된 외교문서를 모두 전달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에스파냐의 경우 러시아 차르국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고 잉글랜드나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러시아 차르국도 드나들면서 최소한의 교류를 하고 있던 터라 외무청에서는 잉글랜드, 네덜란드에 러시아 차르국에 보낼 각종 외교문서를 넘겨주고 대신 전달해달라고 부탁했었다.

해서 네덜란드의 경우 실질적인 사절단의 책임자이자 외교관인 얀센이 네덜란드의 총독인 빌럼 3세에게 보고한 후 북미왕국을 위해 상인들의 배를 타고 러시아 차르국을 방문했고.

러시아 차르국의 외교관을 만나 자신이 방문한 목적을 이야기한 후 북미왕국의 외교문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러시아 차르국에서는 외교문서를 확인 후 별다른 말은 없었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일단 북미왕국이 흑룡강 유역에서 일어난 충돌이라고 주장하고 이 흑룡강이 아무르 강이라는 것을 파악한 외교관은 현지 지휘관의 보고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라고만 했지요. 물론 얀센은 새한성에서 자신이 직접 러시아인 포로를 목격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만 러시아 차르국의 외교관은 얀센이 포로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 러시아인이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가 아닐 수도 있다고 주장하며 현지 지휘관을 통해 정확한 사정을 파악한 후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라위터르가 말을 흐리자 정성국은 눈을 빛내며 재촉했다.

“다만?”

“얀센이 이야기하기를 러시아 차르국의 외교관들은 북미왕국과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얀센의 판단이긴 합니다만.”

“그래요?”

“그렇습니다. 뭐 저희와는 다르게 변방에 처박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전혀 모르는 자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할 겁니다. 그래서 얀센이 북미왕국의 국력을 이야기하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분명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까지 했습니다만...저들이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허.”

정성국은 라위터르의 말에 조금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북미왕국에서 생산한 각종 물품이 유럽에 불티나게 팔리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기에 유럽인들에게 북미왕국의 존재를 제대로 각인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라위터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러시아 차르국은 다른 것 같았으니.

‘아. 어찌 보면 당연한가. 청나라도 아래로 보던 작자들이니...’

러시아 차르국은 아무르 강 유역에서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발생한 이후에도 주변 부족을 복속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아무르 강 유역의 다우르 족 족장 간티무르가 300명의 부족원들을 이끌고 러시아 차르국에 투항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에 강희제는 러시아 차르국에 항의하며 간티무르의 송환을 요구했고.

러시아 차르국은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거절하다 1670년 청나라로 사절을 보냈기에 청나라는 당연히 이 사절들이 간티무르의 송환 문제를 논의할 거라고 생각했고.

하지만 청나라의 예상과는 달리 사절단은 아무르 강 유역의 부족장들이 신민을 이끌고 차르에게 귀순한 것처럼 중국의 칸 역시 차르에게 귀순해 공물을 바치라는 패기 넘치는 내용을 담은 차르의 국서를 가지고 왔고.

그나마 사절단에게 다행인 점이라면 당시 자금성에서는 키릴문자로 적힌 국서의 내용을 파악해 만주어로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그렇게 강희제나 청나라 관료들은 국서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절단을 융숭히 대접하며 간티무르의 송환을 요청했을 뿐이었다.

그랬던 러시아 차르국이었으니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달리 북미왕국의 항의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아. 그리고 제가 암스테르담을 떠나기 직전 러시아 차르국을 방문했던 상인들이 이야기하길 러시아의 차르가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의외의 정보에 정성국이 눈을 크게 뜨자 라위터르가 확실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대 차르는 그렇게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해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 아들이 차르로 즉위했다는데 그게 올 초였으니...꽤 어수선할 겁니다.”

라위터르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표트르 대제가 태어나긴 했을 텐데...그가 차르에 즉위하는 것은 장성했을 때의 일이니 지금의 차르는 표트르 대제 이전 차르인 표도르 3세 인가 보군.’

“그런 상황이면 바로 답신을 보내거나 외교사절을 파견하긴 어렵겠군요.”

“아마 그럴 겁니다.”

“흐음...알겠습니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군요.”

정성국의 슬쩍 웃으면서 이야기하자 라위터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군요.”

* * *

정성국은 집무실로 돌아와 라위터르에게 들었던 러시아 차르국의 이야기를 복기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집무실로 들어왔고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아. 왔나.”

“부르셨습니까. 전하.”

정성국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한 곰과 티테이블로 이동했다.

그리고 정성국은 커피를 내리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듣자니 라위터르 경과 그 가족들이 아직 숙소에 묵는다던데...”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군사대학 인근에 라위터르 경과 그 가족들이 살 집을 마련해 두었으니까요. 다만 가구와 집기 일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에 잠시 숙소에 머무는 것뿐입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외무청에서 나름대로 신경 써 주게.”

“물론입니다. 외무청 관리도 붙여두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내린 커피를 조용한 곰에게 건넨 후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자네를 부른 건 러시아 차르국 문제 때문일세.”

“아.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보고드릴 생각이었습니다만...라위터르 경이 이야기를 한 모양이군요.”

“그렇지.”

이에 조용한 곰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잘 되었군요. 그러면 러시아 차르국의 내부 사정에 관련된 보고는 생략하겠습니다. 일단 외무청에서는 추가로 외교문서를 보낼 생각이기는 합니다. 다만 라위터르 경이 해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저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겠지요. 그렇기에 저들을 압박해 결국 협상장으로 끌어내야 하는데...”

조용한 곰이 말을 흐리자 정성국은 쓴웃음을 머금고 대꾸했다.

“압박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거지?”

하지만 조용한 곰은 예상외로 고개를 저었다.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군사적 분쟁이 일어날 수 있고 생각보다 큰 지출이 발생할 수 있기에 꺼려지긴 합니다만.”

그 말에 정성국은 표정을 살짝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군사적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그럼...”

“예. 카무이 반도 북쪽을 공략하는 거지요.”

“카무이 반도라...”

조용한 곰이 북방 항로를 연결하는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카무이 반도를 언급하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성국도 러시아 차르국을 압박하려면 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한 러시아인들을 건드려 저들의 돈줄인 모피 수급을 방해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러자면 북미왕국의 병사들을 저 드넓은 시베리아로 보내야 하는데 그게 꺼려졌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이번에 북방 항로가 풀리면서 여러 보고가 올라왔는데 그중에 카무이 반도 북쪽의 원주민들이 이미 러시아 차르국에 복속된 것 같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생각을 멈추고 기겁하며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뭐? 우리가 영토로 설정한 지역에서 사는 원주민들이 말인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한 카무이 반도 북쪽의 원주민들은 우리 북미왕국 영토 바로 위에 거주하는 부족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와는 별다른 교류도 없었고...해서 이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지요. 알고 보니 이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나타난 건 몇 년 전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조용한 곰은 의자에서 일어나 집무실 한쪽에 걸린 북미왕국의 지도 좌측에 위치한 카무이 반도 위쪽 지역을 가리키며 설명하자 정성국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전생 러시아의 캄차카 지방이 캄차카 반도와 그 북쪽까지 포함하는 북위 65도까지의 길쭉한 모양의 지역이었다면 북미왕국이 자신들의 영토로 생각하는 카무이 반도의 영역은 북위 60도 인근에서 대각선으로 국경선을 그어버린 형태였는데 이는 훗날의 러시아와 굳이 긴 국경선을 맞대고 싶지 않았던 정성국이 카무이 반도에서 가장 좁은 지역을 국경선으로 잡으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국경선의 길이는 약 80km 정도로 짧은 편이었고.

그리고 조용한 곰이 말한 러시아 차르국에 복속된 원주민들은 북미왕국에서 생각하는 국경선 북쪽에 자리한 부족이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카무이 반도 자체가 워낙 큰 편이고 원주민들끼리의 교류가 활발한 편은 아니잖습니까. 더불어 카무이 반도를 우리 북미왕국의 영역이라고 이야기하고 저렇게 국경선을 잡았습니다만 실제 우리가 점유한 곳은 카무이 반도의 남쪽에 불과하고 거점 역시 카무이 반도 남쪽의 카무이 항뿐이고요. 그리고 국경선 인근에 병사를 배치하지도, 국경선 인근의 원주민 부족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는 편도 아니다 보니 이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늦어졌습니다.”

북미왕국에선 정성국의 명령에 따라 북위 60도 인근에 국경선을 긋고 그 남쪽을 북미왕국의 영토라 여겼으며 학교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상황이 조금 다르긴 했다.

그나마 카무이 반도 남쪽은 주로 아이누인들이 거주했고 이 아이누인들은 자신들을 북미왕국의 백성이라고 여겼기에 온전히 북미왕국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중부 이후부터는 북미왕국을 좋은 거래 상대 정도로만 여겼으며 국경선 인근의 북쪽에 자리한 원주민들은 남쪽에 북미왕국이라는 대부족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 있다는 정도였달까.

이는 카무이 항의 관리들이 카무이 항이 위치한 아바차 만 인근을 개발하며 주변 원주민들을 이 지역에 정착시키는 일에 관심을 둘 뿐 북쪽엔 별반 관심이 없었기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이러한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러시아 차르국이 벌써 카무이 반도 북쪽까지 도달했다라...그럼 그곳에는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배치된 건가?”

“아. 그건 아니라더군요. 원주민들은 말을 탄 러시아인들의 강요에 못 이겨 복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매년 일정량의 모피를 바치라고 이야기한 후 떠났답니다. 그 후 매년 공물 관리인이 러시아인들을 대동하고 찾아와 모피를 수거한다더군요. 그리고 차르의 선물이랍시고 물품을 조금 던져 주는 터라 제가 보기엔 아시아의 조공 체계와 비슷하더군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야삭이던가?’

1598년 시비르 칸국이 멸망하면서 러시아 차르국의 동쪽 장해물은 완전히 사라졌고 덕분에 러시아 차르국은 비교적 손쉽게 동진할 수 있었다.

다만 차르는 자신의 직속 병사들을 보내기보다는 상인과 코사크인에게 이 일을 맡겼고 이들은 부드러운 금이라 불리는 모피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거침없이 동진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세금만 가혹하게 뜯어내자면 당연히 현지인들이 반발할 테고 드넓은 시베리아 지역의 현지인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그걸 제압하느라 인력과 시간을 소모할 것은 뻔했기에 동양적 조공에 익숙한 이들에게 맞춰 모피를 조공으로 바치면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원주민 부족들은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 위해 러시아의 차르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에 동의했고 이것이 바로 야삭(yasak)이었다.

덕분에 한 줌도 안 되는 코사크인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시베리아를 통치하고 있었고.

“그러면 북쪽을 공략하겠다는게...”

“예. 무력이 아니라 교역을 통해 공략하겠다는 겁니다.”

원주민들이 러시아 차르국의 통치를 받아들인 것은 결국 코사크의 무력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교역의 이점 때문이었다.

다만 북미왕국이 여러 지역의 원주민들과 교역하는 것에 비하면 러시아인들의 거래 조건은 거의 갈취에 불과했을뿐더러 대가랍시고 내어주는 물품들의 품질도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북미왕국에서 작정하고 양질의 교역품을 무기로 시베리아 지역의 원주민들을 흔든다면 러시아 차르국은 기겁하며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거나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지 않겠느냐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고심했다.

잘못하면 국경선이 넓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고 해전과는 달리 육전은 아무리 무기가 우세하다고 해도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하지만 이 방법이 러시아를 압박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정성국도 동의했고 러시아 차르국이 북미왕국을 건드렸다는 사실은 유럽 국가들도 다 알게 되었는데 공격을 받고도 가만히 있는 것도 문제였기에 외무청의 말대로 행동할 뜻을 굳히면서 입을 열었다.

“근데 국영 상단이 움직인다고 쳐도 상단과 교역품의 안전을 위해서는 병사를 대동해야 하잖아?”

“그렇지요. 해서 카무이 반도의 병사 수를 늘리고 아이누 탐사대를 창설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입니다.”

“아이누 탐사대라...”

기존의 탐사대를 추운 지역으로 보낼 바엔 그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누인들을 탐사대로 훈련하자는 말에 정성국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알겠네. 어차피 경비대를 육성하고 탐사대를 훈련시키는 것도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일단 외무청에서는 예정대로 다시 한번 외교문서를 러시아 차르국으로 보내게. 그리고 저들이 별다른 반응이 없다면 외무청의 의견대로 일차적으로는 카무이 반도의 북쪽 원주민들을,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서쪽의 원주민들을 회유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허면 이번에 보내는 외교문서는 조금 더 공격적으로 작성하겠습니다.”

“흐음...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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