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조선 사절단의 정사로 북미왕국을 방문한 신임 예판은 조선으로 돌아온 후 대전에서 국왕인 이연과 조정 신료들 앞에서 북미왕국에서 가져온 현미경, 사진기를 비롯한 여러 기물을 설명하고 북미왕국의 방문 중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보고한 후 퇴청해 자택에 잠시 들렀다 항상 그래왔듯 정태화의 사랑방으로 향했다.
정태화의 사랑방에는 여전히 관리들로 붐볐고 이번에 복귀한 조선 사절단이 가져온 여러 화제로 시끌벅적했다.
그러다 신임 예판의 등장에 잠시 이야기의 흐름이 끊겼지만, 그것도 잠시.
사랑방의 관리들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원래 북미왕국의 기물들이 대부분 신기하긴 했었지만...사진기는 정말 대단하군요.”
“예. 풍경을 그대로 옮겨 기록하는 기물이라니...그것 참...”
이번 조선 사절단이 가져온 물품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나 사진기였다.
풍경을 그대로 기록하는 기물이라니.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고 그런 사진기를 만들어 낸 북미왕국의 기술력에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해서 관리들이 감탄사를 토해내자 상석에 앉아있던 정태화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진기도 놀랍긴 한데 이 사람은 그 사진기로 찍은 북미왕국의 풍경 사진이 참으로 이색적이더군요. 조선의 풍경과는 확실히 다른 편이라 말입니다.”
유럽 사절단이 떠날 즈음에 사진기를 선물 받으면서 조선 사절단도 비슷한 시기에 사진기를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조선 사절단은 느긋하게 새한성의 풍경 곳곳을 찍어 가져올 수 있었다.
해서 아직 북미왕국을 방문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번 조선 사절단이 가져온 사진을 감상하면서 아쉬움과 호기심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고.
정태화 역시 누구보다 북미왕국을 방문하고 싶었지만, 고령이다 보니 섣불리 북미왕국을 방문할 수 없어 무척 아쉬웠었는데 이번에 사진을 통해 북미왕국의 풍경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정태화의 반응에 주로 북미왕국을 방문해보지 못한 관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지요. 건물 양식도 확실히 다르고.”
“맞습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북미왕국의 궁궐도 그렇고 그 궁보다 더 거대한 그 대학교들도 인상적이었어요.”
“예. 특히 화공들이 그린 그림과는 느낌이 전혀 다르더군요.”
“아. 전 기차가 가장 인상적이더군요. 실물을 보신 분들께서 항상 그림은 기차의 육중함을 제대로 표시하지 못했다고 누누이 말씀하신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달까요?”
“예. 그렇지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공조 참판이 조금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헌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밤거리의 사진이 없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사진에 찍힌 가로등은 빛을 발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라 가로등의 불빛으로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새한성의 밤거리 사진이 없는 것이 아쉽긴 하군요.”
북미왕국을 방문하지 못한 관리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기차나 다른 풍경도 그림과 사진은 전혀 달랐기에 실제 가로등이 빛을 발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사절단이 가져온 사진 중에는 그러한 사진은 없었으니까.
이에 신임 예판이 자신도 아쉬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진기에도 한계가 있는 터라 어두울 때는 제대로 찍히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시도는 했었지만, 윤곽이 뭉개져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흑백으로만 이루어진 사진이니 어둠을 밝히는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어렵겠지요.”
“음. 결국, 직접 북미왕국에 방문해야 한다는 뜻이니...허허. 이거 내년에도 사절단에 참여하기가 쉽지는 않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사진의 존재로 북미왕국의 호기심이 일부 풀리기는 했지만, 오히려 사진 덕분에 북미왕국의 호기심이 커지기도 했기에 이조 참판의 말에 사랑방 안에 있는 관리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떻게 하면 내년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북미왕국을 방문할 수 있을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를 눈치챈 유철이 피식 웃으며 바로 주제를 바꿔버렸다.
“그보다 새한성에서 유럽의 사절들을 만난 이야기를 좀 자세히 해주세요. 정말 말이 통하던가요?”
이에 사랑방은 무척 조용해졌고 신임 예판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저들 중 일부는 조선말을 무척 유창하게 하더군요. 뭐 저들은 조선말이라기보단 북미왕국말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습니다만은...”
“허허허.”
조선말을 북미왕국말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에 다들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유럽의 사절들은 조선의 존재를 잘 알지도 못할 것이고 저들이 조선말을 배운 이유는 북미왕국이 사용하는 언어라는 이유 때문이었으니 어쩔 수 없긴 했지만.
“그래. 이야기는 나누어 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환영 만찬에서 에스파냐 사절단의 대표가 다가와 우리 조선과 북미왕국의 관계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더군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북미왕국에서도 저희에게 유럽 사절단의 존재를 알려주면서 사실대로 이야기하라고 하더군요.”
“어? 그렇습니까?”
지금껏 북미왕국은 유럽을 무척 경계하며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유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오히려 북미왕국에서 조선 사절단에게 요청해 적당히 둘러댈 줄 알았는데 사실을 다 밝혔다니 놀랄 수밖에.
이에 신임 예판이 웃으며 답했다.
“새한성을 개방한 이상 이를 숨기기도 쉽지 않고...음. 이전까지 북미왕국은 분명 유럽을 무척 경계했었습니다만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한 이후로는 유럽을 상대로 북미 대륙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그 때문에 새한성을 개방한 것 같고요.”
“음...그렇군요.”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조 판서가 입을 열었다.
“뭐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요. 프랑스는 유럽의 강국이라던데 북미왕국은 그 프랑스를 손쉽게 이기지 않았습니까. 충분히 자신감이 넘칠 수밖에요.”
이미 고위 관리들은 북미왕국을 통해 유럽의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으니 병조 판서의 이야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해서 사실대로 대답했고 이를 듣고 에스파냐 사절단의 대표는 몹시 경악하더군요. 저들은 북미왕국을 우리 조선의 식민지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라.”
“예? 식민지요? 허허허.”
유철을 비롯해 사랑방에 있던 고위 관리들은 북미왕국을 조선의 식민지로 생각했다는 이야기에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북미왕국의 국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개혁을 시도하려는 이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에 신임 예판도 웃으며 말했다.
“예. 웃기긴 하지요. 아무튼, 제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이 착각했다는 사실과 현재 북미왕국의 기술 수준이 고작 15년 만에 이룩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척 충격을 받은 눈치였습니다.”
“그건...그렇겠지요. 솔직히 저희도 북미왕국의 급격한 발전이 이해가 안 될 정도니.”
북미왕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면 할수록, 그리고 북미왕국의 서적을 통해 저들의 학문을 살피면 살필수록 고작 15년 만에 저러한 발전을 이룩한 북미왕국이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당시 북미왕국의 국왕과 함께 북미 대륙을 방문했다는 일부 장인들이 무척 아쉬울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사랑방에 앉아있던 이들은 에스파냐 사절단 대표가 얼마나 놀랐을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정태화는 살짝 웃으며 다른 사절단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졌고 신임 예판이 이에 답변하며 유럽 사절단에 대한 정보를 적당히 풀어놓았을 때 신임 예판이 말했다.
“아. 그리고 저들은 우리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으로 생각하고 있더군요.”
“일종의 제후국이니 속방으로 생각할 수는 있겠군요.”
“으음...”
그 말을 듣고 다른 관리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꾸했지만, 유철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호조 판서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유럽에서의 속국이라는 개념은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는 종속된 나라라는 뜻입니다. 헌데 그건 아니잖습니까.”
유철의 설명에 신임 예판은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관리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그건 아니지요.”
“어찌 오랑캐 따위에...”
물론 병자년의 일로 사직을 보전하기 위해 청나라에 항복하고 고개를 숙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청나라에 완전히 정복되거나 종속된 것은 아니었기에 사랑방 안에 있던 고위 관리들은 유럽 사절단의 인식에 분개했고 신임 예판이 입을 열었다.
“예. 해서 저도 그 부분을 정확히 설명하긴 했습니다만...그런 일을 겪고 보니 이 기회에 일부 인사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북진까지는 어려워도 자주독립을 천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말에 유철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북진하자는 이야기와 똑같습니다. 자주독립이라는 이야기는 결국 조공 체계에서 벗어나겠다는 뜻인데 청나라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보겠습니까?”
그 말에 병조 판서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청나라는 지금 반란으로 인해 사정이 좋지 않잖습니까. 그런데 과연 이곳으로 병력을 보내겠습니까? 그럴 상황이 아닐 텐데요?”
병조 판서의 말에 다른 관리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철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음...당장은 보내지 않더라도 반란을 진압하면 어떻게든 응징하려 들겠지요. 그럴 바엔 북진해서 청나라를 여러 방향에서 압박하는 것이 낫습니다. 헌데 아국은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반란군이 이기고 청조가 망하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훗날 반란을 진압하고 다른 곳에 신경 쓸 필요 없는 청나라의 정예병들이 조선으로 진군할 테니 그럴 바엔 차라리 북진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그동안 별다른 준비를 하지 못한 조선이 북벌을 시도하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웠기에, 오삼계가 대명의 부활을 외치며 칼을 뽑아 들었다는 이야기가 들리자 이 기회에 병자년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선비들에게 일단은 개혁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타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사랑방의 관리들은 유철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때 병조 판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타국이 아국을 공격한다면 북미왕국이 돕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중재라도 할 테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 말에는 유철도 신음을 흘리며 고민했다.
분명 북미왕국은 조선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투로시노를 비롯한 북미왕국의 관리들은 조선이 정말 위급한 상황이 되면 돕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었으며 유철 역시 북미왕국의 상황을 잘 알았기에 쉽사리 조선을 포기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때 정태화가 입을 열었다.
“물론 아국과 북미왕국이 무척 특별한 관계이기는 합니다만...북미왕국만 믿고 행동하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고 봅니다. 자체적으로 어느 정도 힘을 키워야지요.”
그 말에 유철도 마음을 다잡고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북미왕국이 아국을 도와주려 해도 거리의 문제가 있으니 대대적으로 돕는 데는 꽤 오랜 시일이 걸린다는 것도 그렇고요.”
이에 공조 참판이 중얼거렸다.
“으음...천상 개혁을 더 빠르게 추진해야 한다는 거군요.”
“그래도 너무 급진적인 정책들은 조금 시간을 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북미왕국을 통해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과 북미왕국을 다녀온 선비들을 통해 한양의 사대부들은 조선도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더불어 훗날을 대비해 군대를 정비해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재원이 문제였고 지금도 백성들을 쥐어짜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다른 세금을 물릴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더불어 백성들에게 세금을 추가로 걷는다 한들 군대를 정비하고 왜란 이후 엉망이 되어버린 해군을 정비할 수준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여러 개혁안을 마련했고 그중에는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걷는다는 것도 있었다.
다만 이 자리에 있는 관리들은 대부분 이에 공감했고 한양의 사대부들도 어느 정도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기에 동의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지방의 양반들은 강하게 반발할 것이 뻔했다.
해서 조금씩 저들의 인식을 변화할 때까지 어느 정도 여유를 갖자고 했는데 다시 개혁을 빠르게 추진하는 것만이 답이라는 공조 참판의 이야기에 예조 참판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고 이 때문에 사랑방은 꽤 시끌벅적해졌다.
일부는 반란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만큼 최대한 빠르게 개혁해 최소한 육군을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부는 그러다 지방의 양반들이 개혁에 강력히 반발하며 개혁 자체가 어그러질 것을 우려했고.
그때 유철이 손뼉을 치며 좌중을 집중시킨 후 입을 열었다.
“이건 어떻습니까? 신문을 이용하는 겁니다.”
“신문을요?”
“예. 북미왕국처럼 민간 차원에서 신문사를 건설하고 신문의 영향력을 이용하는 겁니다.”
“신문의 영향력이라...”
이들도 신문의 영향력을 충분히 짐작했기에 신문을 이용해 지방 양반들의 생각을 변화시키자는 유철의 말에는 괜찮은 반응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조 참판이 지적했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선조 시절 민간업자들이 사헌부의 허락을 얻어 조보를 목판 인쇄해 팔았고 사대부들이나 글을 아는 백성들은 이를 환영했지만, 선조가 그 사실을 알고 국가기밀의 유출을 우려해 민간업자들을 모조리 유배시켜버린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신문을 발행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걱정했지만, 유철은 고개를 저었다.
“이전처럼 조보를 그대로 찍어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조선 내의 소식보다는 주로 조선 밖의 세상이 돌아가는 소식을 싣는다면 기밀을 누설한다는 이유로 탄핵받을 이유도 없지요.”
그 말에 다른 관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그거 나쁘지 않군요.”
“세상이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지방의 시골 선비들도 알게 한 후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자는 거군요? 신문에 사설을 이용해서?”
“그렇습니다. 사전 작업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는다면...반발이 무척 거셀 테니까요.”
이들은 이미 단순히 사실만 전하는 것처럼 보였던 신문도 기사의 논조나 사설을 이용해 여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지 오래였기에 유철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은 것 같습니다. 물론 민간 차원에서 신문사를 건설하려면 꽤 많은 재물이 들어갈 것 같습니다만...”
이에 유철이 입을 열었다.
“일단 투로시노를 통해 인쇄기와 종이를 싸게 구할 수 없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신문사는 신문을 찍어내고 신문을 조선 내에 배포하는 일은 원상이나 보부상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렇게 많은 재물이 들어갈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겠군요. 거기에 신문을 적당한 가격에 판다면 운영하는데도 큰 재물이 들어가지 않을 테니...그 정도면 십시일반 재물을 모아 신문사를 설립하는 것도 괜찮겠군요.”
호조 판서의 이야기에 사랑방 안의 사람들이 수긍하는 듯 하자 유철이 말했다.
“허면 일단 원상을 통해 투로시노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