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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86화 (386/850)

386화

더위가 꺾일 무렵 집무실을 찾아온 조용한 곰이 북미왕국의 초대에 응한 유럽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드디어 대서양을 건너 북미왕국에 도착했다고 보고하자 정성국은 반색했다.

“오. 드디어 도착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번에 배를 타고 새진주에 도착한 유럽 학자들과 예술가들의 목록이 적힌 보고서를 정성국에게 건넸고 정성국은 이를 받아들고 먼저 학자들의 목록을 차분히 훑어보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흐음...”

어차피 학자들의 경우는 정성국이 아는 이름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다.

물론 지금 시대에 정성국이 아는 학자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를 거친 고전 물리학을 집대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아이작 뉴턴도 있었고 르네 데카르트와 함께 유럽 근세사에 대표적인 복합 천제로 평가받는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도 있었으며,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와 함께 합리주의 3인방으로 불리는 바뤼흐 스피노자 등 꽤 많은 인물이 있긴 했다.

다만 이번에 초청한 학자들은 에스파냐, 잉글랜드에 거주하는 학자에 한정했기에 이 조건에 맞는 인물은 아이작 뉴턴 정도였고 그는 이미 케임브리지의 루카스 수학 석좌 교수 자리에 있는 시기였기에 북미왕국의 초청에 응하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고.

‘역시 뉴턴은 오지 않았군. 그럼 천상 나중에 잉글랜드에 외무청 관리를 파견하면 그때 적당히 후원하다가 남해 거품 사건 이후로 재산을 날려버리면 도와줘야겠네.’

정성국은 필요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 전생의 지식을 꺼내 수많은 책을 집필했기에 뉴턴뿐만 아니라 여러 학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업적을 도둑질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정성국이 이름을 알 정도면 역사에 남을 뛰어난 천재나 다름없었기에 다른 업적을 세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성국으로서는 이들에게 내심 미안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따로 이들을 개인적으로 후원해 이들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을 하고 있었고.

뉴턴의 경우는 남해 거품 사건 때 재산을 거의 다 날리는 것으로 기억하는 만큼 이때 경제적인 지원을 해서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줄이려는 정성국이었다.

그리고 정성국은 학자들의 목록을 내려놓고 예술가들의 목록도 살펴본 후 내심 중얼거렸다.

‘으음...역시 기억나는 이름은 없나. 뭐 예술에 관심이 많지 않은 내가 기억할 정도면 역사에 남을 거장이라는 뜻인데...그런 인물이 많지도 않을 테니 어쩔 수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성국은 고개를 들어 조용한 곰을 바라보고 물었다.

“이들은 지금 어디 있나?”

“오랜 선상 생활로 꽤 고생한 터라 일단은 새진주에서 휴식 중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건강이 회복되면 그때 새한성으로 데려올 생각이고요.”

범선으로 대서양을 건넌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아는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들의 숙소는 마련해 두었지?”

“물론입니다. 새한성 대학교 인근에 마련해 두었지요. 더불어 저들에게 붙일 외무청 관리도 준비해두었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다가 중얼거렸다.

“헌데 외무청 관리의 도움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으려나?”

그리고 정성국의 의문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러자면 저들 숫자에 맞게 외무청 관리를 배정해야 하는데...현실적으로 어렵지요.”

물론 외무청에서는 에스파냐어와 영어를 할 줄 아는 외무청 관리를 최대한 배정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초청한 모든 인사에게 개인 통역사처럼 붙여주진 못했다.

더불어 이번에 초청한 인사들에게 배정한 외무청 관리는 외무청에서 단기 교육을 통해 키워낸 자들이었기에 일반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할지언정 그 이상을 기대하긴 어려웠고.

이러한 설명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천상 내년에 바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투입할 수는 없겠군.”

“예. 저들이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하더라도 반년 만에 언어를 익히기는 어려울 겁니다. 물론 이번에 초청받은 인물 중 에스파냐인들 상당수가 우리 말을 어느 정도 할 줄 아는 터라 그들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응? 우리말을 할 줄 안다고? 에스파냐 본토인들 아닌가?”

정성국이 의외라는 듯 되묻자 조용한 곰이 웃으면서 부연해서 설명했다.

“아. 그렇다고 유창하게 하는 수준은 아닙니다. 북미왕국의 과학과 기술 수준이 높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몇몇 학자들은 북미왕국에 흥미를 갖고 책으로 독학한 모양입니다.”

“책? 아. 누에바 에스파냐의 외교관들이 만들었다는 그?”

북미왕국과 에스파냐는 꽤 오랫동안 교류했고 자연스럽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외교관들은 북미왕국의 말과 글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누에바 에스파냐의 외교관들은 후임을 비롯한 다른 외교관들에게 북미왕국의 말과 글을 가르치기 위해 언어 입문서를 비롯한 여러 책을 집필했다는 사실은 정성국도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북미왕국의 국력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사실과 북미 신문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최근 이 책들이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는 사실도.

헌데 그 책이 에스파냐 본토에도 흘러 들어가 이번에 초청한 사람들이 이것으로 공부했다는 말에 정성국은 의외라는 듯 묻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간단한 의사소통은 가능하더군요.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이 그리 적지는 않았습니다.”

“어? 그래?”

“우리의 초청을 받아들여 위험한 항해 끝에 이곳에 도착할 정도라면 일단 북미왕국에 무척 관심을 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요. 더불어 10년간 북미왕국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과 배 안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 언어 입문서를 죽어라 파고든 모양입니다.”

어느 정도 기초가 있는 만큼 빠르게 언어를 습득할 것으로 예상한다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만족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거 다행이군. 10년 중 2년 가까이 허무하게 날리는 셈이라 아쉬웠는데...”

이에 조용한 곰은 자신만만한 미소로 대답했다.

“글쎄요. 이 새한성에서 10년 넘게 지내다 보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새한성을 방문했던 유럽 사절들은 유럽의 다른 대도시와 비교하면 무척이나 깨끗하고 살기 좋아 보인다고 극찬했었다.

거기에 수력 발전소가 완성되는 순간 새한성에 지내는 사람들은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고.

새한성에 지내면서 그런 편리함에 익숙해진 저들이 과연 계약한 10년이 지난 후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까 싶은 조용한 곰이었다.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 그보다 잉글랜드, 에스파냐의 분위기는 어떻다던가?”

이번에 북미왕국에 초청된 인사들은 잉글랜드, 에스파냐 본토에서 온 만큼 현지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질문하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아. 웅크린 늑대와 외무청 관리들이 이들과의 면담을 통해 두 나라의 분위기를 파악한 결과 나쁘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래?”

“예. 물론 일부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이를 알리지 않은 것을 볼 때 자신들의 예상보다 인구나 병력이 적은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표하긴 했답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당시에 우리 북미왕국을 상대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한 문제인데 당시에도 강력한 함대와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한 우리 북미왕국의 군대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해 결정을 내렸으니 상관없는 문제라며 반박했다더군요.”

“호오.”

“그리고 이미 우리와 조약을 맺은 만큼 이 문제를 거론해봐야 우리가 북미 대륙의 권리를 돌려주거나 추가로 보상해줄 리도 없고 오히려 우리와의 우호 관계가 어그러지거나 교역에 차질을 빚을 테니 이를 우려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더군요. 이러한 분위기를 볼 때 에스파냐나 잉글랜드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에스파냐의 경우 어차피 광활한 남미 대륙이 자신들의 식민지였고 북미 대륙엔 제대로 된 식민지를 건설하지 못했었던 만큼 북미 대륙의 권리를 되찾겠다고 나서며 북미왕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경우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일어난 반란을 북미왕국의 군대가 무력시위를 통해 가볍게 진압했던 사실과 최근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북미왕국의 군사력을 생각하면 비록 자신들의 예상보다 인구가 적고 그래서 병력의 규모가 작다 하더라도 과연 이를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었을까 싶었고 식민지 매각 결정을 내린 것은 국왕인 찰스 2세인 만큼 찰스 2세와 그 지지자들은 당시의 결정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에 별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고.

조용한 곰은 이러한 사정을 덧붙여 설명했고 정성국은 런던과 마드리드의 여론이 북미왕국에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다.

“휴우. 그거 다행이군.”

이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말했다.

“뭐 이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또 모를까 지금 북미왕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북미왕국의 기술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연발총마저 개발했다는 이야기에 다들 기겁했다고 합니다.”

유럽 사절단이 회전 단총의 존재를 알고 기겁했다는 보고는 전에도 들었기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전에도 듣긴 했지만, 회전 단총이 꽤 인상적이었나 보군.”

“예. 특히 저들은 우리가 이미 연발이 가능한 총을 개발해두고도 이를 자랑하지 않고 실제 배치해 사용 중이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굳이 알리지 않은 신무기가 많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고요. 그러니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섣불리 저들이 우리를 적대하거나 연합해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에 정성국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덧붙였다.

“거기에 외교관들이 새한성을 빛의 도시라고 극찬하고 여러 서적과 물품들을 보낸 탓에 오히려 두 나라에는 북미왕국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북미왕국산 물품은 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 정도랍니다. 하하하.”

“그거 나쁘지 않네.”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미소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유럽은 중국의 기술과 문화에 관심을 두면서 중국산 물품을 높이 평가했었는데 처음 북미왕국의 존재가 알려지고 에스파냐 덕분에 북미왕국의 국력이 고평가되면서 이런 중국산 물품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고 꽤 이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중국산과 북미왕국산 물품이 비슷한 최고급품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이번 새한성 개방을 계기로 북미왕국의 소식이 어느 정도 알려지면서 두 나라의 상류층에 북미왕국 붐이 불기 시작했고 그 덕에 중국산 물품보다 북미왕국산 물품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니 정성국은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예. 덕분에 더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우리 북미왕국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고요. 아. 그리고 의학자들과 의원들도 북미왕국을 찾을 거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래? 우리가 건네준 의학 서적이 인상적이었나 보군?”

“예. 특히나 그동안의 상식과 반대되는 부분이 무척 많았기에 의학 서적에 적혀 있는 내용을 가지고 말이 많았답니다.”

의학 서적에는 그동안 유럽인들의 상식과 상반된 부분이 무척 많았다.

매일같이 깨끗한 물로 씻어 청결을 유지해야 병에 걸릴 위험성이 줄어든다는 부분이나 질병을 막을 수 있는 약으로 알려졌던 담배가 실제로는 백해무익한 독약에 가깝다는 것, 전염병의 원인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균이라는 것 등등.

그러니 북미왕국이 건네준 의학 서적을 확인 후 의학자들과 유럽의 의사들은 책에 적힌 내용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지만 전기나 기차 등을 통해 북미왕국의 과학, 기술 수준이 무척 높다는 것이 알려져 있고 우리가 내어준 현미경을 통해 미생물의 존재를 확실히 파악한 후론 의학 서적에 적혀 있는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해 충격을 받은 눈치였답니다.”

다만 일부는 북미왕국에서 함께 건네준 현미경을 통해 미생물의 존재를 파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설명된 의학 서적의 내용이 일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의학자들이나 의사뿐만 아니라 왕실과 귀족들도 무척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이들의 풍습과 행동은 건강을 해치는 방식과 같았고 수많은 오물로 뒤덮인 거리는 죽음의 거리와도 같았으며 피가 묻은 옷을 입고 더러운 손으로 환자를 치료하겠답시고 환부를 매만졌던 의사들은 오히려 환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뜻과도 같았기에.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북미왕국이 건넨 의학 서적의 검증에 더욱 매달리고 있다는 이야기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북미왕국처럼 개인 목욕탕을 설치 중이라는 이야기에 정성국이 피식 웃었다.

“다행이네. 이를 계기로 유럽에도 위생 개념이 정착되면 외무청 관리를 유럽에 파견할 수 있을 테니.”

“예. 물론 단기간에는 어려울 듯싶긴 한데...그래도 지금보다야 나을 테니까요. 해서 그때를 대비해 외국어 교육에 더욱 신경 쓸 예정입니다.”

“그러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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