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화
한참 무더울 여름의 어느 날.
정성국이 집무실에서 각종 보고서를 살피고 있을 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고 조심스럽게 집무실로 들어왔다.
“어?”
보고서를 살펴보던 정성국이 고개를 들어 집무실로 들어온 김봉길을 보고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김봉길이 정성국을 보고 싱글벙글 웃고 있다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하하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허. 자네가 왜 여기 있나?”
당연히 새진주에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김봉길이 자신의 집무실에 나타나 인사하자 정성국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김봉길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휴가차 잠시 방문했습니다. 신문에서도 간간이 기차 여행에 관한 기사가 나와서인지 집사람이 기차 여행을 바라는 눈치여서요. 해서 이번 휴가에는 가족들과 함께 기차 여행을 즐기면서 새한성까지 온 거죠. 생각보다 괜찮더군요.”
그제야 무슨 일이 있어서 직접 새한성에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정성국은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래? 그럼 가족들은?”
“집사람도 그렇고 자식 녀석도 그렇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겠다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가던데요?”
“아하. 그래서 여기로 온 게로군? 시간이나 때우려고?”
“에이. 설마요. 저도 새한성에 도착하자마자 전하께 인사 올리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전하께 인사 없이 돌아가면 나중에 그 후환을 어떻게 감당할까요. 하하하.”
그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 김봉길에게 티테이블에 앉으라고 이야기한 뒤 집무실에 설치한 냉장고를 열고 그 안에서 매실차가 담긴 병을 꺼내 티테이블 위에 올려진 빈 찻잔에 시원한 매실차를 따랐다.
이를 보고 김봉길이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성국이 커피 애호가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에 당연히 커피를 줄 거로 생각했는데 유리병에 든 액체는 커피 같지는 않아 보였기에.
해서 김봉길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음? 이건 뭡니까? 커피는 아닌 것 같은데...”
정성국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찻잔에 매실차를 따르며 대답했다.
“매실차일세.”
“그렇습니까?”
조선에서는 과일청을 뜨거운 물에 타 차로 마시기도 했었기에 매실차가 생소할 것은 없었지만 정성국이 커피가 아닌 다른 차를 마신다는 것이 조금은 의외라고 생각한 김봉길이었다.
다만 김봉길은 날이 워낙 더운 만큼 바로 내린 뜨거운 커피보다는 미리 타 두어 적당히 식은 것으로 보이는 이 매실차가 더 나았기에 정성국이 마시라는 듯 손짓하자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찻잔에 입을 가져다 대고 매실차가 입안에 들어오자 김봉길은 그 시원함에 놀라면서 단숨에 찻잔 안에 있던 차가운 매실차를 모두 마셨다.
“크으.”
정성국은 단숨에 찻잔을 비워버린 김봉길을 보고 피식 웃었고 김봉길은 찻잔을 내려놓은 후 감탄했다.
“이거 정말 시원한 것이 별미군요.”
“그렇지? 커피를 차갑게 마시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그러려면 생각외로 손이 많이 가서 말이야. 향도 영 별로고. 해서 요샌 과일청을 이용해 이렇게 차가운 음료를 만들어 마시고 있지.”
정성국이 맞장구치자 김봉길은 정성국이 매실차가 든 병을 꺼낸 네모난 상자로 시선을 돌리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헌데 저건...얼음을 이용한 소형 빙고입니까?”
김봉길은 네모난 상자 안에 얼음을 이용해 온도를 낮추는 일종의 소형 빙고가 아닌가 싶어 질문하자 정성국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연구청에서 개발한 냉장고라는 물건일세.”
정성국의 집무실에 설치한 냉장고는 연구청에서 처음으로 만든 냉장고의 시제품으로 원래였다면 연구청의 여러 발명품을 전시하는 곳에 전시할 예정이었지만 최근 더위가 기승을 부린 탓에 가정용 냉장고가 개발되기 전까지 잠시 사용하기 위해 정성국이 연구청에 이야기해 가져왔다.
물론 궁에도 냉장고, 냉동고가 있긴 하지만, 집무실과는 거리가 있는 터라 시원한 물을 마시겠다고 시종에게 계속 시키는 것도 꽤 번거로웠기에.
“예? 연구청에서요?”
김봉길은 정성국의 대답에 무척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집무실 안에 설치된 작은 빙고가 꽤 신기해 보이기는 했지만 저런 것을 만들자고 연구청이 나섰다니.
이에 정성국은 냉장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고 이를 듣고 김봉길은 점차 눈이 동그래질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전기를 이용해 냉기를 만들어낸다니...이거 전기의 쓰임새가 정말 놀랍군요. 전 그저 전기로 빛을 만들어내는 것이 다라고 생각했는데...어? 혹시 저 전기를 저장할 수는 없는 겁니까?”
김봉길이 냉장고의 효용성을 알아채고 급히 정성국에게 질문을 던지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굳이 전기를 저장할 필요가 있나.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기가 있는데.”
“헉! 그렇습니까? 허면 이제 배에서도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겁니까?!”
잔뜩 기대한 표정의 김봉길을 보고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그렇게 될 걸세. 일단 발전기를 생산할 공방을 건설 중이기도 하고. 다만 배의 경우는 장기 항해가 많아 꽤 많은 양의 식량을 보관해야 하는 만큼 저 냉장고보다 더 큰 냉동 창고를 연구 중이라...그 연구가 끝나면 전선에 발전기를 설치하고 냉장고와 전등을 이용할 수 있겠지. 그 외에도 연구청에서 전기를 이용하는 여러 가지 물품을 연구 중이니 어쩌면 다른 물품들도 추가로 설치될 테고.”
정성국이 기대하는 것은 역시 냉방장치와 전화기였다.
냉방장치가 개발된다면 주로 더운 지역에서 활동하는 2함대의 병사들이 더 쾌적한 환경에서 지낼 수 있어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갈 것으로 예상했고 전화기가 개발된다면 그동안 함장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좁은 배 안을 열심히 뛰어다녔던 병사들이 전화기를 이용해 편하고 신속하게 함장의 명령을 전달할 수 있었으니 당연히 전투력이 올라갈 것으로 생각했다.
“오오! 이거 새진주로 복귀하기 전에 연구청에 한 번 들리긴 해야겠군요!”
김봉길도 전기에 관한 내용이 담긴 신문 기사를 읽고 언젠가 배에도 전등을 설치하면 여러모로 편리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 외에도 병사들에게 도움 될 만한 여러 물품이 개발 중이라는 정성국의 설명에 잔뜩 기대한 눈치였다.
이에 정성국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게. 재밌는 것들이 꽤 많을 거야.”
그 후로 1년 만에 본 김봉길과 개인적인 잡담을 좀 나누다가 그동안 보고서로 확인한 서인도제도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서인도제도 진출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서?”
“그렇습니다. 개발청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이미 토르투가 섬과 생크루아 섬에는 분함대와 섬을 지킬 병사들이 지낼 수 있는 선착장과 병영을 비롯한 각종 시설 건설이 끝났습니다.”
“그래?”
“예. 해서 2개의 분함대를 창설해 각 섬에 배치했고 섬을 지킬 병사들 역시 배치가 끝난 상황입니다. 만약을 대비해 충분한 물자를 옮겨둔 상태이고요.”
“아직 두 섬에 노예들을 정착시키지는 않았지?”
프랑스에 넘겨받은 토르투가 섬과 생크루아 섬은 기존의 원주민들은 전염병에 의해 대부분 죽고 새롭게 정착한 프랑스인들과 노예들은 다른 섬으로 이주했기에 실질적으론 무인도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북미 대륙 본토에 인구가 넘쳐나는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 캐롤라이나 지역으로 향하는 노예들을 일부 이곳에 정착시키기로 되어 있었고.
해서 정성국이 질문을 던지자 김봉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장 급한 것도 아닌데 무리하게 정착시킬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김봉길은 현재 개발청에서 두 섬에 정착할 사람들을 위한 마을을 건설하기 위해 공사 중이며 이 공사는 내년을 되어야 끝난다는 것과 그 이후에나 노예들을 두 섬에 정착시킬 예정이라는 설명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헌데 분함대의 규모가 너무 작은 것 아닌가? 물론 북미왕국의 전선들이 강력하긴 한데...”
최근 군사청장이 보고했기에 각 섬에 배치된 분함대의 규모가 지급 전선 1척과 인급 전선 2척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조금 의아했던 정성국이었다.
물론 2함대의 규모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당장은 서인도제도의 해적을 소탕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분함대의 규모를 조금 늘리는 것이 어떨까 싶었달까.
그런 정성국의 질문에 김봉길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어휴. 그 정도면 주변 해역을 경비하는 것은 충분합니다. 이미 서인도제도에 해적은 거의 없거든요.”
“음? 작년에 자네가 2함대를 이끌고 해적들을 소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그새 그 넓은 서인도제도에 득실대는 해적들을 모조리 소탕했다고?”
고작 1년 만에 그 넓은 서인도제도의 해적들을 소탕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싶은 정성국이었다.
이에 김봉길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라고 하고 싶긴 한데 저와 2함대가 모든 해적을 다 때려잡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프랑스와의 종전 조약 이후 프랑스가 소유하고 있던 토르투가 섬과 생크루아 섬이 우리 북미왕국의 소유로 넘어왔고 그동안 서인도제도로 진출하지 않았던 2함대가 종전 조약 이후 서인도제도를 드나들기 시작하자 사략선들은 사략 활동은 완전히 접었고 해적들은 하나둘 서인도제도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떠났다고?”
정성국이 황당한 듯 묻자 김봉길 역시 비슷한 심정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듣자 하니 북아프리카 쪽이나 동아프리카, 그리고 동남아시아 쪽으로 이동했다고 하더군요. 뭐 일부는 서인도제도 남동쪽으로 이동했다고 하는데...그곳은 우리가 함대를 보내 해적을 소탕하기는 좀 애매한 지역이지요.”
북미왕국의 해군은 대서양에 진출한 이후 마치 해적에게 원한이 있는 것처럼 해적 소탕에 열을 올렸고 덕분에 해적들 사이에서 북미왕국 해군의 악명은 자자했다.
덕분에 바하마 제도 인근에서 활동하는 해적들은 북미왕국 해군이 무서워 동쪽으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해적들에게 다행인 점이라면 북미왕국 해군의 활동 영역은 넓지 않았다는 점이었는데 최근 프랑스와 종전 조약을 맺으면서 서인도제도의 두 섬이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다는 사실과 그 이후로 북미왕국 해군이 서인도제도로 진출해 해적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해적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북미왕국 해군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감히 대항할 수도 없었으니 결국 북미왕국 해군을 피해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은 김봉길에게 그러한 현지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것 참...해적질은 해야겠고 우리 해군은 무서우니 다른 무역선들을 노리겠다 이거지?”
“예. 뭐 그런 것 같습니다.”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생각했다.
‘덕분에 아시아 무역은 더 위험해진 셈이니 유럽 각국은 자연스레 우리와의 무역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군. 그러니 섣불리 우리와 적대하기도 힘들 테고. 나쁘지 않네.’
원래 경제적으로 얽히기 시작하면 전쟁은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긴 했다.
전쟁을 결의하는 순간 무역은 중단되고 경제적인 타격이 심할 테니.
거기에 청나라의 경우 각종 물자가 넘쳐났기에 굳이 유럽의 물품을 수입할 이유가 없었지만, 북미왕국의 경우는 인력이 부족해 각종 원자재를 수입하고 있었고 이 원자재 가격을 꽤 후하게 쳐주어 저들의 무역 적자를 줄여주고 있는 만큼 전생처럼 막대한 무역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전쟁을 결정하지도 못할 터이고.
‘거기에 서인도제도에 득실거리던 해적들이 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한다면 아시아 무역을 중시하는 네덜란드도 그렇지만 잉글랜드도 꽤 타격을 받을 거란 말이지?’
김봉길의 보고에 따르면 해적들은 주로 아프리카 동부 해안으로 이동했는데 그렇게 되면 동남아의 향신료 무역에 집중하는 네덜란드나 인도와의 무역에 공을 들이던 잉글랜드는 아무래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서인도제도는 이제 안전하다는 소리지?”
“그렇습니다. 비교적 안전한 편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장기 휴가를 내고 새한성으로 온 거지요. 아니었다면 새진주에서 휴가를 보내야 했겠지요. 제가 또 책임감이 남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가소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책임감이 남달라서 1함대를 내팽개치고 냅다 2함대로 튀었다고?”
“하.하.하.”
정성국의 지적에 할 말이 없었던지 김봉길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리며 찻잔을 매만졌다.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면서 매실차를 다시 찻잔에 따르며 말했다.
“그럼 슬슬 새한성으로 돌아오지?”
정성국은 김봉길을 이렇게 오랫동안 2함대에 박아둘 생각은 없었다.
다만 급격히 상황이 변하면서 대서양 방면의 함대들을 급격히 키워야 했고 김봉길은 의외로 사람을 다루는 것에 능숙하기도 하고 인재를 잘 키워내는 터라 2, 4함대의 확장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무척 중요한 편이라 계속해서 2함대 사령관 자리에 둔 것이지만 이제는 2, 4함대도 적당히 커졌을뿐더러 대서양 방면의 상황도 안정되었으니 계속해서 김봉길을 2함대에 박아둘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이에 김봉길은 매실차를 쭉 들이마신 후 진지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음...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조금 더 2함대 사령관 자리를 맡고 싶습니다.”
“음? 그럴 필요가 있나? 서인도제도에 있던 해적들도 다 떠났다면서?”
“새한성을 방문한 자들에 의해 북미왕국의 정보가 유럽에 알려졌고...물론 프랑스와의 전쟁 당시 우리 북미왕국 해군이 강력하다는 사실이 알려졌기에 섣불리 덤비지는 못할 것으로 예상합니다만 만약을 대비할 필요는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의 학교 문제도 있고 말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1함대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면야 당연히 김봉길을 불러들였겠지만, 김봉길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1함대를 이끄는 부사령관도 1함대를 잘 이끌고 있을뿐더러 정성국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에 당분간은 김봉길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그런가? 뭐 대서양 방면의 2, 4함대는 계속해서 규모를 키울 생각이었으니...그게 나을 수도 있겠군. 알겠네. 그럼 그렇게 하게.”
“감사합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