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에스파냐 외교관은 새나주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베라크루즈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수많은 짐을 마차에 싣고 멕시코시티로 쉬지 않고 이동했다.
그렇게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에스파냐 외교관은 곧바로 안토니오 부왕을 알현했고.
안토니오 부왕은 북미왕국의 정보에 무척 관심이 많았기에 에스파냐 외교관이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여러 질문을 던져댔다.
기차가 정말 빠르냐는 둥, 북미왕국 내륙은 어떠냐는 둥, 여러 질문에 적당히 대답한 에스파냐 외교관은 배 안에서 정리한 두툼한 보고서를 안토니오 부왕에게 바쳤고 더 많은 북미왕국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 하던 안토니오 부왕은 아쉬운 표정으로 보고서를 대충 훑어보다 무언가 이상한 내용을 확인하고 자세를 바로 하며 보고서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에스파냐 외교관을 바라보았고.
“이게 정말이라고?”
“그렇습니다. 부왕 전하.”
“허.”
보고서에는 이번 방문을 통해 새롭게 파악한 북미왕국의 정보가 적혀 있었는데 가장 맨 앞쪽에는 북미왕국의 역사와 건국 시기 등이 쓰여 있었고 이를 확인한 안토니오 부왕은 그동안의 예상과는 너무 다른 내용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보고서만 바라보았고.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반응에 함께 동석했던 보좌관이 에스파냐 외교관에게 무슨 내용의 보고서냐고 슬쩍 물었고 에스파냐 외교관은 이번에 새한성에서 파악한 내용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리고 보좌관은 당연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개척을 시작 한지 고작 15년밖에 되지 않았다고요?”
“책에도 그렇게 나와 있고...북미왕국 백성들에게 직접 물어본 것도 책에 적혀 있는 것과 비슷하더군요.”
“그런...”
에스파냐 외교관의 대답에도 보좌관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주로 개인이 개척을 시작한 북미 동해안 지역의 성장을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의 성장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갈 정도였으니.
그러다 문득 보좌관이 에스파냐 외교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북미왕국에선 뭐라던가요.”
“무엇을 말입니까?”
“이 사실을 파악하고 왜 그동안 이런 사실을 숨겼는지 정도는 물어보셨을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보고서만 바라보던 안토니오 부왕이 슬쩍 고개를 들어 에스파냐 외교관을 바라보았고.
이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예? 왜요?”
이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럼 뭐라고 물어야 합니까. 왜 우리에게 자국의 사정을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지 않았느냐고 물어야 합니까.”
“으음...”
원래 외교가에선 자국이 불리한 일은 얼버무리거나 감추고 유리한 일은 드러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러니 이를 두고 따지기도 애매했다.
물론 에스파냐의 국력이 북미왕국보다 월등히 강하다면 다른 문제였지만 현실은 북미왕국이 더 강력했으니.
해서 보좌관은 에스파냐 외교관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래도 조금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이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약간 쏘아붙이든 빠르게 말했다.
“그리고 저들은 맨땅에서 6년 만에 멕시코 서해안을 불태울 정도의 함대를 만들어냈고 계속해서 영역을 확장해 지금은 북미 대륙에 있던 유럽 세력을 모두 몰아내 드넓은 북미 대륙의 지배권을 확고히 한 북미왕국입니다. 그리고 15년 만에 이렇게 발전했으며 앞으로는 얼마나 발전할지 예상조차 안 되는 북미왕국이에요. 그런 북미왕국에 친선을 위해 방문한 제가 왜 이러한 사실을 숨겼느냐,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냐, 너희들이 이주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북미 대륙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란 뜻입니까?”
“아...그건 아닙니다만...”
그때 안토니오 부왕이 입을 열었다.
“잘 판단했네. 당시 북미왕국과 바로 종전 조약을 맺은 것은 태평양 방면의 봉쇄가 길어지면 천문학적인 손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지. 그리고 북미 대륙의 권리를 포기한 것은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고. 그러니 당시에 북미왕국이 건국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내 판단이 바뀌지는 않았을 걸세. 당시엔 아시아 무역이 무척 중요했으니까.”
안토니오 부왕의 대답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솔직히 처음 이 사실을 알고 무척 당황하긴 했습니다만...조금 진정되고 나니 이미 지나간 일을 왈가왈부하며 저들과의 우호 관계를 해치기보다는 그냥 넘어가는 것이 바르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나라의 사절들도 일단 침묵했고요.”
“다만 본국에선 한소리 하기는 하겠군. 9년 가까이 교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면서 안토니오 부왕이 한숨을 내쉬자 에스파냐 외교관은 결국 자신도 책임이 있었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북미왕국은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기에 정보 수집이 원활하지 못한 측면은 있었지만 그래도 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북미왕국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분명 외교관들의 실책이었으니.
하지만 안토니오 부왕은 이 책임을 다른 외교관들에게 전가할 생각은 없는지 이 부분은 자신이 알아서 본국에 보고서를 올릴 테니 더는 언급하지 말라고 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이번에 북미왕국의 국왕을 직접 만나 보았지. 어떤 인물이라고 판단하나?”
이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잠시 정성국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입을 열었다.
“여러모로 무척 뛰어난 인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에스파냐 외교관의 높은 평가에 안토니오 부왕이 흥미를 보였다.
“그래?”
“예. 몇 번 만나 대화를 나눌 기회도 있었는데 무척 똑똑하고 유럽의 정세에도 훤하더군요. 다만 젊은 편이라 혈기왕성한 것을 조금 경계했는데 오히려 생각이 깊고 자비로운 면모가 보였습니다.”
에스파냐 외교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던 안토니오 부왕은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젊다고? 15년 전에 북미 대륙으로 이주해 세력을 모아 나라를 건국한 것을 보면 나이가 좀 있는 것 아닌가?”
“외형만 보면 잘해야 20대 초반으로 보였습니다.”
“뭐?!”
안토니오 부왕이 놀라자 에스파냐 외교관은 북미왕국인들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기도 한다는 것과 북미왕국인들은 자신들의 국왕을 무척 존경하는 터라 국왕의 개인 신상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는 설명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허. 그래도 예상보다 젊다는 것은 조금 놀랍군. 가끔 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노련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말이야. 헌데 그런 북미왕국의 국왕이 젊다면...이거 북미왕국의 발전은 당분간 계속되겠군.”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새한성을 방문해보니 저들의 국력은 우리의 예상보다 더 대단한 편이었기에...”
안토니오 부왕은 에스파냐 외교관의 눈빛에 감탄이 서려 있는 것을 파악하고 탄식했다.
“허. 그 정도인가.”
“그렇습니다.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시면 저들의 국력에 무척 놀라실 겁니다.”
“으음...알겠네. 그럼 먼 길을 다녀오느라 고생했을 테니 잠시 휴식을 취하게. 이 보고서를 자세히 읽어본 후에 다시 부르지.”
* * *
러시아인들이 수송선을 습격한 이후 투로시노는 정일신과 상의하에 3함대의 호위보다는 아이누 경비대를 추가로 태우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아이누 경비대의 대장인 박경수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박경수는 흔쾌히 응했고.
그렇게 습격 이후로 식량을 수송하는 수송선에는 더 많은 아이누 경비대가 탑승했지만, 러시아 차르국은 조용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알바진의 병사들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고 수송선을 습격하기 위해 나섰던 알렉세이와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당연히 니키포르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알렉세이는 당연히 습격에 성공하거나, 혹은 실패하더라도 충분히 몸을 뺄 수 있을 거라 여겼기에 만약을 대비한 연락병을 따로 두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상황에서 연락이 끊겨 상황을 알아보라고 보낸 병사가 알렉세이와 병사들이 타고 간 말과 짐만 남아있었다는 보고를 하자 니키포르는 청나라가 수송선을 미끼로 자신들을 끌어낸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물론 그 탐욕스러운 청나라인들이 주변을 탐색해 말과 짐을 회수하지 않은 것이 조금 의외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니키포르는 몸을 사리며 알바진의 방어에만 관심을 두었으니 북미왕국의 수송선은 이전처럼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편하게 식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청나라 진형에 식량을 운반했던 수송선이 돌아와 식량을 모두 수송했다고 보고하자 투로시노는 3함대의 함선을 타고 북경으로 이동했다.
청나라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투로시노는 강희제를 만나는 것은 어려울 거라 여겼지만 의외로 투로시노가 도착하자마자 예부의 관리는 투로시노를 자금성으로 안내했고 이전처럼 후원에서 강희제를 만날 수 있었다.
이에 투로시노는 익숙하게 강희제에게 예를 취했고.
“오랜만이군. 그래. 식량 수송을 끝냈다고?”
“그렇습니다.”
“도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지?”
북미왕국에선 러시아 차르국의 공격을 무척 축소해 가벼운 습격 정도로 보고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실이 강희제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투로시노는 내심 놀라면서도 별일 아닌 것처럼 대답했다.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 일부가 습격했습니다만 그 규모가 크지 않아 수월하게 내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강희제는 투로시노의 반응에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아라사가 북미왕국의 수송선을 공격한 것은 청나라에 있어 호재였다.
이 일을 빌미로 북미왕국이 아라사와 적대한다면 나쁠 것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북미왕국에서는 습격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인지 별일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고 이를 문제 삼아 아라사와 적대할 것 같지도 않아 보였다.
해서 강희제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하지만 강희제는 이를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아무튼, 북미왕국에서 약속대로 3년간 식량 30만 석을 북방에 보급해주었으니 이제부터 고혈도는 북미왕국의 땅이라는 것을 정식으로 인정하겠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청나라가 인정하든 말든 애당초 아이누 섬은 북미왕국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투로시노였지만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흡족해하며 예법에 따라 인사했고 강희제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성은은 무슨. 거래를 이행했을 뿐이네. 헌데...추가로 거래를 할 생각은 없나?”
“예?”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투로시노가 조금 당황했을 때 강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도 지금 청나라 남쪽이 꽤 시끄럽다는 것을 잘 알 걸세.”
“설마...”
투로시노가 무척 놀란 표정이자 강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 걱정하지 말게. 아무리 남쪽의 반란군이 기세등등하다 한들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타국의 군대를 끌어들일 생각은 없으니까.”
이에 투로시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강희제는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만 남쪽이 시끄럽다 보니...아무래도 북쪽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기는 어렵단 말이지.”
그 말에 투로시노는 강희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닫고 말했다.
“으음...허면 지금처럼 식량을 지원하라는 뜻이로군요.”
“그렇네. 더불어 자네들은 교역을 위해 이곳을 방문하니 무기를 비롯한 물자 일부도 수송해주었으면 하고.”
이에 투로시노는 조금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물론 북미왕국은 식량이 넘쳐나긴 했지만, 이 식량을 아이누 섬으로 수송하고, 또 아이누 섬에서 수송선을 이용해 청나라 북방으로 수송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비용이 들었다.
거기에 러시아 차르국이 습격을 한 이상 수송선의 안전을 위해 아이누 경비대까지 상당수 태워야 했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비용은 더욱 올라갈 수밖에 없었고.
다만 강희제가 거래라고 표현한 만큼 조건을 들어보는 것은 나쁠 것이 없겠다 싶어 질문했다.
“거래라고 하셨지요. 허면 대가는 무엇입니까?”
이에 강희제는 조금 묘한 표정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생사 교역량을 지금보다 대폭 늘려주지. 어떤가.”
물론 강희제도 생사를 수출하면 중간에서 북미왕국이 차익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육로를 이용해 식량을 수송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나 북미왕국에서 북방으로 식량을 계속해서 수송한 이후 식량에 여유가 생겨 이를 이용해 주변 부족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었으니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해 제안했고.
그리고 강희제의 예상대로 투로시노는 곧바로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강희제는 실소하며 말했다.
“그럼 예부의 관리들에게 이야기해둘 테니 자세한 사항은 그들과 논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