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정성국은 슬슬 더워지는 날씨에 연구청에 이야기해서 선풍기라도 만들어보라고 할까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에 정성국은 잡생각을 멈추고 조용한 곰을 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다녀왔나? 유럽 사절단들은 모두 떠났고?”
“그렇습니다. 왕실 전용 기차에 탑승해 떠나는 것을 배웅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동안 새한성을 살피며 북미왕국을 파악하던 유럽 각국의 사절단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오늘 아침 기차를 타고 다시 새진주로 떠났다.
별다른 짐 없이 단출하게 새한성을 방문했을 때와는 다르게 북미왕국에서 내어준 선물들과 사절 개개인이 새한성을 돌아다니며 여러 상점에서 사들인 북미왕국의 물품들, 그리고 사절단 차원에서 사들인 수많은 책과 함께.
너무 많은 짐 때문에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할 것을 우려해 외무청에서는 왕실 전용 기차에 짐칸을 추가해야 할 정도였고 이 때문에 배웅이 좀 늦어졌다는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피식 웃었다.
“그런가. 헌데 자네에게도 별말은 없었지?”
정성국은 사절단의 대표들과 차를 마시며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공식적으로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 사절단의 대표들은 깨끗하고 발전된 새한성의 모습에 감탄하거나 북미왕국의 기술 수준에 놀라며 더 많은 공방을 구경하고 싶다고 요청했을 뿐이지 정성국이나 외무청에서 걱정했던 북미왕국의 건국과 관련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기에 정성국이 혹시나 해서 묻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이에 정성국은 잠시 턱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설마 우리 북미왕국이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국이라는 사실과 북미왕국 백성 일부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그럴 리야 있겠습니까. 최소한 에스파냐와 잉글랜드는 파악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
묘하게 확신에 찬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를 설명했다.
“에스파냐와 잉글랜드의 사절들은 새한성 내의 서점을 돌아다니며 여러 서적을 사들였고 그중에 역사 교과서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니까요.”
그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럼 확실히 안다는 소린데...아무 말도 없었다? 역시 이를 거론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
그동안 북미왕국은 은연중에 원주민들의 국가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었기에 자신이 조선인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 무언가 반응이 있으리라 보았는데 의외로 저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들은 괜히 이 이야기를 꺼냈다가 자신의 기분이 상할까 우려해 언급하지 않은 걸까 싶었고 그런 정성국의 의견에 조용한 곰도 동의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후 우리 북미왕국의 국력을, 정확히는 군사력을 높이 평가하긴 했습니다만 이번에 저들이 새한성에 방문해 여러 곳을 둘러본 후로는 북미왕국의 국력이 자신들의 예상보다도 대단한 것에 무척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뻔히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북미왕국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전하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데 섣불리 전하의 출신을 언급하기보다는 침묵을 택하는 것이 여러모로 안전한 선택이지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기대하는 눈치로 말했다.
“흐음...사절단의 반응이 그렇다면 유럽 각국의 반응도 비슷하려나?”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뭐 외교 관계를 맺었다고 무조건 자국의 기원이냐 역사, 시시콜콜한 국내 사정까지 다 알려야 한다는 법은 없잖습니까. 그러니 무어라 따지기도 애매하지요. 뭐 이를 왜 숨겼냐고 섭섭하다든가 하는 투정이 섞인 말 정도야 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조용한 곰과 외무청도 북미왕국의 국력과 정성국의 판단을 믿긴 했지만, 새한성을 개방하는 것은 내심 부담스러워 했었다.
하지만 막상 새한성을 방문한 유럽 각국 사절단의 반응을 보니 북미왕국의 국력에 놀란 것을 넘어 기가 질린 듯했기에 저들을 안내하며 저들의 반응을 유심히 살핀 외무청에서는 이 정도라면 저들이 이를 빌미로 북미왕국을 적대하며 북미 대륙을 다시 탐내기보다는 지금처럼 북미왕국과 우호적으로 지내며 교역을 통해 이득을 취하리라 예상했다.
“그 정도로 끝난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긴장을 늦추지는 말고 저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게. 저들이 각종 서적을 사들였다면 결국 우리의 약점을 파악했을 테니.”
“약점이라면?”
“우리 북미왕국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영역은 해안가 근처라는 것, 그래서 저들의 예상보다 인구가 적다는 것 말일세.”
물론 북미왕국의 인구도 무척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조선에서 꾸준히 유민들이 이주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북미왕국의 영역이 확장하며 여러 원주민 부족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고 있었다.
거기에 정성국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한 후 백성들을 가르치며 위생 관념을 철저히 심어주었고 개발청에서는 북미왕국 전역에 상하수도 시설과 목욕탕, 하수처리시설을 건설하는 것을 우선했기에 위생 수준이 점차 나아지면서 사망률이 줄고, 특히 영유아와 아이의 사망률이 무척 줄어들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덕분에 최근 북미왕국의 인구는 300만을 넘어 400만에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다만 북미왕국의 영역을 생각해보면 그래도 인구는 적은 편이고 정성국이 북미왕국의 인구수를 기밀로 지정했기에 저들이 사들인 책에 북미왕국의 인구가 적혀 있지는 않겠지만 저들이 생각한 내륙의 광활한 북미왕국의 영역과는 차이가 있는 만큼 자신들의 예상보다 인구가 적다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하리라고 보았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유럽 각국이 북미왕국의 부와 북미 대륙의 광활한 땅을 노리고 연합해 덤벼들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긴 했다.
정성국은 예전 유럽이 이익을 위해 비록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대국이라 여겼던 청나라를 공격해 결국 맛있게 뜯어먹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를 모르는 조용한 곰은 그럴리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렇다고 해도 전하께서 새한성을 개방하기로 하셨을 때 말씀하신 것처럼 2, 4함대의 존재와 북미 동해안 지역에 배치된 병력을 생각해보면 저들이 다시 북미 대륙을 탐내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저들은 회전 단총의 존재에 무척 충격을 받은 눈치였으니까요.”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만약을 위해 기관총도 개발해두긴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전하. 네덜란드 사절단의 대표에게 무슨 제안을 하셨습니까?”
“왜?”
“왕실 전용 기차에 오르기 전에 저에게 다가와 그러더군요. 자신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그러한 제안을 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고. 그리고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전하의 호의를 깊게 간직하겠다고 말입니다.”
정성국은 그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어지간하면 북미왕국으로 왔으면 좋겠는데...”
정성국의 말에 더욱 어리둥절한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은 네덜란드의 사정과 라위터르를 둘러싼 상황을 대략적이나마 설명해 주었고 이를 듣고 조용한 곰은 그의 딱한 처지에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허. 왜 사절단의 대표로 해군 제독이 왔나 했더니...헌데 그를 데려와도 딱히 쓸 데가 없지 않습니까? 충성심이 검증되지도 않았는데 함대 사령관 자리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경험이 풍부한 노제독이니만큼...좋은 함장들을 키워내지 않을까?”
“아. 군사대학의 교수 자리라면 괜찮겠군요.”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이며 라위터르의 일을 웅크린 늑대나 뉴펀들랜드 섬의 외무청 관리에게 알려 만약 그가 북미왕국 행을 택한다면 바로 도움을 줄 수 있게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고 정성국은 그러라고 했다.
그 외에도 유럽 사절단과 관련된 자잘한 보고를 하던 조용한 곰은 조선 사절단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조선 사절단의 정사가 새한성 대학교에 더 많은 조선 의원들을 보내고 싶다고 요청했습니다만...어쩔까요?”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두법이 인상 깊기는 했나 보군? 그동안은 별다른 이야기가 없더니.”
북미왕국에서는 당장 의원의 수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조선이 요청하면 꾸준히 유학생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특히 새한성 대학교에서 북미왕국의 의학을 공부하던 어의가 조선 의학과 북미왕국 의학의 차이점에 관심을 보이며 조선에 북미왕국의 의학도 배울 가치가 있다고 보고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하지만 조선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 우두법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북미왕국의 의학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의원들을 보내고 싶다고 요청하니 정성국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도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흠...아직 각 지역에 배치할 의원들도 부족한 상태이긴 하지만...”
“교육청장에게 물어보니 대여섯 명 정도는 추가로 받아들여도 크게 지장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더군요.”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받아들이게.”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조용한 곰이 정성국에게 인사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 하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을 불러세웠다.
“아. 잠깐만. 혹시 조선 사절단의 정사가 다른 말을 하지는 않던가?”
“예?”
의아한 표정을 짓는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이 말했다.
“청나라의 사정이 썩 좋지 않으니 조선 내에서도 이런저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말이네.”
북벌을 꿈꿨던 윤휴는 정성국과 교류하면서 현실을 파악하고 결국 북벌을 포기했다.
그리고 작년에 주고받았던 윤휴와의 편지에서도 윤휴는 청나라에 반란이 일어났고 당장 청나라의 사정이 무척 좋지 않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북미왕국에 사절단을 보내며 북미왕국의 학문을 연구하고 북미왕국처럼 조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늘어나는 시점에서 전쟁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쓰여있기도 했었고.
하지만 윤휴가 북벌을 포기했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북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전생에서는 1673년 삼번의 난이 시작된 이후 1674년 여름쯤에는 지방의 유생들도 청나라에서 전란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이 기회에 삼전도의 치욕을 씻자며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효종의 죽음 이후 북벌을 포기한 서인들과는 달리 남인 일부는 이 북벌론을 계승해 북벌을 주장하기도 했었으니까.
특히나 정성국이 걱정하는 것은 전생에서는 이 삼번의 난이 경신 대기근 직후에 일어났기에 북벌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이들의 주장에 나라의 형편이 어려운데 무슨 북벌이냐며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북미왕국 덕분에 경신 대기근을 별다른 피해 없이 넘겼고 당시 원상이 보급한 감자 덕분에 조선의 식량 사정은 나아졌기에 전생과 비교하면 현재 조선의 상황은 무척 좋은 편이었다.
거기에 원상의 보고서에서도 한양에서 북벌에 관한 이야기가 조금씩 들린다고 하니 정성국은 행여나 조선이 잘못된 선택을 내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고 만약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심각하게 북벌을 고민한다면 당연히 북미왕국에도 무언가 요청을 하거나 만약을 위해 이야기를 했을 거라는 생각에 묻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아. 그렇습니다. 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재작년 청나라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 알려지고 작년부터 반란군의 기세가 대단하다는 소식에 조선 내의 일부 인사들이 이 기회에 북벌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긴 한 모양입니다만...조정 관료 대다수는 북벌보다는 당장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양입니다.”
“호오...그래? 그거 다행이군.”
정성국은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당장 조선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조용한 곰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의아한 듯 질문을 던졌다.
“음? 전하께선 청나라가 반란군을 진압하리라고 여기시는군요?”
“앞날은 모르는 거라지만 반란군끼리 연계하지 않고 따로 행동하는 것도 그렇고 제대로 된 명분도 없는 만큼 한계가 있을 것 같긴 하네.”
오삼계가 내건 명분은 대명의 부흥과 복수인데 마지막 명나라 황제를 죽이고 대명을 멸망시킨 자가 바로 오삼계였다.
그러니 청에 항복한 명의 항장들과 유신들은 오삼계의 명분에 콧방귀를 뀔 뿐 오삼계의 생각처럼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협조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별다른 지지를 보내지 않았고.
조용한 곰 역시 오삼계가 내건 명분에 실소하며 대명에 집착하기보단 반청과 한족만의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주장하는 편이 한족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데 더 적합한 명분이라고 생각했었기에 정성국의 판단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요.”
“아무튼, 알겠네. 조선의 고위 관료들이 그러한 분위기라면 딱히 걱정할 것은 없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