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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79화 (379/850)

379화

슬슬 일정이 끝나갈 무렵 잉글랜드 외교관은 보좌관에게 최근 에스파냐 사절단의 동향을 보고받고 아차 싶었다.

최근 일정에 참석하는 에스파냐 사절단의 규모가 줄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알아보라고 했는데 에스파냐 사절단의 일부는 새한성 곳곳의 서점을 돌아다니며 북미왕국의 책을 사들이고 있다니 그 목적을 짐작한 것이다.

물론 북미왕국이 기술 보안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기에 과연 건질 만한 서적이 있을까 싶긴 했지만, 에스파냐 사절단이 저렇게 움직이는 만큼 자신들도 북미왕국의 서적을 최대한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잉글랜드 외교관은 보좌관에게 명령을 내렸고.

며칠 후 보좌관이 놀란 표정으로 잉글랜드 외교관에게 하나의 책을 건넸고 이 책의 내용을 확인한 잉글랜드 외교관은 사색이 되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에스파냐 외교관을 찾았다.

얀센과 대화하며 창문 밖의 야경 풍경을 즐기던 에스파냐 외교관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잉글랜드 외교관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다 그가 자신에게 내민 책을 확인하고 상황을 파악하고 피식 웃었다.

잉글랜드 외교관은 그런 에스파냐 외교관의 반응에 눈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읽어보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허면 귀국은 진작에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습니까?”

“그럴 리 있겠습니까. 우리도 새한성을 방문한 후 그 책을 보고 알게 된 사실입니다.”

잉글랜드 외교관은 처음으로 북미왕국과 접촉한 에스파냐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신생국에 패한 것을 숨기기 위해 사실을 왜곡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에스파냐 외교관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해서 조금은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의자에 앉아 탄식했고.

“허. 이것 참...”

그런 잉글랜드 외교관의 반응에 얀센은 의아한 듯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질문을 던졌다.

“그게 대체 무슨 책인데 그러십니까?”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저 책이 북미왕국의 역사가 적혀 있는 책이라는 것과 1660년 조선인이 이곳에 도착해 원주민들을 규합해 세력을 키우고 1664년 북미왕국을 세웠다는 설명에 얀센이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그게 정말입니까? 조선인이 15년 전에 이곳을 방문해 원주민과 세운 나라가 바로 북미왕국이라고요?”

“그렇다는군요.”

에스파냐 외교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던 얀센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그럼 이곳 원주민들은 조선인이 오기 전에도 엄청난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겠죠?”

이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고개를 저었다.

“저 북미 동해안 지역의 원주민과 비슷한 수준이었다는군요.”

네덜란드 역시 북미 동해안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한 적이 있었기에 원주민들의 문명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했다.

그렇기에 짧은 기간에 급격히 발전해 이런 국력을 자랑하는 북미왕국을 보고 순수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허. 놀랍군요. 북미 동해안 지역의 원주민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철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뜻인데...고작 15년 만에 땅 위에 철길을 깔았단 뜻이잖습니까? 거기에 프랑스 해군을 박살 낼 정도로 강력한 함대도 보유했고요. 이거 정말 놀랍군요.”

“예. 놀랍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하며...솔직히 두렵기도 하지요. 맨땅에서 시작해 15년 만에 이러한 발전을 이룩했다는 뜻이니까요.”

이것이 에스파냐 외교관이 북미왕국의 정보를 파악하고 난 후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미 북미왕국의 국력은 에스파냐가 감당하기 어려운데 이를 시시콜콜 따져서 뭐하겠는가 하는 생각이랄까.

그리고 아카풀코 조약으로 북미 대륙의 모든 권리를 포기했던 것도 북미왕국이 원주민 국가라서 이들의 권리를 인정해 포기했다기보다는 당시 북미왕국의 함대를 감당할 수 없기에 손해를 줄이고자 포기한 만큼 당시에 북미왕국이 건국된 지 얼마 안 된 신생 국가라는 것을 알았어도 선택이 바뀌지는 않았을 테고 말이다.

“그렇긴 하군요. 15년 만에 유럽의 강국이라는 프랑스와도 맞먹을 정도가 되었는데...여기서 15년 후면 얼마나 더 강대해질지 참으로 두렵긴 하군요.”

“으음...”

‘생각해보니 북미왕국이 언제 건국되었든, 북미왕국의 건국에 조선인이 개입되었든, 그게 중요한 사실은 아니군. 애당초 우리는 북미왕국이 원주민들이라고 여겼기에 식민지를 판 것이 아니라 이들의 군사력이 부담스러웠고 충돌한다면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기에 적당히 대가를 받고 넘긴 것이니까. 그리고 북미왕국의 국력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여기며 확전을 택한 프랑스의 꼴을 보면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이 오히려 이득에 가까워.’

처음 책을 통해 북미왕국이 신생국에 가깝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만약 이 사실을 알았다면 북미 동해안의 식민지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흥분해 자리를 박차고 나왔었던 잉글랜드 외교관은 에스파냐 외교관과 얀센의 대화를 듣고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만약 북미왕국이 건국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런던에서도 쉽사리 북미왕국에 식민지를 넘기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고 그렇게 되면 잉글랜드는 분명 북미왕국과 충돌했을 것이다.

그러면 잉글랜드도 프랑스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테고.

이는 버지니아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북미왕국의 용기병들이 빠르게 이동해 간단히 잠재웠던 것만 봐도 확실했기에 잉글랜드 외교관은 속으로 생각했다.

‘에스파냐 외교관이 왜 조용한가 했더니만. 결국, 나도 입 다물고 있어야겠군. 일단 런던에 보고하고 무언가 명령이 내려오길 기다리는 것이 맞겠어.’

* * *

다음날 무언가를 잔뜩 들고 온 일꾼들을 대동한 조용한 곰이 유럽 사절단이 머무는 숙소에 방문했고 숙소에 내려놓는 상자를 바라보던 잉글랜드 외교관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별다른 일정이 없는데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그리고 저 물건들은...”

“사진기입니다.”

조용한 곰이 웃으며 손짓하자 일꾼 한 명이 상자를 열고 안에 있는 사진기를 꺼냈다.

커다란 삼각대와 그 위에 커다란 상자 모습의 사진기를 보고 잉글랜드 외교관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게 그 사진을 찍는 사진기입니까? 생각보다 크군요.”

“예. 사진기의 크기에 따라 사진의 크기가 결정되다 보니 사진기 자체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궁에서 보았던 사진들도 저 사진기로 찍은 겁니까?”

“그렇습니다.”

조용한 곰이 사절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일꾼들은 계속해서 움직이며 상자들을 숙소에 가져다 두었고 그 모습에 얀센이 조금 당황해 중얼거렸다.

“어? 좀...많군요?”

이에 조용한 곰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전하께서 그러시더군요. 선물로 넘겨주는 건데 하나만 주었다가는 제대로 이용하지도 못하고 본국으로 흘러가 분해되지 않겠느냐고. 해서 5개씩 준비했습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사절들은 조금 당황했다.

정성국이 사진기를 선물로 주겠다는 이야기를 하자 당연히 하나만 줄 것으로 생각해 이를 본국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하하. 이것 참...관대하신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잉글랜드 외교관이 애써 웃으며 대답하자 조용한 곰은 피식 웃으며 상자 안에 들어있는 책을 꺼내 흔들면서 말했다.

“이건 사진기의 사용법이 적혀 있는 작은 책자입니다. 그림까지 넣어 자세히 설명해 두었으니 이것만 확인해도 사진기를 이용하는 데는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용한 곰은 라위터르와 얀센을 보고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아. 죄송하지만 이건 한글로 쓰여 있어서...”

“괜찮습니다. 기차 안에서 한글을 읽으실 줄 아시는 분께 설명을 들으면 되니까요.”

얀센의 대답에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이고 검은색 칠이 되어 있는 상자의 뚜껑을 열며 설명했다.

“그리고 이 검은 상자들은 사진기에 넣는 판입니다. 이 판에 상이 맺혀 사진이 되는 거지요. 그렇기에 나름 넉넉히 넣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헌데 저 판에 상이 맺혀 사진이 된다면...소모품이군요?”

잉글랜드 외교관의 질문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건 가격이 좀 나가는 터라...다 소모한 후에는 구매하셔야 할 겁니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드릴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용한 곰은 작은 상자에서 책을 꺼내 가까이 있던 잉글랜드 외교관에게 건넸다.

“이건?”

“북미왕국의 의학 서적입니다. 듣자니 유럽에서는 아직도 천연두로 고생하는 자들이 많다지요?”

“그렇습니다만...어? 설마 북미왕국에선 천연두의 치료법을?”

잉글랜드 외교관은 책장을 넘기며 대답하다 놀란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고 이는 다른 사절들도 비슷했다.

“음...치료법이라기보단 예방법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지요.”

“예방법이요?”

“예. 아직 북미왕국의 의학 수준이 천연두에 걸린 환자를 치료할 수준까지는 되지 못합니다만...천연두의 성질을 파악해 예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 책에 쓰여 있는 대로만 한다면 천연두에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헉! 그게 정말입니까?”

천연두가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전염병인지 잘 아는 사절들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지만 조용한 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덕분에 우리 북미왕국에서 천연두로 죽은 사람은 없지요. 아. 그리고 조선 사절단과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조선 역시 그 책을 받고 연구한 끝에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백성들에게 우두를 접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요.”

물론 북미왕국의 말을 맹신할 수는 없긴 했지만, 빛을 고정하는 눈앞의 사진기라던가, 전기마저 다루는 북미왕국의 기술력을 생각해보면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허...”

“그게 사실이라면 이 책의 가치는 정말 대단할 텐데...이렇게 내어주셔도 되는 겁니까?”

잉글랜드 외교관이 들고 있던 책을 조심스럽게 다루며 질문을 던지자 다른 사절들도 조금은 의아하다는 듯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이에 조용한 곰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물론 그 책의 가치는 귀하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할 겁니다. 단순히 천연두뿐만 아니라 그동안 북미왕국의 의원들과 연구원들이 합심해 연구한 모든 내용을 정리한 책이니까요. 그렇기에 이를 이용해 무언가 이득을 취할 수도 있긴 하지요. 하지만 전하께선 의학 지식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지식인 만큼 독점할 생각은 없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오오.”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하셨지요. 내가 보기엔 북미왕국의 의학 수준은 아직 보잘것없고 정복해야 할 질병들은 산더미처럼 많은데 의학 지식을 숨긴다면 다른 나라의 의사나 학자들은 이미 치료 가능한 질병을 고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수 있고 이는 의학 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의학 지식을 공유한다면 의학 발전이 앞당겨지고 더 많은 질병을 정복해 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이렇게 내어드리는 겁니다.”

조용한 곰의 말이 끝나자 라위터르가 꽤 감명 깊다는 눈치로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 국왕 전하께서는 참으로 자애롭고 또 현명하신 분이로군요.”

이에 정신을 차린 잉글랜드 외교관이 급히 덧붙였다.

“북미왕국 국왕 전하의 높을 뜻을 본국에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사절들도 다 비슷한 반응이었기에 조용한 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다시 몸을 돌려 의학 서적을 꺼낸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래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현미경이라는 겁니다.”

“현미경?”

현미경의 최초 개발자에 관해선 이견이 있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현미경을 개발하고 미생물을 처음으로 관찰한 인물은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다.

그는 지금 시대의 인물로 그가 개발한 현미경이 네덜란드에서 천천히 알려지긴 했지만, 사절들은 이를 알지는 못했기에 고개를 갸웃하자 조용한 곰이 설명했다.

“먼 곳에 있는 물체를 볼 수 있게 도와주는 망원경과는 달리 아주 작은 물체를 크게 확대해 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이 현미경입니다.”

“그렇습니까?”

신기한 물건이긴 한데 이걸 왜 주느냐는 눈치였기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덧붙였다.

“이 현미경의 개발로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존재와 이 미생물 중 일부가 전염병을 옮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북미왕국의 의학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해서 함께 드리는 겁니다.”

조선에서 천연두가 발생했고 우두법의 효과를 확인한 조선에서는 대대적으로 우두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신임 예판은 이번에 정성국을 만나는 자리에서 다시 한번 조선의 백성을 도와준 것에 감사의 뜻을 표했고.

그러다 정성국은 의학 서적을 전해준 지도 꽤 시일이 흘렀는데 최근에야 우두법을 시행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조선의 내의원들이 북미왕국이 전해 준 의학 서적의 이론을 이해하지 못해 미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의학 서적과 현미경을 함께 넘겨주었다면 북미왕국의 이론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진즉에 파악했을 거란 생각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고.

해서 유럽 사절단에게 의학 서적을 넘겨줄 때 현미경도 함께 넘겨주라고 지시한 것이다.

더불어 조선 사절단에게도 현미경을 넘겨주라고 지시했고.

“헉!”

그제야 현미경의 가치를 파악한 사절들은 무척 조심스럽게 조용한 곰에게서 현미경을 받아들고 살펴보다가 말했다.

“이런 귀한 물건을...참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덕담을 던졌다.

“아닙니다. 북미왕국의 의학 발전은 이 현미경으로 시작된 만큼 유럽의 의학 수준도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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