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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78화 (378/850)

378화

만찬이 끝난 후 숙소로 돌아온 에스파냐 외교관은 보좌관을 갈궈댔고 보좌관은 날이 밝자마자 곧바로 서점에서 역사 교과서를 사서 에스파냐 외교관에게 건넸다.

책을 받아든 에스파냐 외교관은 재빠르게 책을 훑어보다 어느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나와 있군. 북미왕국 국왕이 처음으로 북미 대륙에 도착해 원주민과 만났던 때가 1660년. 하. 고작 15년 전? 이게 말이 되나?”

엄밀히 따지면 이 교과서에 적힌 내용은 사실이 아닌 적당히 각색을 거친 내용이었다.

역사 교과서인 만큼 사실만을 적고 싶었지만, 조선과 교류하게 된 이상 북미왕국 백성들을 가르치는 내용이 조선에도 흘러 들어갈 것이 뻔했는데 사실대로 원상이 처음부터 이 일에 가담했다는 것을 언급할 수야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해서 역사 교과서에는 정성국과 청장들이 적당히 각색해 조선에 알려준 내용이 적혀 있었고 그 때문에 1660년 처음 북미 대륙을 탐사한 후 선원 몇몇만 남기고 돌아간 후 1년 뒤에 본격적으로 이주했다는 사실 대신 1660년 정성국이 북미 대륙을 발견한 후 그대로 북미 대륙에 눌러앉았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물론 정성국은 후대를 생각해 따로 기록을 남겨두었고 말이다.

“그보다 북미왕국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공격한 것이 1666년 아니었습니까? 고작 6년 만에 멕시코 지역의 서해안을 모조리 불태울 정도의 강력한 함대를 만들었다는 소린데...허. 정말 조선이 북미왕국의 존재를 모르고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다고요?”

이 책에 쓰여있기로는 1660년 조선인이 당도하기 전까지는 원주민들끼리 커다란 다툼없이 수렵하면서 지냈다고 되어 있었고 그렇다면 원주민들의 문명 수준은 뻔했다.

기껏해야 텍사스 지역의 미개한 원주민들 정도.

헌데 1666년 북미왕국이 누에바 에스파냐의 아카풀코 항을 공격했을 당시 동원했던 북미왕국의 군함은 20척이 넘었다는 사실은 보좌관도 알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아무런 기반도 없는 이곳에서 북미왕국의 국왕은 원주민들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키며 6년 만에 20척이 넘는 군함을 건조하고 이를 운용할 병사까지 키워냈다는 소린데 이게 가능한가 싶었던 보좌관이었다.

이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최소한 조선 사절단의 책임자는 그렇게 이야기하더군. 그리고 그자가 굳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고.”

“확실히 그렇긴 한데...”

“그리고 조선 사절단의 책임자가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한 것은 아니지만...생각보다 조선의 기술력은 떨어지는 모양이야. 기껏해야 우리 에스파냐 수준이랄까?”

에스파냐 외교관은 조선이 전기는커녕 증기기관 기술도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초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조선의 기술 수준을 알아내기 위해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에 신임 예판은 타국에 조선의 사정을 훤히 알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적당히 질문을 회피하기는 했지만, 에스파냐 외교관은 조선의 기술력이 기대 이하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를 이야기해주자 보좌관이 중얼거렸다.

“그 말씀은 조선에서 강력한 함대를 지원해줄 수도 없다는 뜻이로군요?”

“그렇지.”

에스파냐 외교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좌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 조선이 그 정도 기술력이면 조선인들이 북미 대륙에 처음 당도했을 때의 수준도 비슷했을 것 아닙니까. 헌데 고작 6년 만에 거대한 배를 움직일 정도로 증기기관을 발달시켰다는 겁니까?”

“...그렇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에 보좌관은 뻔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본국에서 증기기관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두 멍청하거나 북미왕국의 학자들이 모두 천재라는 뜻인데...어느 쪽이든 달갑지는 않군요.”

에스파냐 외교관은 전자보단 후자에 더 가능성을 두었고 그 때문에 북미왕국의 발전이 더 가속화되리라고 판단했다.

그런 만큼 그는 북미왕국의 과거를 캐내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당장 에스파냐의 국익에 도움이 될 행동을 택했고.

“그렇지. 후우. 아무튼, 서점엔 이것 말고도 책이 좀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대부분은 교과서였지만 그 외의 책들도 꽤 있긴 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미처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그럼 자네는 새한성의 서점을 돌아다니면서 본국의 학자들에게 보낼 서적들을 사들이게.”

에스파냐 외교관의 말에 보좌관은 조금 회의적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학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기술 서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북미왕국이 기술 보안에 무척 신경 쓴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만큼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책에 증기기관의 설계도나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선박의 구조 같은 내용이 설명된 기술 서적이 과연 존재하겠느냐는 보좌관의 말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없으면 어쩔 수 없고. 하지만 구할 수 있는데 까지는 구해보게.”

“알겠습니다.”

* * *

“전하. 포로나이에서 긴급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집무실에서 각종 보고서를 재빠르게 처리하고 있던 정성국은 집무실의 문을 급히 열고 들어와 보고하는 조용한 곰을 보고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응? 긴급 보고? 무슨 일인데?”

“러시아 차르국과 전투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뭐라고?!”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기겁하면서 들고 있던 보고서를 던지듯 내려놓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한 곰이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낚아채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 난 러시아인들이 아이누 섬에 진출해 충돌이 발생한 줄 알았더니 다행히 그건 아니군. 흑룡강을 통해 청나라 진형에 식량을 보급하던 수송선을 공격한 건가?”

“그렇습니다.”

정성국은 다시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대고 보고서를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흐음. 200명가량의 러시아인이 여러 척의 조그마한 배를 타고 수송선에 접근했기에 만약을 대비해 수송선에 타고 있던 아이누 경비대가 대응 사격했고 결국 43명의 포로 외에 생존자는 없다라...”

“예. 다만 포로가 된 러시아인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아이누 경비대의 조장은 포로를 모두 아이누 섬으로 데려가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청나라에 축소 보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투가 끝난 후 뒷정리를 마친 수송선은 다시 흑룡강을 거슬러 알바진 인근의 청나라 진형에 도착해 예정대로 가지고 왔던 식량을 내려놓았다.

그때 아이누 경비대의 조장은 선장에게 이야기해 200명에 가까운 러시아인들에게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축소해 알리라고 지시했고.

수송선 밑창에 감금된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차르국이 북미왕국을 선제공격했다는 것을 증명할 중요한 증인들이었는데 만약 청나라 장수에게 사실대로 보고했다가 공을 탐낸 청나라 장수가 포로를 내어달라고 하면 골치 아파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현재 대치 상태는 꽤 지지부진한 상태였으니 청나라 장수가 이를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 때문에 아이누 경비대의 조장은 수송선의 선장을 설득해 30명 정도의 러시아인들이 수송선 근처에 접근해 총을 쏘며 저항해 결국 러시아인들이 피해가 커질 것을 우려해 스스로 물러났다고 보고하게 했고.

“그렇습니다. 현재 청나라의 병사들은 러시아 차르국과 지지부진하게 대치 중인 상황이다 보니 사실을 알게 되면 청나라 장수가 우리 북미왕국의 공적을 가로채기 위해 포로를 요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이를 거부하다 청나라와 다툼이 벌어지는 것을 꺼렸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어차피 장수들은 공에 목멜 수밖에 없었고 나선 정벌 당시에도 공과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의 명령 때문에 무리하게 러시아인들의 배에 진입하려다 7명의 조선 병사들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을 생각해보면 정성국은 아이누 경비대 조장의 판단이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했다.

“잘 했네. 그리고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면 당연히 후장식 소총에 관한 이야기도 알려질 수밖에 없는데 그건 썩 달갑지 않으니까.”

“예. 그렇게 넘기고 포로들을 모두 아이누 섬으로 데리고 왔는데...문제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에 정성국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애당초 외무청 관리 중에 러시아 차르국의 언어를 익힌 사람은 없잖아.”

“그렇습니다. 해서 투로시노는 상급자로 보이는 인물을 포함해 포로 일부를 쾌속선에 태워 이곳으로 보냈고요.”

“어? 그래? 그럼 포로가 지금...”

정성국이 놀란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대답했다.

“새김포에 격리되어 있습니다. 전하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바로 새한성으로 데려오겠습니다.”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다 중얼거렸다.

“흐음...새한성에 있는 유럽 사절들의 도움을 좀 받자?”

“그렇습니다.”

“일단 불러와. 헌데 과연 유럽 사절 중에 러시아 차르국의 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러시아 차르국은 대외적으로 유럽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시기는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 시기였다.

그렇기에 아직 러시아 차르국은 변방에 불과했고 그런 만큼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유럽인은 거의 없으리라고 보았다.

애당초 외무청에서도 관리들의 언어 교육을 위해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에스파냐인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기도 했으니.

이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없으면 포로들은 바로 탄광으로 보내고 유럽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차르국에 연락을 보내면 되겠지요.”

“하긴. 그 수밖에 없지. 알겠네.”

* * *

“예?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북미왕국의 배를 공격했다는 말입니까?”

다음날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이 새한성에 도착하자 조용한 곰은 유럽 각국 사절단이 머무는 숙소를 방문해 용건을 알렸다.

갑작스럽게 조용한 곰이 숙소를 찾아왔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던 사절들은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고.

러시아 차르국이 동쪽 지역을 개척하며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어느새 동아시아까지 영역을 확장한 북미왕국과 맞닥뜨릴 정도로 이동한 건가 싶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이곳에 와서 북미왕국의 군사력이 자신들의 예상보다 더 대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러시아 차르국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북미왕국의 선박을 공격한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렇습니다. 해서 러시아 차르국의 병사들 일부를 포로로 잡았는데...문제는 말이 통하질 않아서 말입니다. 해서 유럽 사절단의 일원 중에서 러시아 차르국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지 싶어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조용한 곰의 말에 사절들은 서로를 쳐다보다 중얼거렸다.

“어...일단 물어는 보겠습니다만 아마 없을 텐데요?”

잉글랜드 외교관의 중얼거림에 에스파냐 외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러시아 차르국은 변방이라...그곳의 언어를 익힌 사람이 많지는 않아서...”

“차라리 러시아 차르국의 포로들을 만나게 해 주시지요. 러시아 차르국은 변방이라 러시아 차르국의 귀족들이나 지식인들은 라틴어나 프랑스어 정도는 할 줄 알 겁니다.”

얀센의 이야기에 다른 사절들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조용한 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저희도 유럽에서 흔히 사용되는 여러 언어를 사용해 말을 걸어 보았지만 지휘관으로 짐작되는 인물도 못 알아듣는 눈치더군요.”

이에 라위터르가 슬쩍 입을 열었다.

“뭐 라틴어나 프랑스어를 사용할 줄 아는 귀족들이나 지식인들이 그 먼 곳까지 갈 이유도 없고...그런 인물이라면 북미왕국의 배를 공격하겠다는 멍청한 짓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 그건 또 그렇군요.”

그러면서 사절단의 대표들은 보좌관들에게 사절단의 일원 중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인물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명령했고 잠시 후 보좌관들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러시아 차르국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듯합니다.”

“저희도 그렇습니다.”

이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용한 곰이 중얼거렸다.

“끙. 그럼 별수 없군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 포로들은 포로수용소에 보내고 러시아 차르국에 이 일을 알려야겠는데...”

“기꺼이 도와드리지요.”

사절들은 일제히 나섰는데 이는 당연했다.

손쉽게 북미왕국에 호의를 베풀 기회였으니.

그리고 조용한 곰의 이야기에 따르면 북미왕국의 일반 상선도 아니고 청나라와의 조약에 따라 식량을 운반하는 선박이라고 했으니 잘만하면 이 분쟁이 커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유럽의 강국인 프랑스도 감당하지 못한 북미왕국을 고작 러시아 차르국 따위가 감당할 수 있을 턱이 없으니 북미왕국을 도와 러시아 차르국을 압박하며 이런저런 이득을 챙길 수도 있어 보였고.

“감사합니다. 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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