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정성국은 가끔 사용하는 아름다운 정원 한복판의 티테이블 위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가 호위대원의 안내를 받아 통역해줄 외무청 관리와 함께 다가오는 라위터르를 보고 준비한 커피잔들에 커피를 따랐다.
“오셨습니까. 여기 앉으시지요.”
“오! 이것이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커피군요. 유럽에도 소문이 자자한 이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참으로 영광입니다.”
지금껏 유럽에서는 터키식 커피를 즐겼고 그 때문에 상류층은 커피를 전담해서 끓이는 시종을 두어 부를 과시했다.
하지만 북미왕국에서는 정성국이 커피를 내리는 과정 자체를 즐겼기에 시간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주로 찻집에서 커피를 사 마셨고 고위층 관리들은 커피를 직접 내려 마셨고 이러한 사실이 유럽에도 알려지고 정성국이 직접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여러 도구가 유럽으로 흘러 들어가 최근 상류층 사이에선 북미왕국에서 개발한 도구를 사용해 커피를 직접 내려 마시기도 하는 만큼 라위터르는 정성국이 직접 내린 커피를 건네주자 진심으로 영광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라위터르의 반응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미리 준비한 초콜릿 케이크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외무청 관리의 도움을 받아 라위터르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동안 새한성의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요?”
초콜릿 케이크의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과 연한 커피의 조합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던 라위터르는 정신을 차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 전하의 배려 덕분이지요.”
“어떻던가요.”
“유럽의 대도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에 여러모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새한성 시민들의 평온한 모습이 무척이나 부럽기도 했고요.”
그 말에 정성국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덜란드도 전쟁이 끝났으니 네덜란드의 시민들도 평온한 일상을 되찾겠지요.”
“부디 그러길 바랍니다. 제 꿈이 평화로운 고향에서 여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거든요. 하하하.”
껄껄대며 호탕하게 웃는 라위터르를 보고 정성국은 슬쩍 입을 열었다.
“그 꿈을 이곳에서 이루는 것은 어떻습니까. 물론 고향이 아니라는 점은 아쉽겠습니다마는...”
“예?”
라위터르가 외무청 관리를 보고 제대로 전한 것 맞느냐는 표정을 지었고 외무청 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정성국은 웃음을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라위터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네덜란드 사절단의 대표에게 하는 말이 아닌 라위터르 경 개인에게 하는 말입니다만...라위터르 경께서도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모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정성국의 말에 라위터르는 조금은 슬픈 표정으로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허.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전하께서도 제 처지를 아실 정도였습니까...”
유럽의 사절들이 자신을 보고 수군대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빌럼 3세가 자신을 견제한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짐작했다.
하지만 북미왕국의 국왕마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이를 언급할 정도였으니 라위터르는 참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라위터르의 중얼거림에 정성국은 입을 열었다.
“최근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다 보니 유럽의 정세에 무척 관심이 생겨 여러 정보를 수집한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헌데 경의 일생이 내가 존경하는 어떤 분과 무척 닮아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경의 처지가 더욱 안타까워서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눈앞에 있는 이 젊은 청년은 강력한 북미왕국의 절대 군주였다.
헌데 이러한 북미왕국의 국왕이 존경하는 인물이 있다는 소리에 라위터르는 호기심을 나타냈다.
“예? 전하께서 존경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럼요. 조선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구한 영웅이신 이순신 제독이지요.”
그러면서 정성국은 이순신 제독의 일생을 담담하게 이야기했고 처음엔 약간의 흥미를 보였던 라위터르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양에 그런 뛰어난 제독이 있었다는 것도 놀라웠고 정성국의 말마따나 이순신 제독이나 자신이나 당시의 상황과 처지가 무척이나 흡사했으니까.
그나마 빌럼 3세는 자신을 견제하면서도 나라의 존망이 걸려있기에 일정한 선은 지켰으며 최소한의 지원은 해주었지만, 이순신 제독은 그렇지도 않았으니 빌럼 3세가 총독이 된 이후 주변 상황이 무척 버겁다고 느껴왔던 라위터르는 이순신 제독의 심정을 대략이나마 짐작하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허어...놀랍군요. 그런 분이 계셨다니.”
“예. 그리고 그분의 삶이나 라위터르 경의 삶이나 꽤 비슷하지요.”
“음...”
라위터르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순신 제독께서는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셨기에 영웅으로 남으셨습니다. 이건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당시 이순신 제독께서 충성을 다했지만 이를 의심하기만 했던 왕의 인품을 생각한다면...글쎄요. 이순신 제독께서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생존하셨다면 그 끝이 좋지는 않았겠지요. 실제로 이때 큰 공을 세운 다른 인물들도 후에 반역죄로 사형당한 인물들도 있고.”
뭐 꼭 동양만 그런 것도 아니고 서양에서도 이런 일은 많았기에 라위터르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으음...”
정성국은 잠시 커피를 마시며 라위터르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가 적당히 시간이 흘렀을 무렵 다시 입을 열었다.
“네덜란드는 일단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그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빌럼 3세로선 라위터르 경이 부담스럽겠지요. 이는 라위터르 경이 은퇴를 선언한다 해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러니 북미왕국으로 오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곳에 와서 여생을 즐기시지요.”
“예...? 해군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고요?”
라위터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라위터르는 이 북미왕국의 젊은 국왕이 자신의 경험을 높이 사 해군 함대를 맡기기 위해 자신을 회유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에 정성국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경을 북미왕국 해군에 들이려면 최소한 함대 사령관 자리 정도는 내어줘야 하는데...그동안 북미왕국을 위해 바다를 누빈 수많은 함장을 제치고 경을 그 자리에 앉힐 수야 없는 법이지요. 그리고 경도 여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꿈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헌데 해군에 소속시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허허허. 그렇습니까.”
라위터르는 정성국의 말에 조금 부담을 덜 수 있었다.
물론 라위터르는 목숨과 명예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명예보다야 목숨이 낫지 않은가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명예가 모략에 망가지는 것을 반길 수야 없었다.
정성국이 빌럼 3세로부터 보호해줄 테니 북미왕국 해군을 맡아달라고 했다면 당연히 빌럼 3세는 자신을 나라를 버린 배신자로 선동할 것이 분명했고.
하지만 정성국의 말을 들어보니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런 만큼 해군에서 은퇴하고 편안한 은퇴 생활을 위해 북미왕국으로 이주한다고 알린다면 빌럼 3세도 딱히 트집을 잡지는 못하리라고 보았다.
“전하의 배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군요. 다만 이는 가족과도 상의해볼 문제라 바로 답을 드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아. 이해합니다. 내 제안은 언제든 유용하니 필요하면 연락을 주세요.”
* * *
유럽 각국의 사절단은 외무청 관리의 안내로 새한성 곳곳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 사절단이 방문하는 곳과 비교하면 극히 일부만 방문할 수 있었는데 이는 북미왕국 외무청에서는 정성국의 영향을 받아 유럽 각국을 무척 경계했고 공방을 보여주었다가 저들이 무언가 얻을 것을 우려한 탓이 컸다.
공업과 관련해 기초 지식이 부족한 조선과는 달리 서양은 조선보다는 나았으니 멋모르고 조선 사절단이 항상 방문하는 공방을 안내했다가 저들에게 기술을 넘겨주는 꼴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저들은 북미왕국의 증기기관 기술을 무척 탐냈기에 증기기관을 이용하는 공방 대부분은 일정에서 뺄 수밖에 없어 꽤 한가한 일정이 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사절단의 일원 중 일부는 북미왕국의 백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다는 이유로 북미왕국 병사들의 호위를 받아 길거리를 돌아다녔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에스파냐 외교관의 보좌관도 있었다.
보좌관은 북미왕국의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휴식하는 날마다 북미왕국의 거리를 쏘다녔고 그렇게 북미왕국의 백성들과 접촉하며 북미왕국의 정보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보좌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쉬고 있던 에스파냐 외교관의 방에 찾아왔다.
“뭔가...좀 이상합니다.”
“뭐가 말인가?”
“북미왕국 말입니다.”
“응?”
에스파냐 외교관이 무슨 소린가 싶어 보좌관을 바라보자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커피하우스를 돌면서 북미왕국 백성들에게 파악한 정보를 종합해보니...북미왕국은 원주민 국가가 아닙니다. 조선의 식민지에 가깝지요.”
“뭐라고? 그게 대체 무슨 황당한 소리야?”
유럽의 어떤 나라라도 북미왕국을 상대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하는데 그러한 북미왕국이 다른 나라의 식민지라니.
에스파냐 외교관이 보좌관을 보고 미친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하자 보좌관은 그동안 북미왕국 백성들과 접촉해 알게 된 북미왕국의 정보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를 듣던 에스파냐 외교관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보좌관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잠깐. 잠깐. 그게 정말 확실한 건가? 조선인들이 태평양을 건너 이곳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이곳의 원주민들이 다른 지역의 인디오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그렇습니다. 아니. 오히려 낙후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작물을 재배하는 지식조차 없었다고 이야기하는 노인이 있었으니까요.”
“허...”
에스파냐 외교관은 보좌관의 대답에 정말 믿을 수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가로등이 켜진 커다란 대로를 바라보았다.
‘이주민들이 이런 거대한 도시를 20년 만에 만들었다고? 물론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럼 조선인들이 이 북미 대륙에 도착한 것은 언제쯤이라던가?”
“대략 15년에서 20년 정도 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으음...”
에스파냐 외교관이 보좌관의 말에 신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을 때 보좌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조선인들이 이주해 이곳 원주민들과 함께 주변을 개간하며 살다가 북미왕국을 건국한 것처럼 보이고요.”
“우리와 전쟁을 벌였을 당시 분명 이들은 북미왕국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니 건국은 최소한 그 전이겠군?”
“그런 것 같습니다.”
보좌관의 말에 따르면 15~20년 전에 조선인이 이주해 식민지를 세우고 10년 전쯤에 독립해 북미왕국을 세웠다는 뜻이었는데 에스파냐 외교관이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이를 언급했다.
“흐음...하지만 자네의 말엔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아.”
“예?”
“북미왕국이 조선의 식민지라면 북미왕국의 기술은 결국 조선의 기술이라는 뜻 아닌가. 특히 식민지가 건설된 지도 20년이 채 안 되었으니.”
식민지는 본국보다 기술 수준이 떨어지면 떨어졌지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아는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그럼 조선도 북미왕국처럼 후장식 소총, 아니. 본국이라면 그 회전 단총으로 무장한 군대와 증기기관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함대를 보유하고 있을 텐데...식민지가 독립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본국이라면 이 북미왕국보다 병사도, 함대도 더 많을 텐데?”
“어?”
에스파냐 외교관의 의문에 보좌관이 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에스파냐 외교관은 가방 속을 뒤져 세계 지도를 꺼내 펼치며 청나라 동쪽의 반도를 가리켰다.
“자. 보라고. 조선의 영토는 그렇게 크지 않아. 그런데 태평양을 건너 거대한 신대륙에 식민지를 애써 건설했는데...그 식민지가 북미왕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하는 것을 그냥 용인한다고?”
식민지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데 그걸 포기하는 등신이 있느냐는 물음에 보좌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음...혹시 북미왕국의 국왕은 조선의 왕실 사람이 아닐까요?”
계속 면박을 주려던 에스파냐 외교관은 그 대답에 잠시 움찔했다.
“흐음...그렇다면 그 부분은 설명이 되는군. 하지만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또 있네. 분명 청나라가 강국이긴 하지만...회전 단총으로 무장한 조선을 속국으로 두고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나?”
“예?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랍니까?”
보좌관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에스파냐 외교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잉글랜드 외교관이 그러더군.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고. 근데 자네가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북미왕국보다 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건데...이건 뭔가 앞뒤가 안 맞지 않나? 청나라가 분명 강국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닐 텐데?”
“으음...”
에스파냐 외교관의 의문에 보좌관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자 에스파냐 외교관이 질문을 던졌다.
“술주정뱅이가 지껄인 소리는 아니고?”
이에 보좌관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술집도 아니고 커피하우스를 돌아다니며 캐낸 정보입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요.”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에스파냐 외교관이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흐음...알겠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내일 바로 외무청 관리에게 이를 확인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세? 과연 외무청 관리가 제대로 말을 해 줄까?”
아카풀코 조약 이후 꽤 우호적으로 지내왔던 북미왕국과 에스파냐였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과연 북미왕국이 솔직히 이야기할지 의문이라는 에스파냐 외교관의 대답에 보좌관이 수긍했다.
“그건...그렇지요.”
“내일 조선의 사절단이 새한성을 방문한다고 들었네. 그리고 내일 오후에 조선의 사절단을 환영하는 만찬이 열리는데 이때 참석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지. 그러니 조선의 사절단과 접촉해서 정보를 더 확보하고 물어봐야겠어.”
“아. 그게 낫겠군요.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