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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74화 (374/850)

374화

환영 만찬이 끝나고 사절단이 모두 궁궐에서 퇴궐한 이후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조용한 곰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네덜란드 사절단 책임자의 이름이 미힐 더 라위터르라고?”

“그렇습니다. 전하.”

“원래 외교관이라던가? 풍기는 분위기가 어째 외교관 같지는 않던데...”

이에 조용한 곰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허. 정확하십니다. 지금 책임자인 라위터르는 원래 해군 제독이라고 하더군요.”

“역시 그런가...?”

환영 만찬에서의 대화를 통해 라위터르라는 성을 알고 정성국은 조금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서양에선 호레이쇼 넬슨, 이순신과 더불어 역대 최고의 해군 지휘관으로 손꼽히는 인물인 미힐 더 라위터르가 동시대의 인물이었을뿐더러 네덜란드 사절단의 대표로 왔으니 혹시나 했던 것이다.

‘대체 그 양반이 왜 사절단의 대표로 온 거지? 아...’

라위터르는 상인 출신으로 위기에 빠진 네덜란드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워 결국 구국의 영웅이 되었고 그 때문에 빌럼 3세의 시기를 받아 사실상 죽음과 다름없는 명령을 받고 이를 따르다 전쟁터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고통스럽게 버티다 사망한, 어찌 보면 이순신 제독과도 무척 비슷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정성국은 빌럼 3세가 라위터르를 사절단의 책임자로 보낸 이유를 짐작하고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잉글랜드가 전쟁에서 이탈한 이후 바다에서의 위협이 사라지자 라위터르를 죽이기 위해 에스파냐 해군을 도우라는 명령과 함께 지중해로 보내버렸지만, 지금은 프랑스 해군이 박살 난 상황이라 프랑스가 전쟁을 멈추고 바로 종전조약을 맺었으니 일단 암스테르담에서 치우기 위해 사절단의 책임자 자리를 주며 북미왕국으로 보낸 거로군. 쯧쯧. 어? 잠깐만?’

전생의 빌럼 3세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라위터르를 가만히 놔둘 것 같지는 않았다.

정적이었던 요한 드 비트를 실각시키기 위해 그의 형 코르넬리스 드 비트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거짓 혐의로 체포해 고문을 가하며 압박해 결국 요한 드 비트는 총리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고문을 당한 형 코르넬리스가 1심에서 유죄를 받자 즉각 항소를 제기한 후 형과 함께 법정을 나서려 했지만, 빌럼 3세는 이미 시민들에게 이들 형제가 유죄이며 반역자라고 알려버렸기에 성난 군중들은 법정 앞에서 이들 형제를 공격하려 들었다.

이에 요한은 법정의 경비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빌럼 3세의 명령을 받은 경비대들은 이를 거절했고, 이 소식을 듣고 네덜란드 평의회가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경비대에게 비트 형제를 보호하라는 명령서와 빌럼 3세에게 군 투입을 요청했으나 빌럼 3세는 이를 거절해버린다.

더불어 빌럼 3세는 오후 4시가 되자 법정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마저 모두 철수시켜버리고.

그렇게 성난 군중에 의해 법정에 갇혀있던 비트 형제는 경비대 철수 이후 법정으로 난입한 군중에 의해 결국 사망했고 폭도로 변한 시민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들 형제의 시체마저 길거리로 가져와 난도질하며 유린했다.

그렇게 네덜란드의 위대한 정치가 중 한 명이자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요한 드 비트는 비참하게 사망했고.

물론 요한 드 비트의 경우 그동안은 네덜란드를 잘 이끌어왔지만, 잉글랜드의 재정 상태를 고려하면 절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거라고 판단해 안이하게 대응했기에 3차 영란전쟁 당시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덕분에 민심이 최악이었기에 이러한 선동이 먹혔지만 라위터르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다르긴 했다.

다만 빌럼 3세라면 시간을 들여 거짓 혐의라도 씌워 라위터르를 제거할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했고 비록 외국인이라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구국의 영웅이 정략으로 죽는 것을 본다면, 그리고 그게 아예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라면 잠자리가 영 뒤숭숭할 것 같았기에 정성국은 라위터르에게 최소한의 호의로 북미왕국으로의 이주 권유를 하는 것이 어떨까 싶었다.

‘아예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빌럼 3세야 라위터르가 네덜란드에서 사라지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테고 라위터르도 빌럼 3세의 성격을 잘 아는 이상 은퇴해서 고향에서 여생을 조용히 보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짐작할 테니. 데리고 와서...음. 그렇다고 무턱대고 함대를 맡길 수야 없는 노릇이고 이 양반 나이도 있으니...아. 군사대학의 교수로 임명하고 해군 사관을 가르치는 일을 맡기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한 4년 전에 설립된 북미왕국의 군사대학은 그 규모가 큰 편이었는데 이는 전생과는 달리 육군 지휘관과 해군 지휘관을 통합해서 육성하고 있을뿐더러 상선 사관들마저 군사대학에서 육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수송선, 상선 등의 배를 운용하는 데 필요한 필수 인력들은 주로 해군 훈련소에서 임시로 육성하고 있다가 군사대학이 설립되면서 자연스럽게 선장, 기관장, 항해사 등의 상선 사관 육성 마저 군사대학에서 맡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군사대학의 교수들은 꽤 많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감이 있었으니 경험이 풍부한 라위터르를 교수로 앉히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판단했고.

정성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아마 네덜란드에선 북미왕국 해군의 강력함을 조금이나마 파악하기 위해 해군 제독을 사절단의 책임자로 보낸 것이 아닐까 판단하고 있습니다.”

유럽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모르기에 헛다리 짚은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것 참...확실히 나름대로 유럽 정세에 대해 파악하고는 있지만 역시 부족해. 슬슬 유럽에 외무청 관리를 파견해서 정보를 수집하긴 해야 하나?’

정성국이 그동안 유럽에 외무청 관리를 파견하지 않은 것은 유럽으로 외무청 관리를 파견하는 것이 생각보다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외무청 관리 대부분은 주로 원주민들이었고 이들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유럽의 각종 전염병에 취약했기에 섣불리 보냈다가 병이라도 걸릴까 봐 꺼릴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이쪽에서 유럽에 외교관을 파견하면 당연히 북미왕국 내에도 유럽의 외교관들이 북미왕국에 머물 테니 그동안 북미왕국의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경계했던 정성국은 이를 꺼릴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정성국과 북미왕국의 존재로 역사가 바뀌게 된 만큼 변화된 유럽의 정세를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었기에 언제까지 외교관을 보내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그래. 어차피 다른 학문은 몰라도 의학은 꽁꽁 감출 생각은 없었으니...이 기회에 북미왕국의 의학 서적 일부를 사절단에게 넘겨주자. 그럼 자연스레 공공 위생에도 신경을 쓸 테니 상황이 좀 나아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이 조용한 곰을 보고 말했다.

“그런가? 알겠네. 환영 만찬까지 끝났으니 사절단의 접대와 몇몇 현안에 대한 협상은 외무청에서 진행하도록 하고...네덜란드 사절단의 책임자인 라위터르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자리를 한번 마련해보게.”

“예? 음...잉글랜드나 에스파냐 사절단의 책임자들이 불만을 품을 수도 있으니 조금 더 시간을 할애해 주시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만...”

정성국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조용한 곰이 이렇게 제안하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각 사절단의 대표와 따로따로 커피라도 한잔 마시라는 소리겠지? 알겠네. 차라리 그편이 나을 듯싶군. 그리고 사진기 말고도 저들이 떠날 때 건네줄 의학 서적을 준비하도록 하게.”

“의학 서적을 말입니까? 조선에 전해준 것과 같은 것을 준비하면 될까요?”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겠...아. 괴혈병의 원인과 치료법, 그리고 흑사병의 매개체에 대해서도 추가하도록 하게.”

“으음...”

이 시대에 괴혈병은 불치병에 가까웠다.

비타민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확립한 1930년대에나 괴혈병의 원인이 규명되어 손쉽게 치료할 수 있었을 뿐이지 그 전까지는 괴혈병으로 인해 수많은 뱃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물론 비타민의 존재를 모르더라도 유럽에서는 경험적으로 신선한 과일이나 채소, 생고기 등이 효과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장기간 항해하는 배 위에서 이러한 것들을 구할 방법도 없었고 주로 의사나 관리, 그리고 선장 대다수는 고작 음식 따위로 괴혈병이라는 희대의 불치병을 예방,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에 괴혈병으로 죽는 뱃사람들은 꾸준히 나왔다.

그리고 이를 잘 알고 있는 조용한 곰이었고.

그렇기에 북미왕국에서 괴혈병의 원인과 치료법이 담긴 책을 넘겨준다면 비록 많은 사람의 목숨은 구할 수 있겠지만 유럽인들의 확장을 저지하는 빗장 하나가 사라진다는 뜻과도 같았기에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조용한 곰이었다.

그런 조용한 곰의 반응에 정성국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괴혈병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에게 덤비지는 못할 테니.”

“알겠습니다. 전하.”

* * *

흑룡강 인근에 러시아인들이 세운 알바진 요새의 한 막사에서 알렉세이는 알바진 요새의 최고 책임자인 니키포르 체르니코프스키의 공격 명령에 인상을 조금 찌푸리면서 되물었다.

“정말 공격해도 되겠습니까?”

“그렇다니까 그러네.”

“하지만...”

1643년 오호츠크해에 도달한 시베리아 개척단은 농업에 적합한 땅을 찾기 위해 남하했고 그러면서 원주민과 충돌이 일어나자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상국인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 분쟁이 시작되었다.

다만 초기에는 북경에서 보낸 군대가 허무하게 패배하면서 러시아인들은 청나라를 만만하게 보고 계속해서 남하했고, 당시 명나라의 잔당을 토벌하는 일이 급했던 청나라는 패배의 원인이 제대로 된 총병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리고 조선의 도움을 받아 2차례에 걸쳐 러시아인들을 토벌했다.

그 후 북진해서 네르친스크 이남의 러시아인들을 모두 쫓아낸 청나라는 북진했지만, 흑룡강 유역에 세운 알바진 요새에 막혔다.

그렇게 알바진 요새 근처에서 계속해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이 알바진 요새의 최고 책임자인 니키포르가 알렉세이에게 재작년부터 알바진 요새 근처의 청나라 진영에 흑룡강을 이용해 물자를 보급하는 커다란 수송선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알렉세이는 지금의 대치 상황이 깨질 것을 우려했고.

그런 알렉세이의 반응에 니키포르는 걱정이 지나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지금 청나라 내부는 혼란하다고. 남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그러니 우리가 수송선을 공격한다고 한들 즉각 병력을 동원해 우리를 공격하긴 어려울 거야.”

최근 청나라 남쪽에서 커다란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꽤 널리 퍼졌기에 니키포르의 말처럼 수송선을 공격한다 해도 곧바로 추가 병력이 지원되고 이 알바진 요새를 공격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 알렉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그건 그렇지요. 하지만...”

“아씨. 또 뭐가 문젠데.”

조금 짜증을 내는 니키포르를 보고 알렉세이가 냉큼 대답했다.

“솔직히 청나라 진영을 드나드는 그 커다란 수송선이 조금 걸립니다.”

“수송선? 왜?”

“뭐랄까. 수송선의 모습이 꼭 서양의 배 같잖습니까.”

그 말에 니키포르는 신음을 흘렸다.

확실히 청나라가 알바진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주변 나무를 베어 만든 배와는 전혀 다른, 유럽에서 흔히 보는 범선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니키포르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흐음...그렇기는 한데...어차피 제대로 된 청나라의 배를 본 적이 없으니 뭐라고 하기는 어렵지. 그리고 청나라에도 유럽인들이 드나드니 그들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다만 상관없어. 이곳은 전장이고 수송선의 물자는 청나라 진영으로 흘러 들어가는 만큼 이를 탈취해 청나라의 군대가 물자 부족으로 다시 물러나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혹시 유럽의 상인이 청나라 조정과 계약해서 물자를 옮길 가능성도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에라도 보통은 자국의 깃발을 달곤 하는데 수송선에 달린 깃발은 처음 보는 깃발이었고 적인 청나라와 계약한 이상 수송선을 적으로 판단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 니키포르였다.

그리고 그 말은 과연 틀리지 않았기에 알렉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알겠습니다. 허면 슬슬 수송선이 올 시기이니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래. 수송선을 습격할 곳에 미리 배도 다 준비해두었으니 빠르게 접근해서 배를 탈취하고 그대로 몰고 오라고. 그동안 관찰한 결과 수송선의 인원은 얼마 되지 않으니 재빠르게만 움직인다면 수송선의 탈취는 쉬울 거야. 알겠지?”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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