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화
마침내 새한성에 도착한 유럽 각국의 사절단은 곧바로 숙소로 이동해 일부는 휴식을 취하고 일부는 목욕탕에 들러 깨끗이 씻고 미리 준비한 의복을 갖춰 입은 후 곧바로 마차를 타고 궁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유럽 각국의 사절단은 베일에 가려져 있던 북미왕국의 국왕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만남은 짧았다.
사절단의 성격 자체가 친선 사절단에 가까웠기에 북미왕국 국왕에게 직접 친서를 전하는 것이 다였을뿐더러 따로따로 북미왕국 국왕을 알현하는 것이 아닌 대전에서 유럽 각국의 사절단이 함께 북미왕국 국왕을 알현하는 방식이었기에 중요한 외교적 문제를 꺼낼 상황이 아니기도 했기에.
그렇게 잠깐의 만남이 끝난 후 정성국이 먼저 대전에서 나갔고 유럽 각국의 사절단은 외무청 관리의 안내를 받아 대전 근처의 작은 대기실로 나뉘어 들어갔다.
그리고 외무청 관리가 환영 만찬이 시작되기 전까지 잠시 쉬라면서 대기실을 나가자 새한성에 도착한 이후 곧바로 북미왕국 국왕을 만난다는 사실에 극도로 긴장했던 네덜란드 사절단의 일원인 얀센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러면서 얀센은 잠시 머릿속에서 방금 알현했던 정성국의 모습과 분위기를 복기하다 옆에 있는 라위터르 제독을 바라보았다.
“제독께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대기실에 들어온 뒤로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던 라위터르는 얀센의 물음에 입을 열었다.
“방금 알현한 북미왕국 국왕 전하의 평가를 묻는 거겠지요?”
“그렇습니다.”
일단 이 대기실에는 자신과 얀센 외엔 없었지만, 북미왕국의 궁 안에서 북미왕국의 국왕을 평가하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던 라위터르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흠...첫인상은 무척 고귀하고 위엄있어 보인다는 것, 예상보다 무척 젊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젊은 얼굴과 건장한 신체가 어울려 무척 패기 있어 보였다는 것 정도겠지요.”
물론 고귀하고 위엄있어 보인다는 것은 북미왕국 국왕의 말투나 행동 때문이라기보단 격식 있어 보이는 특유의 복식과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한 대전, 위에서 내려다보게 만드는 옥좌, 그리고 그 옥좌 위의 화려하고도 눈부신 조명의 조합 때문이긴 했지만 이를 파악하지는 못한 라위터르였다.
그리고 라위터르의 평가에 얀센도 슬쩍 라위터르에게 가깝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며 중얼거렸다.
“역시 제독께서도 그렇게 판단하셨군요.”
“예. 그리고 잠깐 나눈 대화를 통해 이 첫인상이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워낙 짧은 만남이었고 대전의 분위기 덕분에 제대로 파악하진 못한 감이 있습니다.”
이번 사절단의 공식적인 목적은 빌럼 3세의 친서를 전해 북미왕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북미왕국의 정보 수집이 주목적인 만큼 라위터르가 아쉬워하자 얀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지요. 결국, 조금 있다 열린다는 환영 만찬에서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를 파악해야겠군요.”
“그래야 할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라위터르는 다시 생각에 잠겼고 얀센은 그런 라위터르를 내버려 두고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궁 안의 방이었기에 대기실이라 한들 무척 화려했고 슬슬 해가 질 무렵이라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적었지만, 대기실 천장에는 무척 환한 빛을 내는 무언가가 매달려있었다.
‘저게 전기로 빛을 내뿜는다는 그 전등이라는 건가? 정말 밝기 그지없군.’
얀센은 기차를 타고 새한성으로 이동하던 중에 응접실에서 에스파냐, 잉글랜드 외교관과 어울리며 북미왕국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중에는 저 전등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 문헌에서 나오는 전기 물고기의 존재나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한 정전기의 기록 덕분에 유럽의 학자들도 전기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다.
헌데 북미왕국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물질을 찾아내고 전기를 이용해 도시 전체에 빛을 밝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유럽의 학자들은 충격에 휩싸이며 전기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이번 사절단에 어떻게든 포함되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은 얀센도 잘 알고 있었기에 얀센은 전등이 발하는 환한 빛을 눈을 찌푸리면서도 바라보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쪽에서 의자를 가져온 후 그 위에 올라가 까치발을 들고 팔을 쭉 펴며 전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앗 뜨거!”
얀센의 비명에 급히 고개를 든 라위터르는 중심을 잃고 의자에서 휘청거리다 결국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얀센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대체...”
“촛불과 달라서 혹시나 했는데 저것도 엄청 뜨겁군요. 하하하.”
북미 신문에는 전등을 취급할 때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 적혀있었지만, 북미 신문을 직접 읽었던 잉글랜드, 에스파냐 외교관과는 달리 얀센은 이들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만 들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몰라 호기심에 전등을 만져보려다 일어난 사고였다.
이에 멋쩍은 듯 웃는 얀센을 보고 고개를 저은 라위터르는 얀센이 만지려 들었던 전등을 바라보았다.
“저게 전기로 빛을 밝히는 전등이라는 녀석입니까? 확실히 촛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군요.”
“그렇지요? 거기에 불빛이 흔들리는 일도 없어 신기해 만져보려 했습니다만...엄청 뜨겁습니다.”
라위터르는 전등에서 시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주저앉아 있는 얀센을 부축해 그를 일으키고는 말했다.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이에 얀센은 엉덩이를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엉덩이가 조금 얼얼하긴 한데 괜찮습니다. 손이야 살짝 대서 화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군요.”
“휴. 조심하십시오. 북미왕국이 기술 유출에 민감하다는 사실은 알지 않습니까. 자칫하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그렇게 네덜란드 사절단이 머무는 대기실이 소란스러울 때 잉글랜드 사절단이 머무는 대기실의 분위기는 또 달랐다.
“역시 왕궁이다 보니 내부가 무척 화려한 것 같군.”
조금 전 알현에서 북미왕국 국왕을 알현하기도 했고 곧 있을 만찬에도 북미왕국 국왕이 참석할 것이 분명했기에 북미왕국 국왕에 대한 정보 수집은 나중으로 미루고 대기실 안쪽을 예리하게 살펴보는 잉글랜드 외교관이었다.
이에 동승한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미왕국의 부유함을 생각하면 당연하겠지요. 그리고 저건...묘하게 시선이 가는군요.”
보좌관의 말에 잉글랜드 외교관이 시선을 돌려 대기실 벽면에 걸려있는 유리 액자에 장식된 흑백 사진을 보고 다가가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허. 무척 사실적인 그림이로군.”
“예. 다만 흑백 그림이라는 것이 조금 아쉽군요. 색상만 잘 넣었다면 무척 인상적일 것 같은데 말입니다.”
보좌관의 말에 잉글랜드 외교관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비슷한 화풍의 다른 그림을 바라보다 탄성을 질렀다.
“어? 이건 새진주의 풍경 같은데?”
“음...그렇군요. 이렇게 보니 또 느낌이 다른데요? 이것 때문에 일부러 색상을 배제한 걸까요?”
보좌관의 말에 잉글랜드 외교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의도를 파악할 수야 없지만...인상적인 그림이긴 하군. 흑백만을 사용했기에 약간 동양의 그림 같은 느낌도 나고.”
“그렇습니까?”
“동양에선 먹이라는 잉크로만 그리는 그림도 있거든. 내가 알기로 북미왕국은 동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했을 정도이니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군. 동양의 그림 대다수가 풍경화라는 것을 보면 확실한 것 같은데?”
그렇게 잉글랜드 외교관은 보좌관과 함께 대기실에 걸린 사진 4개를 감상하며 떠들어댔다.
그리고 에스파냐 사절단이 머무는 대기실의 분위기는 대기실 중에 가장 심각한 편이었다.
“이건 좀 의외군요. 생각보다 너무 젊은 것 같습니다. 물론 북미왕국 사람들이 머리나 수염을 짧게 잘라 조금 젊어 보이기는 하는데...”
보좌관의 말에 에스파냐 외교관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걸 감안해도 너무 젊어 보여. 지금껏 북미왕국과 교류하면서 북미왕국의 국왕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없었지?”
“그렇지요.”
“허면 방금 본 북미왕국의 국왕이 9년 전 누에바 에스파냐의 공격을 결정했다는 소린데...”
그 말에 보좌관이 놀란 표정으로 에스파냐 외교관을 바라보고 소리치듯 말했다.
“어? 그러고 보면 9년 전 누에바 에스파냐를 전격적으로 침공했을 당시 분명 북미왕국 국왕이 친정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지. 허.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9년 전이면...10대에 전쟁터를? 타국의 왕이지만...대단하군. 부럽기도 하고.”
북미왕국의 의학 수준은 개척촌 시절보다야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그렇다고 전생의 기억이 있는 정성국으로서는 무척 못 미더웠고 작은 병이라도 걸리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건강 관리에 신경을 쓰는 정성국이었고 그 덕택에 나이에 비하면 무척 젊어 보였다.
여기에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의 얼굴을 보고 나이를 추측하기 어려워했고 외무청 관리들은 정성국에 관한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기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정성국의 나이를 정확히 알지 못했고.
덕분에 올해로 34살인 정성국을 20대 초반으로 생각한 에스파냐 외교관은 진심으로 부럽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의 국왕인 카를로스 2세는 올해로 13살이었지만 대를 이어온 근친 덕분에 여러 가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거동조차 쉽지 않았고 지식수준도 무척 떨어진다는 것을 에스파냐 귀족이라면 모르지는 않았으니까.
헌데 북미왕국의 국왕은 비슷한 나잇대에 전쟁터에 나가 승리를 쟁취한 셈이니 북미왕국 국왕이 누에바 에스파냐를 공격한 적국의 왕이었음에도 마치 이야기에 나오는 영웅을 보는 것 같아 조금은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러한 왕을 모실 수 있는 북미왕국 신하들이 부럽기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보좌관도 비슷한 생각이었던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렇게 탄식해봐야 무능한 왕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생각보다 젊고 건장해 보일뿐더러 북미왕국의 지배자이니만큼 오만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예상외더군요.”
대전의 화려함이나 복식도 그랬지만 옥좌가 생각보다 높았을뿐더러 화려한 전등이 옥좌 뒤에서 환하게 빛을 발했기에 옥좌 앞에 서면 옥좌 위에 앉아있는 북미왕국 국왕에게 자연스럽게 위축될 수밖에 없는 설계이긴 했다.
더불어 현 북미왕국 국왕은 9년 사이에 북미왕국의 영토를 급격히 확장하면서 결국 북미 대륙의 유럽 세력을 몰아내고 북미 대륙을 북미왕국의 영토로 설정해버린 만큼 에스파냐 외교관과 보좌관은 대전에서 북미왕국 국왕을 알현했을 때 마치 북미왕국 국왕의 위엄에 눌린다고 생각하며 무척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생각보다 건장하고 젊은 모습에 당연히 자신만만하고 오만할 거라 여겼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들을 신하 취급을 하며 하대할 줄 알았지만, 북미왕국 국왕의 반응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기에 에스파냐 외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솔직히 우리에게 존대할 줄은 몰랐어.”
“예. 네덜란드 사절단이야 북미왕국어를 하지 못해 통역이 전해줘야 했기에 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습니다만 잉글랜드 사절단은 꽤 놀란 눈치였지요.”
“아. 변방의 소왕도 아니고 절대왕권을 구축한 북미 대륙의 젊은 지배자가 타국의 외교관에게 예의 바른 모습을 보이면 그게 맞는 행동이라 하더라도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지.”
에스파냐 외교관의 말에 보좌관도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을 때 에스파냐 외교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북미왕국 국왕을 직접 만나보니 알겠어. 지금 국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지만 않는다면 북미왕국의 성세는 계속될 거야.”
잠깐 만난 것에 불과했지만 북미왕국의 국왕이 뛰어난 인물인지, 아둔한 인물인지는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에스파냐 외교관이 결론을 내리자 보좌관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확실히 그렇겠군요. 허면 지금처럼 북미왕국과는 계속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이 에스파냐에게도 이롭겠군요.”
원래 타국의 왕이 뛰어나 봐야 자국에 좋을 것은 없었지만 에스파냐의 경우 국내 정치가 무척 불안정했고 북미왕국은 의외로 멕시코 이남과 남미 지역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북미왕국과 우호적으로 지내며 식민지를 건사하는 것도 나쁠 것 없다는 생각에 에스파냐 외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호국이 아니라 아예 동맹을 맺었으면 좋겠는데...”
“유럽의 사정에 휘말리기 싫다면서 동맹은 맺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었으니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렇긴 한데...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