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웅크린 늑대가 기차에서 내린 후 얼마 되지 않아 기차가 덜컹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객실에 있던 사절단의 유럽인들은 흥분과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이를 예상한 외무청 관리들은 부지런히 객실을 돌아다니며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기차의 안전성을 떠들어댔고.
덕분에 기차가 움직일 때만 해도 객실 안에서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기차의 속도가 올라갈수록 창밖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정된 침대를 꼭 붙잡고 있던 사절단의 유럽인들은 어느덧 바깥의 풍경을 즐기거나 혹은 다른 객차로 이동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네덜란드 사절단의 일원인 얀센은 기차의 진동이 익숙해졌을 때쯤 객실을 나와 응접실로 향했고 응접실에서 미리 자리를 잡고 커피를 마시고 있던 에스파냐, 잉글랜드의 외교관이 응접실을 들어오는 얀센을 반겼다.
“아. 오셨습니까?”
“라위터르 제독께서는?”
“북미왕국의 풍경을 감상하시겠다면서 객실에 남으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뭐 제독께서도 속이 복잡하실테니...”
얀센은 잉글랜드 외교관이 슬쩍 덧붙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사정을 파악하고 있는 건가?’
애당초 네덜란드의 해군 제독인 라위터르가 이렇게 북미왕국에 방문한 것은 빌럼 3세의 술수 때문이었다.
빌럼 3세의 아버지 빌럼 2세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어머니 메리 역시 그가 10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다.
그리고 당시 네덜란드는 총리였던 요한 드 비트를 필두로 한 공화파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빌럼 3세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총독직을 물려받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헌데 그의 운명은 외삼촌인 찰스 2세에 의해 바뀌게 된다.
찰스 2세는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고 네덜란드를 침공했고 네덜란드군이 초전에 프랑스군에 대패하자 빌럼 3세는 이를 총리 요한의 탓으로 몰아가며 결국 그를 총리직에서 해임시키고 요한은 빌럼을 지지하는 시민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렇게 빌럼 3세는 네덜란드의 총독에 취임하게 되었는데 라위터르는 총리였던 요한과 친구 사이였고 정치적으로도 요한 파에 속했기에 당연히 빌럼 3세는 라위터르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라위터르는 2차 영란전쟁 당시 기습을 통해 잉글랜드 해군을 철저히 박살 내고 템스 강 하구를 봉쇄해 잉글랜드가 항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최근 3차 영란전쟁에서도 무력하게 패배하거나 간신히 방어에 성공한 육군과는 달리 잉글랜드, 프랑스 연합 함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가 전쟁에서 이탈한 이후에는 프랑스 본토를 공격해 전쟁을 종식하는 데 일조했으니 전쟁이 끝난 현재 라위터르는 네덜란드 시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연히 빌럼 3세로선 이런 라위터르의 인기가 무척이나 거슬릴 수밖에 없었고 그의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북미왕국으로 보낸 것이다.
헌데 이들은 본토의 소식이 밝은 편도 아닐 텐데도 뻔히 이러한 사정을 파악한 듯 보였기에 얀센은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그보다 이 기차는 정말 빠르군요.”
“예. 마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전력 질주하는 말보다는 조금 느린 듯합니다만...”
에스파냐 외교관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잉글랜드 외교관이 끼어들었다.
“뭐 전력 질주하는 말이 이토록 오랫동안 달리지야 못하니까요.”
이에 얀센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철길 위를 달려서 그런지 그렇게 흔들리지도 않는 느낌입니다.”
“예. 흔들림이 적어서 그런지 무척 쾌적하군요.”
그때 기차는 다리 위를 지나가기 시작했고 창밖의 풍경을 보던 사람들은 다리 위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
“어어?!”
다들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기차가 다리를 건넌 후에 에스파냐 외교관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놀랍군요. 이 육중한 기차의 무게를 견디는 견고한 다리라니.”
“북미왕국의 건축 기술이 예상외로 대단하군요. 다른 것은 몰라도 건축 기술만은 유럽과 비교하면 무척 뒤처진다고 생각했는데요.”
잉글랜드 외교관의 대답에 얀센도 고개를 끄덕였다.
새진주에는 높은 건축물이 거의 없었기에 무의식적으로 북미왕국의 건축 기술은 뒤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이들은 굳이 웅장한 대성당 같은 건축물을 건설할 필요가 없던 것이 아닌가 싶었달까.
“이거 새한성의 모습이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그렇게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누며 북미왕국의 풍경을 구경하던 잉글랜드 외교관은 문득 에스파냐 외교관을 보고 입을 열었다.
“그보다 최근 북미신문을 읽어보셨습니까?”
“북미신문이야 늘 즐겨봅니다만...”
“허면 최근 그린란드와 관련된 기사도 읽어보셨겠군요.”
“아...”
최근 북미신문에는 그린란드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북미왕국의 탐험가들이 북미 대륙 북쪽의 커다랗고 척박한 섬을 발견했고 이 척박한 섬에도 원주민들이 산다는 것, 그리고 이 섬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북미왕국 알래스카 지역에 사는 원주민과 거의 흡사한 언어를 사용했기에 이들은 아주 오래전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 그렇기에 이들과 우호적으로 교류 중이라는 기사였다.
이를 떠올린 에스파냐 외교관은 한쪽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얀센에게 이 기사의 내용을 알려주고 나서 잉글랜드 외교관을 쳐다보자 그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엇을 말입니까?”
“기사를 보면 북미왕국은 그린란드를 이번에 북미왕국 탐사대가 만난 원주민들의 땅으로 여기는 듯한데...”
“그거야 그렇겠죠. 뭐 틀린 말도 아니고.”
에스파냐 외교관이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잉글랜드 외교관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조금 더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린란드는 예전 유럽인들이 정착했던 지역이기도 하니 북미왕국이 접촉했다는 원주민들의 땅으로만 여기기도 모호하지 않습니까?”
왠지 모르게 잉글랜드 외교관은 그린란드가 원주민들의 땅으로 인정받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다.
이를 눈치챈 에스파냐는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북미왕국의 편을 들어주었다.
“글쎄요. 예전에 유럽인들이 그린란드에 일부 정착했다고는 하나 제가 알기로는 이름과는 달리 워낙 척박한 곳이라 다른 곳으로 떠나 지금은 그린란드에 정착한 유럽인들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와는 달리 북미왕국이 접촉했다는 원주민들은 현재 그란란드에서 살고 있고요. 그러니 북미왕국이 접촉했다는 원주민이 그린란드의 주인이 맞는 것 아닙니까?”
이곳에서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에스파냐인들은 칼레 해전 이후로 에스파냐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잉글랜드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리고 잉글랜드 외교관이 괜히 이 문제를 꺼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는 결국 잉글랜드가 그린란드를 탐내고 있다는 의미였는데 잉글랜드의 식민지가 늘어나는 것을 결코 반길 수 없는 에스파냐 외교관은 당연히 북미왕국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 외교관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신문 기사의 의미가 그린란드는 원주민의 땅이니 함부로 탐내지 말라는 북미왕국의 경고라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기에.
‘뭐 잉글랜드도 그걸 알기에 처음부터 그린란드가 원주민의 땅으로 인정받는 것을 꺼리는 거겠지만. 근데 왜 하필 그린란드를 노리는 거지? 위치 때문인가?’
에스파냐 외교관의 생각처럼 잉글랜드에선 훗날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을 개방할 것을 생각하면 가까운 곳에 거점이 있는 것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린란드에 식민지를 세워보는 것이 어떤가 논의 중이었다.
이를 전해 들었던 잉글랜드 외교관은 갑자기 북미신문에서 그린란드의 소유권은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있다고 천명하니 기겁하며 이를 막으려 했던 것이고 말이다.
“으음...그렇다고 해도 그것을 그냥 인정하면 거대한 그린란드가 원주민의 땅이라는 것이 인정되는 셈이잖습니까. 좀 아쉽지 않습니까?”
에스파냐 외교관은 잉글랜드 외교관의 조악한 논리를 속으로 비웃으면서 굳이 티 내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떻습니까. 척박한 동토에 불과한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얀센은 자세한 사정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눈치는 있었기에 에스파냐 외교관에게 맞장구쳤다.
비록 지금은 종전 조약을 맺었지만 최근 3차례나 전쟁을 치렀으니 잉글랜드가 원하는 것을 얻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렇긴 하지요. 그린란드는 이름과는 달리 무척 추운 곳이라 나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곳으로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한 반응에 어떻게든 이들을 선동해 함께 북미왕국에 우려를 표시하려 했던 잉글랜드 외교관은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 * *
잠시 기차역에 정차했던 기차가 다시 덜컹거리면서 움직이자 얀센은 라위터르를 보고 입을 열었다.
“석탄 보급이 끝난 모양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기차가 간혹 기차역에 멈춰 꽤 오랫동안 정차하는 때도 있었고 당연히 유럽의 사절단들은 기차에서 내려 잠시 몸을 움직이면서 기차를 관찰했다.
그렇기에 이렇게 기차가 잠시 정차하면서 기관차에 석탄과 물을 채운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그동안은 단지 북미왕국의 배처럼 증기기관으로 움직일 거라고 예상했을 뿐이었지만 이를 통해 기차가 증기기관으로 움직인다는 확신을 얻었고, 동시에 자국의 증기기관 기술 수준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 역시 얀센이 북미왕국을 방문해 파악한 사실을 토대로 북미왕국에서는 증기기관을 통해 배를 움직인다고 생각해 학자들에게 이를 연구하게 했지만, 아직 조그마한 배를 움직이는 것조차 요원했으니.
“헌데 제독께선 방금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아. 수행원들의 객실은 어떤지 궁금해서 잠깐 뒤쪽의 일반 객실을 다녀왔습니다.”
이에 얀센은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그렇습니까? 일반 객실은 어떻던가요?”
“일반 객실은 이곳에 비하면 무척 좁은 편이더군요. 다만 2층 침대가 객실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어 객실을 이용하는 4명 모두 누울 수 있게 설계되어 있고요.”
일반 객실이라길래 마차처럼 앉을 수만 있게 되어 있는 줄 알았더니 침대가 설치되어 있다는 말에 얀센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그 정도면 지내는 것이 힘들지는 않겠군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차가 군사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녔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고요.”
“예?”
“기차를 이용하면 대량의 병력을 빠르게 수송할 수 있잖습니까. 더불어 보급 물품의 수송도 편할 테고요.”
잠시 어리둥절했던 얀센은 라위터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건 그렇군요.”
“오히려 이건 우리 네덜란드에 무척 유용한 수단이 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영토가 작은 만큼 기차를 이용한다면 영토 곳곳에 배치한 병력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으음...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리면 후방의 부대를 곧바로 전선에 보낼 수도 있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이에 얀센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독님의 말씀처럼 이 기차가 군사적으로도 무척 가치 있다는 사실은 알겠습니다만 북미왕국이 이 기차를 팔 리가 없지요. 그렇다고 직접 기차를 개발하려면...어휴. 수십 년 안에 개발한다면 다행일 것 같습니다만...”
얀센이 이전 북미왕국의 방문 당시 웅크린 늑대에게 슬쩍 북미왕국의 선박을 구입할 수 없겠느냐고 물었었지만 웅크린 늑대는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기차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아...그 정도로 차이 나는 겁니까? 증기기관 기술이?”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은 전열함을 빠르게 움직일 정도인데 이쪽은 증기기관의 동력을 이용하는 방법조차 감을 잡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말입니다.”
얀센의 말에 라위터르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으음...이거 아쉽군요. 루이 14세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프랑스 해군이 복구된다면 다시 네덜란드를 공격할 수도 있어 보이니 이 기차가 있다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라위터르의 모습에 얀센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제독께선 이런 상황에서도 네덜란드의 미래를 생각하시는군요.”
그 말에 라위터르는 잠시 움찔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고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얀센을 보고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은 네덜란드의 제독이니 네덜란드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