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8화
정성국이 집무실에서 한참 보고서와 씨름을 하고 있을 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호위대장과 호위대원이 보고서를 잔뜩 들고 집무실로 들어오자 정성국은 쾌속선이 도착했음을 직감하고 내심 긴장했다.
전생에서는 현 조선의 임금인 현종이 작년 9월에 죽었고 아무리 정성국의 환생과 북미왕국에 의해 역사의 흐름이 틀어졌어도 개개인의 수명은 또 다른 문제라 전생처럼 현종이 죽었다면 호위대원들이 들고 오는 저 보고서에는 분명 현종의 죽음을 알리는 내용이 담겨 있을 테니 말이다.
“전하. 쾌속선이 도착했습니다.”
다만 호위대장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기에 정성국은 조금 안도하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래? 조선에 별다른 소식은 없다던가?”
“아. 그러고 보니...”
정성국의 질문에 호위대장의 표정이 굳는 모습을 보고 정성국은 설마 하면서 호위대장을 바라보았다.
“쾌속선 함장의 말론 출발하기 직전 전라도 쪽에서 두창이 발생해 몇몇 마을이 두창에 의해 초토화되었다는 원상의 보고가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원상에서는 혹시라도 두창이 다른 지역으로 퍼질까 무척 경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성국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호위대장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엥? 뭐? 두창?”
“예.”
물론 조선에 천연두가 돈 것이 안타깝긴 한데 정성국이 궁금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기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니...뭐 그것도 중요한 소식이기는 한데...그 외에는?”
이에 호위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 외에 쾌속선의 함장이 딱히 이야기한 것은 없습니다.”
그 말에 정성국은 안도했다.
현종이 역사대로 사망했다면 쾌속선의 함장이 분명 언급했을 테니 말이다.
해서 홀가분한 표정으로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알겠네.”
이에 호위대장과 호위대원들은 정성국에게 인사하고 조심스럽게 집무실을 나갔고 정성국은 보고서 중 원상에서 올린 한양의 동태를 적은 보고서를 확인하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 이거 역사가 제대로 바뀐 셈이군.”
보고서에는 정성국의 예상대로 현종의 죽음과 관련된 보고는 없었다.
모친인 인선왕후가 죽은 후 이를 슬퍼하느라 신료들이 이를 걱정했다는 보고 정도가 다였고.
“음? 송시열이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더불어 송시열과 함께 대공복을 주장하던 인물들도 모두 파직하고 북미왕국을 따라 조선도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서인 내 개화파와 남인들로 그 자리를 메웠다? 흐음...”
2차 예송 논쟁도 전생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서인이 일제히 대공복을 주장하며 현종을 압박했던 전생과는 달리 영의정 정태화를 비롯한 고위 관료 상당수는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기년복이 맞는 만큼 이미 기년복으로 정한 이상 굳이 바꿀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현종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덕분에 현종은 전생과는 달리 심력 소모를 줄일 수 있었다.
더불어 전생에는 조정이 송시열의 문하들로 장악되어 있어 현종이 송시열과 서인들을 강하게 질책하며 송시열의 문하 일부를 조정에서 파직하면서도 이들 전체를 완전히 찍어내면 남인이 득세할 것을 우려해 일부만 파직하며 조정의 균형을 맞췄었다.
하지만 현재의 조정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북미왕국을 방문해 천하관이 바뀌고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으며 힘이 없으면 미대륙의 원주민들처럼 정복당하거나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처럼 노예로 팔려나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고위 관료들이 하나둘 영의정 정태화를 필두로 잦은 모임을 갖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면서 세를 키워나간 턱에 현종은 과감하게 송시열과 그 문하들을 파직해버리고 영의정 정태화를 필두로 한 최근 이들을 호칭하는 개화파와 남인들로 조정의 균형을 맞춘 것이다.
정성국은 전생과는 다른 이런 흐름을 파악하고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 현종도 그렇고 전생의 소론으로 추측되는 개화파들도 그렇고 윤휴를 통해 어느 정도 선이 닿아있는 남인들도 북미왕국에는 우호적인 만큼.
“나쁘지 않네. 대부분 북미왕국에 우호적이니만큼 지금처럼 꾸준히 조선 유민들을 이주시킬 수도 있겠고 상황을 봐서 몇몇 기술을 일부 전수해주는 것만으로도 조선이 스스로 발전할 수 있을 테니.”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정성국은 전생과는 무척 정력적으로 활동하는 정태화처럼 현종도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 지금의 상황이 유지되기를 기원했다.
* * *
“퇴청할 때쯤 듣기로는 전라도에서 장계가 올라왔다던데 맞습니까?”
정태화는 방금 사랑방에 들어온 우부승지에게 질문을 던지자 사랑방에서 대화를 나누던 다른 관리들이 급히 우부승지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져댔다.
“어? 그렇습니까? 뭐라고 올라온 겁니까?”
“정말 효과가 있는 겁니까?”
그런 관리들의 질문에 우부승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것이...죄인들을 두창이 도는 마을에 투입해 마을을 정리하게 했으나...죄인들은 두창에 걸리지 않았다는 장계가 올라왔습니다.”
우부승지의 대답에 사랑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탄성을 내질렀고 병조판서가 목소리를 높였다.
“허. 그건 북미왕국의 우두법이 실제로 두창에 효과가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맙소사...”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마마를 피할 수 있다니...이건 대체...”
3년 전 대기근 당시 조선을 도와준 북미왕국에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조선 사절단이 북미왕국을 방문했고 돌아올 때 두 권의 책을 받아왔다.
하나는 증기기관의 초기 설계도였고 또 하나는 북미왕국의 의학 서적이었는데 이 의학 서적에는 두창을 예방할 수 있는 우두법이 적혀 있었다.
다만 이 우두법은 두창이 하늘의 기운과 태중에 있을 때 어머니에게서 받은 나쁜 기운이 반응했을 때 생겨난다는 한의학의 관점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예방책이었다.
그렇기에 내의원들은 이 의학 서적을 연구하다 결국 이해를 포기하고 인체 실험을 하기로 했고 작년 가을쯤에 죄인에게 우두를 접종했다.
우두를 접종한 죄인들은 약한 몸살을 앓기는 했지만 금방 털고 일어났고 두창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수포 역시 접종한 부분에만 발생하고 떨어져 나갔기에 내의원들은 이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인가 생각하면서도 섣불리 무어라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올해 봄이 되면서 전라도에 두창이 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내의원에서는 이 죄인들을 두창이 돈다는 마을로 보낸 것이고 말이다.
헌데 이 죄인들이 두창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리는 북미왕국의 우두법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뜻과도 같았기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북미왕국의 의술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북미왕국이 건네준 의학 서적에 적혀 있는 우두법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면 다른 것들도 실제 효과가 있다는 뜻 아닙니까?”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정태화가 입을 열었다.
“음. 분명 북미왕국이 건네준 의학 서적에는 위생과 청결에 신경을 쓴다면 쉬이 전염병에 걸리지는 않는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그 때문에 북미왕국에서는 나라에서 목욕탕을 운영하지요.”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을 때 우부승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도 목욕탕을 매일같이 이용하신 후로 건강이 많이 좋아지셨지요.”
“그렇습니다. 전하께선 몸이 병약하고 피부가 좋지 않아 자주 고생하셨는데 목욕탕에서 매일같이 씻은 후로는 그러한 증상들이 호전되시지 않았습니까.”
3년 전 현종은 북미왕국을 방문한 유철의 이야기와 북미왕국이 전해 준 의학 서적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궁 한쪽에 자그마한 개인 목욕탕을 건설했다.
현종은 피부병과 그로 인한 부스럼이 심해 종기를 달고 살았으며 이 때문에 치료차 온천을 자주 이용했었기에 고위 신료들도 이를 반대하지는 않았고.
그 이후로 현종은 매일 저녁 목욕탕을 이용했고 신체 노출을 극도로 꺼렸던 유교적 관습 때문에 목욕할 때조차 옷을 다 벗지 못하고 목간통에만 들어갔던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유철이 이야기했던 북미왕국의 방식대로 옷을 모두 벗고 비누를 이용해 깨끗이 몸 전체를 닦았다.
처음에는 이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증상들이 완화되고 목욕을 통해 피로와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어렸을 때부터 몸이 병약한 편이었던 현종의 건강은 크게 나아졌다.
이러한 현종의 변화를 목도한 고위 관료들도 하나둘 자신의 집에 북미왕국의 목욕탕을 건설해 자주 목욕을 즐기기 시작했고.
그리고 이곳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목욕을 즐겼고 그 이후 건강이 확실히 나아졌기에 목욕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해서 병조참판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그런 만큼 조선에도 목욕탕을 건설한다면...”
이에 예조참판이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조선의 사정에서 북미왕국처럼 목욕탕을 운영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예조참판의 의견에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듯 중얼거렸다.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겠습니까? 북미왕국처럼 상수도 시설이 없으니 목욕탕에서 사용하는 물을 대기도 쉽지 않을 텐데요?”
“그거야 강물 일부를 끌어온다고 쳐도 겨울에 사용할 땔감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 물을 데울 수 있겠습니까?”
이에 공조참판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석탄을 사용하면 안 되겠습니까? 석탄을 사용하는 것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목욕탕의 운영은 나라에서 관리하는 만큼 잘만 사용하면...”
북미왕국 덕분에 조선에서도 석탄의 가치와 위험성을 파악하고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
해서 공조참판이 북미왕국처럼 석탄을 이용해 목욕탕의 물을 데우는 것이 어떻겠냐고 이야기했지만, 예조참판이 고개를 저었다.
“석탄을 캐서 조선 팔도에 수송하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문제지요. 석탄 소모량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공조참판이 무어라 이야기하려 할 때 누군가가 말했다.
“조선에도 철도가 깔려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이에 사랑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공조참판을 바라보았고 공조참판은 움찔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공조의 장인들이 증기기관을 열심히 연구하고는 있습니다만...솔직히 단기간에 기차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으음...”
몇몇 사람들은 아쉬워했지만, 북미왕국도 10년 넘게 연구한 끝에 만든 기차를 북미왕국보다 기술력도, 장인들의 수준도 떨어지는 조선에서 선뜻 만들어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은 유철이 공조참판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기차야 단순히 증기기관의 연구뿐만 아니라 금속 가공 기술 등이 필요하니 그렇다 치더라도...북미왕국처럼 증기기관을 배에 장착해 이용하는 것도 단기간에는 어려울 거라고 보십니까?”
“증기기관을 이용해 어떻게 배를 움직이는지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한 터라...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공조참판의 말에 유철은 아쉬워했고 그때 정태화가 입을 열었다.
“허허. 생각보다 기술 격차가 큰 모양이군요. 다만 공조의 장인들이 열심히 증기기관을 연구하고 있는 만큼 언젠간 성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공조의 장인들에게는 일단 시간을 주도록 하고...목욕탕을 건설해 운영하는 것 역시 조선의 사정에선 시기상조로 보이는 만큼 일단 보류하도록 하지요. 다만 우두법의 경우는 효과가 명백히 드러났으니 일단 모든 백성에게 우두법을 시행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 그렇지요. 일단 할 수 있는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정태화의 말처럼 당장 불가능한 일에 신경 쓰며 아쉬워하기보다는 당장 할 수 있는 우두법의 시행에 대해 논의하는 사랑방의 관리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우두법 시행을 논의하다 적당히 이를 마무리 지었을 때 정태화가 입을 열었다.
“예. 그럼 다음 조회 때 이 문제를 거론하도록 하고...이번에는 예판께서 사절단의 정사를 맡으셨지요?”
“그렇습니다. 이판께서 쓰신 북미왕국 견문록을 읽어보기도 하고 북미왕국을 다녀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북미왕국이 너무 궁금한 터라 떼를 좀 썼지요.”
“하하하.”
작년에 방문했던 사절단이 가져온 신문을 통해 조정 내 고위 관료들의 북미왕국에 관한 관심은 더욱 커졌고 이 때문에 이번 사절단의 정사와 부사 자리를 두고 자리싸움이 꽤 심했었다.
그리고 이 자리싸움에서의 승자는 바로 작년 겨울에 있었던 상복 문제로 송시열과 그 문하들이 파직되고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예조판서였던 유철이 이조판서로 승진하면서 예조판서 자리를 차지한 신임 예조판서였고.
“허면 이번에 북미왕국에 가셨을 때 북미왕국과 협상해 새한성 대학교에 입학하는 어의의 수를 늘렸으면 합니다만...”
“어의를요?”
신임 예판이 정태화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정태화가 설명했다.
“북미왕국의 의술이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가능하면 더 많은 어의를 북미왕국에 보내 북미왕국의 의술을 배우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신임 예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번에 북미왕국을 방문하면 북미왕국 외무청에 요청해보겠습니다.”
그러자 유철이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슬쩍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가신 김에 그동안의 신문들도 좀 구해오셨으면 합니다만...”
북미신문을 읽으면 북미왕국의 사정뿐만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기에 유철의 말에 사랑방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신임 예판을 바라보았고 신임 예판은 크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외무청에 요청해서 꼭 가져오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