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조용한 곰이 정성국에게 보고할 것이 있어 집무실에 찾아왔을 때 정성국은 티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정성국은 조용한 곰에게 손짓했고 조용한 곰은 의자에 앉아 티테이블 위의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납작한 검은색 판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뭡니까? 먹는 겁니까?”
왕실 숙수가 만든 납작한 초콜릿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은 웃으며 초콜릿을 잘라 조용한 곰에게 건네주었다.
“초콜릿이라는 건데 한번 먹어보게.”
조용한 곰은 조심스럽게 초콜릿을 입안에 넣었고 입안에 넣자 퍼지는 달콤함에 눈이 동그래졌다.
“어? 이거...무척 달군요?”
“그렇지. 설탕이 꽤 많이 들어갔거든. 덕분에 치아 건강엔 좋지 않지만...애들이 좋아할 맛이지.”
정성국도 초콜릿을 하나 입에 넣으며 설명했고 조용한 곰은 어느덧 사라진 초콜릿의 맛을 음미하다가 입을 열었다.
“애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좋아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체니 쉽게 상할 것 같지도 않으니 상품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긴 하지. 수분도 거의 없어 곰팡이 필 염려도 없고. 다만 대량 생산하기에는 카카오 수급이 좀 걸리는데...”
초콜릿을 하나 더 입에 가져간 조용한 곰이 정성국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 이거 카카오로 만든 겁니까?”
“그렇지. 카카오가 주원료일세.”
“그럼 유럽에서도 잘 팔리겠군요. 카카오야 에스파냐에서 수입하면 그만이고 유럽에 팔 때는 더 비싸게 팔면 되지 않겠습니까?”
멕시코 원주민들은 이 카카오 음료를 신이 내린 선물이라면서 음료나 약용으로 마셨고 이를 알게 된 유럽인들이 마셔보니 지독히도 쓰긴 했지만, 원주민들의 이야기대로 심신 회복에 좋았기에 일종의 커피라고 생각해 유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카카오의 효능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물론 각종 향신료를 넣어 마셨던 멕시코 원주민들과는 달리 유럽에선 쓴맛을 중화시키기 위해 설탕을 듬뿍 넣어 마셨고.
이러한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조용한 곰은 이 초콜릿이 유럽의 귀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지 않을까 싶어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애초에 정성국이 왕실 숙수에게 초콜릿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한 것은 군의 비상식량으로 쓰기 위함이었다.
크기에 비해 높은 열량과 피로 회복, 각성 효과가 있기에 전투에 도움이 되는 터라 전생에서도 전투 식량에 초콜릿이 포함되기도 했었고.
하지만 조용한 곰의 말대로 공방에서 대량으로 생산해 수출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해 이를 국영 상단에 맡겨야겠다고 생각할 때 조용한 곰이 잘라둔 초콜릿을 다 먹고 또 다른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윽. 이건...”
조용한 곰이 얼굴을 찌푸리자 정성국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건 설탕이 적게 들어간 초콜릿일세. 그 씁쓸한 맛이 바로 카카오의 맛이지.”
조용한 곰이 먹은 것은 군의 비상식량인 만큼 너무 달면 병사들이 입이 심심할 때마다 초콜릿을 까먹지는 않을까 싶어서 설탕의 함량을 최대한 낮춘 초콜릿이었다.
“으음...그렇군요. 하지만 이거 영...”
“그런가? 나는 이 초콜릿도 나쁘지 않던데.”
그러면서 정성국이 쓴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 맛을 음미하자 조용한 곰은 다시 쓴 초콜릿에 도전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구겼고 이에 정성국은 웃으면서 설탕이 듬뿍 들어간 초콜릿을 건네면서 조용한 곰이 자신을 찾은 용건을 물었다.
조용한 곰은 정성국이 건네준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보고를 시작했다.
“그래? 이번에 건설하는 미시시피 강 유역의 보급 기지에 외무청 관리를 대거 파견하기로 했다고?”
“그렇습니다. 미시시피 탐사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시시피 유역의 원주민들과는 말도 통할뿐더러 우리를 꽤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더군요.”
“그런 것 같더군.”
정성국이 조용한 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조용한 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또한, 발전 수준은 낮은 편이라 보급 기지가 건설되면 북미왕국의 물품을 구하기 위해 여러 원주민 부족들이 보급 기지를 방문할 것으로 예상하고요. 그런 만큼 외무청 관리를 대거 보내 이들을 북미왕국으로 합류시켜 빠르게 내륙으로 확장하고자 합니다.”
정성국의 예상과는 달리 외무청에서는 내륙에 진출한 김에 빠르게 북미왕국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모양새였기에 정성국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용한 곰을 보고 중얼거렸다.
“...적당히 하게. 적당히. 개발청도 행정청도 여유가 없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그리고 외무청에서도 인력이 부족한 편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에 조용한 곰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인력이 부족하면 단기 교육으로 빠르게 관리를 양성하면 그만입니다. 다른 청과는 달리 외무청은 가르칠 것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미시시피 강 인근에 보급 기지를 세우게 되면 자연스럽게 저희와 접촉한 원주민 부족들의 생활은 변화할 겁니다. 그러면 이런저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 미시시피 내륙의 개발이 당장은 어렵다 하더라도 일단 저희와 접촉하는 원주민 부족들은 최대한 빠르게 북미왕국에 합류시키는 것이 낫습니다.”
조용한 곰의 설명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 중얼거렸다.
“위네치 부족처럼 날뛸 수 있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새남포 인근의 위네치 부족도 북미왕국과 교류하며 철제 무기를 얻고 이를 모아 주변 부족을 정복하려 했기에 외무청에서 급히 개입해 위네치 부족과 주변 부족 모두를 북미왕국에 합류시킨 적이 있었다.
북미왕국에서는 북미 대륙 전체를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고 당연히 북미 대륙의 원주민들도 잠재적인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백성들끼리 싸우고 피를 흘리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북미왕국과 접촉한 원주민 부족들은 빠르게 북미왕국에 합류시키는 것이 낫다는 조용한 곰의 의견에 정성국은 내륙으로의 확장이 가속화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제2의 위네치 부족이 나타나는 것도 마땅치 않았기에 잠시 생각하다 결정을 내렸다.
“흠. 알겠네. 그럴 생각이라면 아예 이전처럼 풍부한 물자로 원주민들을 설득시키게. 어차피 새진주까지 철도도 개통되었고 계속해서 수송선을 추가 건조한 덕분에 수송선에 여유가 있다고 들었으니. 식량이야 넘쳐나고.”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겠다는 정성국의 대답에 조용한 곰은 활짝 웃었다.
“하하하. 그렇다면야 원주민들을 설득해 북미왕국으로 합류시키기가 더욱 쉽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전에 이야기한 그린란드는?”
이에 조용한 곰은 곧바로 대답했다.
“아. 당연히 그린란드에도 외무청 관리를 파견할 예정입니다. 전하께서 북미 대륙의 방어를 위해 그린란드를 북미왕국의 영토로 설정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관리청장에게도 전했고, 덕분에 대량의 물자를 얻어내 이미 새진주로 보냈으니까요. 그리고 이를 미끼로 북대서양 탐사대가 접촉했다는 그린란드 원주민 부족을 이른 시일 내에 북미왕국으로 합류시킬 생각입니다.”
풍부한 물자를 보여주고 북미왕국에 합류한다면 더 나은 조건으로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린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북미왕국으로의 합류를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하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조용한 곰이었다.
정성국이 생각하기에도 다른 지역보다 척박한 그린란드의 원주민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기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대하지.”
“다만...그것과는 별개로 일단 그린란드를 북미왕국의 영토로 선언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유럽에서도 그린란드의 존재를 안다는 것이 조금 걸립니다. 이전이었다면 척박한 그린란드를 굳이 탐내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으니까요. 그러니 그린란드의 원주민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일단 그린란드를 북미왕국의 영토로 선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알래스카 인근의 섬들처럼요.”
정성국은 어차피 유럽에서도 그린란드의 존재를 알면서도 지금까지 그린란드에 식민지를 세우지는 않았으니 당분간은 그렇지 않을까 싶었지만, 조용한 곰은 오히려 상황이 변했기에 그린란드를 식민지로 삼으려는 나라가 나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프랑스와의 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북미 대륙을 북미왕국의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현재는 북미 동해안 지역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지만,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판단하면 이 통제를 풀고 일반 상선들도 받아들이리라는 것은 다들 짐작하고 있었고, 그때가 되면 그린란드는 좋은 중간 거점이 될 수도 있었으니 미리 이를 확보하기 위해 나설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우려를 정성국에게 설명하자 정성국은 일리가 있다고 여기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리가 있군. 하지만 알래스카 인근의 섬들과는 상황이 좀 다르다고 보네. 유럽에서 존재 자체를 몰랐던 알래스카 섬들과는 달리 그린란드는 그 존재를 알고 있고 예전에는 이곳에 유럽인들이 이주하기도 했었지. 그런 만큼 우리가 갑자기 그린란드를 우리의 영토라고 선언하면 유럽의 각국은 반발할 수도 있을 테고.”
“그래 봐야 큰 불만을 표시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만...”
조용한 곰의 중얼거림에 정성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북미왕국의 국력에 자부심을 품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과해 타국을 무시한다면 언젠가는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당장이야 북미왕국의 해군이 강력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조용한 곰의 말처럼 섣불리 불만을 토로할 수야 없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저들도 북미왕국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인구가 적다는 북미왕국의 약점을 물고 늘어질 수도 있었고.
그런 만큼 북미 대륙을 온전히 확보한 이상 유럽의 각국과 너무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그렇겠지. 다만 우리의 국력이 강하다고 유럽의 각국을 완전히 무시할 수야 없는 법 아닌가. 특히 유럽의 각국이 우리 북미왕국을 호의적으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영토는 북미 대륙이면 만족한다는 우리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뉴펀들랜드 해전 이후 기존의 전열함으로는 북미왕국의 군함을 상대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돌면서 북미왕국의 영토 확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다만 그동안 북미왕국과 교류하며 북미왕국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한 에스파냐나 잉글랜드의 외교관들은 괜한 걱정이라고 일축하고 실제 전쟁을 치르고 북미왕국과 종전 협상을 마친 프랑스의 외교가에서도 북미왕국이 서인도제도의 진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안도하며 그러한 목소리가 사라졌고.
이를 웅크린 늑대에게 전해 들었던 조용한 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는 하지요.”
“헌데 갑자기 거대한 땅덩어리를 우리의 영토로 선언한다면 분명 반발이 있을 걸세.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저들이 일제히 동맹을 맺고 우리를 적대하면 골치 아프기도 하고. 그러니 저들이 우리의 주장을 섣불리 반발하지 못하도록 부드럽게 진행하도록 하자고.”
“예?”
“탐사대가 그린란드를 발견했다는 기사를 내게. 그리고 탐험한 결과 척박한 그린란드에도 원주민이 살고 있으며 그 원주민들이 바로 그린란드의 주인이라는 기사를 내도록 하지.”
정성국이 갑작스럽게 신문 기사를 언급하자 잠시 어리둥절했던 조용한 곰이었지만 이내 정성국의 의도를 눈치채고 중얼거렸다.
“아...일단 그린란드는 원주민의 땅이라고 알리자는 거군요. 그리고 북미왕국이 이 원주민들과 우호적으로 교류 중이라는 것을 알리면 섣불리 그린란드에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나라는 없을 테고요.”
어차피 신문이 새진주를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흘러 들어간다는 것은 조용한 곰도 알고 있었기에 정성국의 방책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정성국은 씩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지. 그리고 나중에 이 원주민들이 북미왕국으로의 합류를 원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린란드는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겠지.”
“확실히...그런 흐름이라면 유럽의 각국도 반발하지는 못하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지요. 아. 그리고 조만간 에스파냐, 네덜란드, 잉글랜드의 사절단이 새진주에 도착할 겁니다.”
“응? 잉글랜드?”
정성국이 알기로 이번에 새한성을 방문하는 사절단은 에스파냐, 네덜란드뿐이었는데 갑자기 잉글랜드가 추가되었기에 의문을 표시하자 조용한 곰이 설명했다.
“이번에 에스파냐, 네덜란드의 사절단이 새한성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메이카 총독부의 잉글랜드 외교관이 웅크린 늑대에게 찾아와 왜 자신들만 차별하냐면서 하소연을 했다더군요. 웅크린 늑대는 어차피 새한성을 개방하기로 한 터라 잉글랜드의 사절단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고요.”
이에 상황을 파악한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알겠네. 뭐 나로서야 따로따로 오는 것보다는 함께 오는 것이 더 낫지. 시간 절약도 되고. 잘 했네.”
“하옵고...”
“음?”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사절단의 새한성 방문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왕실 전용 기차를 보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만...”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었던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피식 웃었다.
“내가 반대라도 할까 봐? 괜한 걱정 하지 말고 가져다 쓰게. 전에 연구청장에게도 대충 이야기를 들었으니.”
“감사합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