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멕시코시티의 집무실에서 안토니오 부왕은 에스파냐 외교관의 보고를 듣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히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 정말로 북미왕국에서 사절단을 받아들이겠다고 한 건가?”
그동안 에스파냐가 나름대로 북미왕국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부실한 정보 외엔 없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고 외국인들은 철저히 외국인 거주 구역에 격리되어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나마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에 고용된 멕시코 원주민을 통해 정보를 습득할 수 있었기에 북미왕국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쓰는 잉글랜드나 다른 여타 국가들보다야 상황이 나았지만, 안토니오 부왕이나 본국에서 보기엔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최근 저들이 발행한 신문을 통해 북미왕국 내부 사정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몇몇 기사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라 제대로 된 북미왕국의 정보를 파악하려면 결국 외국인 거주 구역을 넘어 새한성을 방문해야 한다는 생각에 북미왕국을 방문하는 에스파냐 외교관에게 명령을 내렸지만, 딱히 기대는 하지 않았고.
헌데 예상과는 달리 사절단의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왔으니 안토니오 부왕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부왕 전하.”
“이전처럼 새진주의 외무청 관리에게 친서를 건네주는 형태가 아니라 북미왕국 국왕에게 직접 친서를 건네주겠다고 이야기했겠지?”
“그렇습니다. 분명 이를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승낙했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처음 웅크린 늑대는 저와 네덜란드 외교관의 요구에 난색을 보이며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고 후에 승낙하더군요. 저들의 기차를 생각해보면 새한성에서 허락이 떨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하하하. 그렇단 말이지?”
몇 번이고 확인한 안토니오 부왕이 에스파냐 외교관의 대답에 활짝 웃으면서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눈치이자 옆에 있던 보좌관이 무척 불안한 눈초리로 안토니오 부왕을 바라보았다.
“저...부왕 전하?”
“그럼 내가 직접 방문하는 것이 어떨까?”
안토니오 부왕이 북미왕국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직접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안토니오 부왕이 직접 움직일 뜻을 내비치자 보좌관은 경악해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부왕 전하!”
“위험할 것이 뭐가 있나? 북미왕국은 우리의 우방국이나 다름없는데.”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이 안토니오 부왕을 건드릴 이유는 없었다.
애당초 북미왕국은 북미 땅에만 관심을 둘 뿐이었지 멕시코 지역은 일절 관심을 두지 않기도 했고.
해서 보좌관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안토니오 부왕의 방문을 막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어...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시면...”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안잖나. 새진주에만 도착하면 그 기차라는 것을 타고 새한성까지는 금방 아닌가. 한 달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으음...”
이에 보좌관이 잠시 침묵하자 안토니오 부왕은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잠시 휴식을 취할 겸, 그리고 북미왕국과의 돈독한 우호를 위해 내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나을 듯싶은데?”
“북미왕국의 국력은 제 생각보다 더 대단한 만큼 북미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부왕 전하께서 직접 방문하시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보게!”
에스파냐 외교관의 대답에 보좌관은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에스파냐 외교관은 들은 채도 안 하고 계속 안토니오 부왕에게 말했다.
“다만 지금은 프랑스와의 전쟁 중이니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이 멕시코시티에서 중심을 잡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번 새한성의 방문은 부왕 전하의 친서를 직접 전달하겠다고 이야기했으니 제가 새한성을 방문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부왕 전하께서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에 북미왕국을 방문하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끙...”
손쉽게 생도맹그를 탈환하고 프랑스는 동쪽에서 조용히 있었기에 잊고 있었지만, 아직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전쟁 중이라는 것을 깨달은 안토니오 부왕은 정론을 이야기하는 에스파냐 외교관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지. 알겠네. 프랑스와의 전쟁이 마무리되면 그때 방문하도록 하지.”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부왕 전하.”
“그보다 전열함은 가져왔나?”
어차피 북미왕국 입장에서 프랑스 전열함은 선착장의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였고 에스파냐나 네덜란드가 감히 돈을 떼먹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계약금을 받지 않고도 반파된 전열함은 먼저 넘겨주었고, 이번에 전열함 구매 대금 일부를 주면 매사추세츠에 정박해 있는 온전한 전열함도 모두 내어주기로 했었다.
그렇기에 이를 묻자 에스파냐 외교관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에선 흔쾌히 내어주었고 8척의 전열함이 베라크루즈에 정박해 있습니다.”
“하하하. 이미 수리한 전열함까지 치면 15척의 전열함이 있으니 프랑스 놈들은 감히 덤비지 못하겠군.”
* * *
지금까지는 북미왕국의 정보가 유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했기에 제한적인 이주만 허용하며 어떻게든 북미왕국의 정보를 차단하는 데만 주력했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변해 북미왕국의 정보가 어느 정도 알려지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새한성을 개방하고 또 북미 동해안 발전을 위해 이주민까지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북미왕국의 발전을 위해 유럽의 인재를 초청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다 싶었다.
해서 정성국은 조용한 곰과 교육청장을 집무실로 불러 이에 관해 이야기했고 조용한 곰은 이를 듣고 중얼거렸다.
“음...새한성을 개방한 김에 유럽의 뛰어난 인재들을 초청하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연구를 지원해준다던가...아니면 대학교의 선생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괜찮을 테고.”
이미 유럽에는 수많은 대학이 존재했고 이곳에서 여러 인재를 키우고 있었다.
특히 북미왕국과 그동안 우호적으로 교류해 온 잉글랜드에는 그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이나 케임브릿지 대학이, 에스파냐에는 살라망카 대학, 바야돌리드 대학 등이 존재했으니 그곳의 교수들을 꾀어오는 것도 나쁠 것은 없어 보였고.
이에 교육청장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과학 기술 분야야 다른 나라보다 훨씬 앞서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분야는 조금...”
정성국이 과학 기술에 무척 관심을 둔다는 것은 북미왕국 백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북미왕국 백성들 역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탄생한 기차나 경운차를 비롯한 각종 기물을 접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이 자신들에게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북미왕국 백성들은 이 분야에 종사하는 연구원, 장인들을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뛰어난 인재들도 이러한 분야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북미왕국의 과학 기술 분야는 점차 더 빠르게 발전할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이와는 반대로 다른 분야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상당히 처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이러한 분야에 지원하는 인재도 처지는데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들도 썩 대단한 수준이 아니다 보니 발전은 요원했달까.
‘그나마 의학 분야 정도는 괜찮은데...나머지는 영 별로지. 특히 예술 분야는 뭐...어휴. 슬슬 이쪽도 신경 쓰긴 해야 하는데...’
정성국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개중엔 그저 구색을 갖추기 위해 신설한 학과들도 있으니 저들을 받아들여 교육의 질을 높이고 그런 빈약한 분야들의 발전을 꾀하자는 거지. 물론 언어적인 문제 때문에 곧바로 선생으로 임명하기는 좀 어렵지 싶은데...”
“뭐 똑똑한 사람들이니 금방 언어를 배우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따로 통역을 붙여도 되는 문제고요.”
교육청장이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슬쩍 조용한 곰을 쳐다보자 조용한 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뜩이나 관리들이 부족한 편이니 적당히만 빼가신다면야...”
“하하하. 괜한 걱정일세. 우리가 초청할 정도의 인물들이라면 분명 나름대로 기반이 있을 텐데 그런 기반을 버리고 북미왕국이라는 멀고 낯선 나라의 초청에 응할 인물이 몇이나 되겠는가.”
“으음...과연 그럴까요?”
정성국이 대소하며 그렇진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조용한 곰의 생각은 달랐다.
북미왕국을 궁금해하는 유럽인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지식인들이었기에 정성국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좋은 대우를 해주며 지식인들을 초청한다면 최소한 호기심에라도 일단 북미왕국의 초청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정 뭐하면 조건을 걸자고. 초청에 응한다면 최소 10년간 북미왕국에서 지내야 한다던가. 뭐 생각보다 후하게 대우해주는 만큼 그런 조건 정도는 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정성국이 조용한 곰의 반응을 보고 덧붙이자 교육청장이 이를 반겼다.
“그거 괜찮군요. 호기심에 잠깐 북미왕국을 방문했다가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보다야...”
“알겠습니다. 웅크린 늑대에게 전하도록 하지요.”
조용한 곰이 결국 수긍하자 정성국은 시선을 교육청장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교육청장.”
“예. 전하.”
“매사추세츠 지역에 하버드 대학교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예? 아. 그 하버드 칼리지 라는 곳 말입니까?”
처음 정성국이 대학교라고 언급해 잠시 어리둥절했던 교육청장은 이내 매사추세츠 지역에 있는 작은 교육 기관인 하버드 칼리지를 이야기한다는 것을 깨닫고 대답하자 옆에 있던 조용한 곰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네? 대학교가 있었습니까? 잉글랜드 식민지 시절에 건설한?”
조용한 곰의 질문에 교육청장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곳은 대학교라고 보기엔 조금...오히려 종교인을 양성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물론 교육청장의 말마따나 지금의 하버드는 뛰어난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 기관에 가깝긴 했다.
19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근대 연구 대학으로 변모하면서 전생의 하버드 대학교가 되는 만큼.
하지만 정성국은 전생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인지 하버드 대학교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 중얼거렸다.
“뭐 고등 교육을 통해 지식인을 양성하는 곳이니 어찌 보면 대학교와 같지 뭘 그러나.”
이에 교육청장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허허. 헌데 전하께서 하버드 칼리지의 이야기를 꺼내신 것을 보면 하버드 칼리지를 제도권으로 편입시킬 생각이신 겁니까? 그리고 종합 대학교로 만드실 생각이시고요?”
“그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 이 북미 대륙에 설립된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데 그냥 내버려 두기엔 좀 아쉽지 않나.”
정성국의 말처럼 교육청장도 그 때문에 하버드 칼리지를 제도권에 편입시킬까도 고민했지만, 문제가 있어 일단 두고 보고 있었기에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합니다만...잘못했다간 청교도 목사들이 불만을 터트리지 않겠습니까?”
엄밀히 말해 현재 하버드 칼리지는 교양 있고 지식수준이 높은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한 기관일 뿐이었다.
그러니 잘못 하면 북미 동해안 지역의 목사들이 반발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잘 협상해야겠지.”
정성국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교육청장은 조금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어찌 보면 하버드 칼리지는 학과가 하나만 있는 대학교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니 이걸 하나의 학과로 인정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이 학과를 졸업해야 목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면 목사들이 크게 반대할 것 같지는 않은데?”
“아! 기존의 교육 과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닌 인정해준다는 뜻이로군요? 전 당연히 기존의 교육 과정을 폐지하고 새한성 대학교와 비슷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그렇다면야 목사들도 크게 반대하진 않겠지요.”
교육청장은 정성국의 이야기에 감탄하며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조용한 곰은 조금 굳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허나 그러면 국가에서 목사를 양성하는 모양새가 됩니다만...”
“아. 그렇군요. 그럼 곤란하지 않습니까?”
교육청장이 조용한 곰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듯 수긍하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뭐 불교학과도 신설하고 이슬람학과도 신설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뭘 복잡하게 생각해?”
“허허허.”
“하하하.”
교육청장과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정성국은 진담이었다.
전생에도 목사가 되든, 신부가 되든, 승려가 되든 어느 정도의 지식은 필요했기에 이러한 학과가 존재했었으니까.
“뭐 이슬람학과야 당장 북미왕국 내에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없을 테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불교는 상황이 다르니...신백사의 주지 스님과 논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신백사는 새한성 인근에 지어진 최초의 사찰로 예전 원상이 조선의 백담사에서 승려들을 모셔오자 국가에서 지어준 사찰이었다.
그리고 사찰의 형태는 전형적인 동양의 건물이었기에 조선인들은 조선에 대한 추억 때문에, 원주민들은 생소한 건물의 모양에 흥미를 느끼며 방문하는 편이었고 그 때문에 새한성에선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정성국이 이 신백사의 승려를 정말 북미 동해안 지역으로 보내는 것까지 고려하자 교육청장은 웃음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그러다 다툼이 생기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정성국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종교인들이 다퉈봐야 총칼을 들고 다투겠나? 학문이나 교리 연구를 통해 다투겠지.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학문이 발전할 수도 있을 테고.”
정성국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교육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허면 일단 하버드 칼리지의 학장과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