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정성국은 자신의 집무실을 찾아온 박기동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보고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르셨습니까. 스승님.”
“앉거라.”
정성국은 오랜만에 얼굴을 본 박기동에게 커피를 건네주면서 근황을 물었다.
“요새 바쁘지?”
이에 박기동은 피곤한 기색으로 설탕을 듬뿍 커피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어느 분이 일거리를 왕창 넘겨 주셔서요.”
묘하게 투덜거리며 정성국을 빤히 바라보는 박기동이었고 찔리는 것이 많았던 정성국은 커피잔을 들어 올려 향을 즐기는 척하며 슬쩍 박기동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박기동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입을 열었다.
“헌데 그 어느 분이 다시 새로운 일거리를 떠넘길 것 같아서 무척 걱정스러운데 말입니다?”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어깨를 으쓱였다.
“글세? 그건 모르지. 그 어느 분이 일거리를 떠넘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정성국이 자신을 찾는다기에 또 다른 일거리를 넘겨줄 거라고 확신했던 박기동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단 너 터빈...아니. 회전기관에 관한 연구는 어느 정도까지 진행했니?”
“어? 갑자기 회전기관이요? 아. 발전기 때문에요?”
갑자기 회전기관을 거론하는 정성국의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던 박기동은 최근 신문을 통해 새한성뿐만 아니라 북미왕국 전역에 전기를 공급할 예정이라는 기사를 떠올리고 묻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력 발전소를 건설할 수 있는 입지는 꽤 제한되어 있고 먼 곳에서 전기를 송전하면 낭비가 심한 만큼 수력 발전을 이용하기 어려운 곳은 화력 발전이라도 이용해야 하는데 기존의 발전기는 증기기관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보니 효율이 낮거든. 해서 회전기관을 이용한 새로운 발전기를 개발해볼 생각이고.”
정성국이 만든 기존의 발전기는 증기기관을 사용했고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기 위해 중간에 피스톤을 이용해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했지만 증기 터빈을 사용하게 되면 이 과정이 사라지는 터라 조금이나마 에너지 손실이 줄어들어 효율이 향상하게 된다.
정성국이 처음 발전기를 만들었을 때야 개척촌 시절이라 장인들의 솜씨나 금속가공 기술이 높지 않았을 시기였고 이 발전기를 이용해 생산한 전기로 할 일이 많지 않았기에 그냥 내버려 두었지만, 이제 북미왕국은 본격적으로 전기를 이용할 예정이었고 수력 발전으로 생산한 전기만으로는 북미왕국 전역에 전기를 공급할 수는 없었기에 기존의 발전기를 개량해 새로운 발전기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은 정성국이었다.
이에 박기동은 왠지 불길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시제품을 만들어가며 연구하고 있긴 합니다만 아직 회전기관의 효율이 높다고 이야기하긴 힘들죠. 스승님께서 이야기해주신 남은 증기를 응축해 효율을 향상하는 방법을 연구 중입니다만...”
정성국은 박기동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래? 시제품을 만들었다고? 잘 돌아가?”
“예. 나름대로 잘 굴러가긴 해요.”
그러면서 박기동은 자신이 만든 회전기관의 시제품에 관해 설명을 시작했고 이를 듣고 박기동이 만든 회전기관이라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겠다고 판단한 정성국은 슬쩍 박기동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허면 그 자료를 지혜로운 나무에게도 넘기고 지혜로운 나무가 새로운 발전기를 개발하는데 도움을 좀 줬으면 좋겠는데?”
역시나 자신에게 일거리가 추가되자 박기동은 자신의 불길한 예상이 맞았다며 한숨을 내쉬면서도 전기를 만들어내는 발전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지 않았기에, 그리고 이번 일은 자신보단 지혜로운 나무를 보조해주는 격이라 일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끙...결국, 일거리를 넘겨주시는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 외에 또 다른 일거리는 없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너무 박기동에게 일을 많이 떠넘기는 것 같아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없으니 조금만 더 고생해라. 아. 헌데 이렇게 만난 김에 따로 보고할 건 없니?”
더 맡길 일은 없다는 정성국의 말에 박기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건설 장비를 생산할 새로운 공방이 거의 다 마무리되었다는 것은 아실 테고요...아. 그 파나마 운하에 배치할 갑문을 움직이는데 사용할 증기기관 있잖습니까. 그거 만들긴 했습니다.”
“그래?”
“예.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었습니다만 이 증기기관이 작동하는 모습을 보고 에스파냐인들이 이를 따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겉 부분을 다시 철판으로 둘러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박기동은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고 정성국은 이 설명을 다 듣고 중얼거렸다.
“허. 커다란 철 상자에 가깝겠네?”
증기기관과 피스톤을 전부 철 상자 안에 넣어두고 갑문을 움직이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동력을 전달하는 부분만 밖으로 빼낸 형태나 다름없었기에 이렇게 이야기하자 박기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앞에서 보면 석탄을 넣는 부분만 뚫려있는. 그러니 에스파냐인들은 우리의 증기기관을 통해 무언가를 얻기는 어려울 겁니다. 더불어 뜯어보려 해도 흔적은 확실히 남을 테니 쉽사리 이를 뜯어보려 하지도 못하겠지요.”
이에 정성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했다. 헌데 생각보다 빠르게 만들었네?”
“뭐 딱히 어려울 것 없으니까요. 아. 그리고 갑문을 움직이는 증기기관을 파나마 지역 원주민들에게 맡길 정도라면 예인선도 파나마 지역 원주민들에게 맡길 것 같아 예인선에 들어갈 증기기관도 비슷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에스파냐인들은 스스로 증기기관을 발전시켜나가야 할 겁니다.”
자신들이 고생해 발전시켜 나간 증기기관 기술을 손쉽게 넘겨줄 수는 없다는 의지가 보이는 박기동의 말에 정성국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 * *
보고서를 살피던 이정운은 오랜만에 자신의 집무실을 방문한 음흉한 여우를 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이정운이 2함대 소속으로 새진주에 머물렀을 무렵 웅크린 늑대의 주선으로 음흉한 여우와 안면을 텄고 그 후 이정운이 4함대를 맡으면서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올라온 후 음흉한 여우 역시 그보다 뒤늦게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올라왔기에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았다.
그리고 최근 정보기관의 일로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음흉한 여우가 다시 나타나자 이정운은 음흉한 여우와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요새 포로수용소의 분위기가 꽤 어수선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커피를 거의 다 마실 때쯤 음흉한 여우가 포로수용소를 언급하자 이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렇지. 슬슬 돌아갈 시기가 되다 보니 생각이 많은 모양이야.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려오고.”
“아직 프랑스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죠?”
이미 여름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꺾였는데도 불구하고 포로를 태울 프랑스의 배가 단 한 척도 북미왕국에 도착하지 않았기에 이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지금쯤이면 프랑스인들을 데려가기 위한 함대가 도착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배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아닐까요? 뉴펀들랜드 해전의 결과로 저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배가 확 줄어들었을 테니까요.”
그러면서 4함대를 직접 지휘해 뉴펀들랜드 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정운을 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음흉한 여우였다.
이에 이정운은 피식 웃고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네덜란드와의 전쟁 때문일 것으로 생각하네.”
“네덜란드와의 전쟁이요?”
“그렇지. 분명 뉴펀들랜드 해전의 결과로 해군은 줄어든 셈이지만...프랑스의 국력을 생각하면 상선은 꽤 많을 거야. 헌데 지금까지 소식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북미왕국조차 태평양에서 활동하는 배는 무척 많은 편이었다.
건국한 지 얼마 안 되는 북미왕국조차 그럴진대 프랑스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대서양에서 활동하는 배는 북미왕국에 비해 수십 배는 많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물론 포로수용소의 프랑스인들의 숫자가 숫자이니만큼 그들을 모두 태우려면 한두 척의 배로는 어림도 없었기에 어느 정도의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건 늦어도 너무 늦었다.
“아. 상선들로 함대를 구성해 보냈다가 네덜란드 해군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으니 이를 걱정한다는 겁니까?”
이정운의 설명에 음흉한 여우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이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니면 바로 상선을 일부라도 보내지 않았을까 싶은데...?”
“흠...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이정운의 이야기에 음흉한 여우가 잠시 생각에 잠기자 이정운은 커피잔을 들어 조금 남아있던 커피를 모두 마신 후 커피잔을 내려놓고 음흉한 여우에게 물었다.
“헌데 포로수용소의 이야기는 왜 꺼낸 건가?”
이에 정신을 차린 음흉한 여우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 참. 제가 이번에 아카디아 지역에 정보원을 구하러 다녀온 것은 아시죠?”
“그랬지.”
매사추세츠 지역에서 주로 잉글랜드인을 정보원을 모집하던 음흉한 여우는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하자 이번엔 프랑스인 정보원을 구하겠다면서 아카디아 지역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정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음흉한 여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정운을 바라보고 말했다.
“이번에 구한 프랑스인 정보원을 이용해서 포로수용소의 프랑스인들을 흔들어볼까 해서요.”
“음? 아...”
이정운은 음흉한 여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눈치채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성국이나 외무청이 포로수용소에 있는 프랑스인들을 잘 대우해 주는 이유가 예전 에스파냐 포로들처럼 프랑스로 되돌아간 후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북미왕국으로 이주해왔으면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정운도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음흉한 여우가 대외적으로는 호위대 소속이었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호위대의 업무가 아닌 정보를 수집하고 북미왕국의 이득을 위해 이런저런 소문을 흘리는 일을 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고.
그리고 최근 보고받은 포로수용소의 분위기를 고려해보면 음흉한 여우의 생각이 괜찮아 보였다.
분명 북미 동해안 지역이나 옛 누벨 프랑스 지역을 개발하려면 원주민들만으론 쉽지 않아 이주민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대놓고 외무청 관리가 포로수용소의 프랑스인들에게 이주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면서 이주를 종용하기에는 프랑스의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음흉한 여우의 방식이라면 괜찮아 보였다.
거기에 외무청 관리가 직접 북미왕국의 백성이 된 잉글랜드인들이나 프랑스인들이 잘 산다고 이야기하는 것보다 실제 북미왕국의 백성이 된 프랑스인이 직접 이게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저들을 설득하기도 쉬울 테고.
“그거 나쁘지는 않은 계획 같은데? 최근 외무청 관리들에게 북미왕국으로의 이주를 묻는 프랑스인들이 꽤 있거든.”
“호. 그렇습니까?”
음흉한 여우가 흥미를 보이자 이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포로들을 잘 대우해 준 결과이지. 단순한 포로에 불과한 자신들도 풍족하게 지내는 만큼 북미왕국 백성들은 최소한 자신들보다야 더 잘 살 거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돌아가면 가족들과 함께 북미왕국으로 이주해볼까 하는 거고.”
“모든 포로수용소가 다 그렇습니까?”
“그건 아니고 한 절반 정도일까?”
이에 음흉한 여우는 이미 이주에 흥미를 보이는 프랑스인이 많은 포로수용소와 아직 이주에 흥미를 보이지 않은 포로수용소 중 어느 곳으로 정보원을 보내야 하나 고민하다 전자는 저들이 외무청 관리를 통해 여러 정보를 접했을 거라는 생각에 결정을 내렸다.
“허면 프랑스인 정보원들을 아직 외무청 관리에게 이주에 관해 묻지 않은 포로수용소에 보내지요. 보급 물자를 운반하는 일꾼으로 위장해서 말입니다.”
이에 이정운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네. 허면 포로수용소의 병사들에게도 슬쩍 이야기해두겠네. 자네 정보원들이 적당히 농땡이를 피우면서 포로수용소의 프랑스인들과 대화하더라도 모른척하라고.”
“하하하. 예. 그래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