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루이 14세는 딱딱히 굳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보고하기 위해 다가오는 콜베르를 보고 좋은 일은 아니겠구나 싶어 일단 알현실에 있던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알현실에 루이 14세와 콜베르만 남게 되자 콜베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뭐라고?! 에스파냐가 생도맹그를?!”
콜베르의 보고를 확인한 루이 14세는 잔뜩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리고 생도맹그에는 제대로 된 방어 시설이 없기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고 결국 에스파냐가 손쉽게 점령했다고...”
“빌어먹을. 결국, 자네의 예상이 맞았군.”
콜베르는 프랑스 해군이 급감한 이상 잉글랜드나 에스파냐가 이 기회를 틈타 생도맹그를 공격할 수도 있으리라고 판단했었다.
그리고 콜베르의 예상대로 에스파냐가 생도맹그를 공격해 결국 손쉽게 생도맹그를 차지해버렸고.
이에 투덜거리자 콜베르가 덧붙였다.
“그리고 에스파냐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북미왕국에게 전열함을 사 간 나라는 아마 에스파냐가 아닌가 싶습니다.”
잔뜩 분노했던 루이 14세는 콜베르의 이야기에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잠시 생각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끙...그럼 생도맹그를 포기하라는 뜻인가?”
“당장 생도맹그를 탈환하긴 어려울 듯싶습니다.”
“젠장.”
데니스나 아브라함의 보고로는 북미왕국이 노획한 전열함 중 온전한 전열함만 17척이었고 이것만 에스파냐가 사들였다고 해도 가뜩이나 프랑스 해군이 반 토막 난 상황에서는 에스파냐 해군을 물리치고 생도맹그를 되찾긴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였다.
그렇기에 콜베르의 말처럼 생도맹그를 포기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것은 알지만 프랑스가 소유한 섬 중 가장 큰 면적을 자랑하는 생도맹그를, 그리고 그곳을 제대로 개발하면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이렇게 허무하게 내주는 것이 무척 아쉬웠던 루이 14세는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예 에스파냐와 대대적으로 전쟁을 벌여 협상을 통해 생도맹그를 되찾아볼까?’
하지만 최근 네덜란드와 종전 협상 중인 상황에서 다시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이면 필시 네덜란드는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종전하기 위해 협상을 질질 끌 수도 있다는 생각과 순간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북미왕국과의 전쟁을 결정했다 발생한 극심한 손해를 생각하니 이전처럼 쉽게 에스파냐와의 전쟁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해서 한참을 고민하던 루이 14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어쩔 수 없군. 당장 일을 크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에스파냐와 적당히 합의하도록 하게.”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국왕 폐하.”
루이 14세가 오판할까 걱정했던 콜베르는 루이 14세의 명령에 안도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해군 재건은 어떻게 되어가나?”
이렇게 허무하게 생도맹그를 잃어버린 것도 결국 프랑스 해군의 전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었기에 루이 14세가 질문하자 콜베르가 곧바로 대답했다.
“이미 조선소에 주문은 해둔 상태고 몇몇 조선소에서는 건조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만 이전 수준으로 해군을 재건하려면 못해도 5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전열함을 뚝딱 만들어낼 수야 없는 법이었지만 너무 긴 시간이 걸리자 다시 한숨을 내쉬는 루이 14세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순간의 판단 실수로 해군을 날려 먹은 것은 루이 14세 본인이었으니.
“끙...어쩔 수 없지. 그리고 포로들의 귀환 문제는? 아직도 배를 못 구한 건가?”
데니스가 돌아온 후 몇 달이 지났지만, 아직 포로들을 귀환시키기 위해 배를 보내지는 못한 상황이라 질문을 던지자 콜베르가 대답했다.
“거의 다 구했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와도 종전 협상이 곧 끝날 것 같으니 아마 조만간 북미왕국으로 선단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군. 알겠네.”
* * *
매사추세츠에 있는 한 포로수용소에서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 맥주잔에서 입을 떼며 말했다.
“크으. 일하고 씻고 나서 마시는 맥주는 꽤 각별한데?”
“뭐 그렇긴 해.”
커다란 덩치와 같은 식탁에 앉은 한 남성이 어느덧 포도주보다 맥주가 더 익숙해진 자신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자 커다란 덩치가 맥주잔을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그보다 슬슬 본국에서 배를 보낼 때가 되지 않았나?”
이에 근처에 앉아서 느긋하게 맥주를 즐기던 키가 작은 한 남성이 끼어들었다.
“에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원만 3만에 가까운데...그 많은 사람을 태울 배를 구하는 게 어디 쉽겠어? 내가 볼 땐 최소 3개월에서 반년은 더 기다려야 할걸?”
“그...런가?”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 고개를 갸웃하자 키 작은 남성이 그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이미 본국과 북미왕국은 포로 협상까지 마쳤으니 시기의 문제일 뿐이잖아. 뭐 가족과 여자가 그립긴 하지만 몇 달만 더 참으면 되고.”
그 말에 커다란 덩치의 남성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북미왕국과 프랑스가 협상을 끝내고 종전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만 해도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당장 타고 갈 배가 없기에 본국에서 그들을 태울 배를 보내기 전까지는 계속 이곳에서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자 포로들은 조금 낙담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 포로가 되어 기약도 없이 이곳에서 일하던 때와는 달리 조만간 본국으로 돌아갈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 키 작은 사내의 말대로 몇 달을 참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 한 평범한 얼굴의 사내가 맥주잔을 내려놓고 끼어들었다.
“그리고 조금 웃긴 말이긴 한데 난 돌아가면 이곳의 생활이 묘하게 그리울 것 같기도 해.”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은 다들 묘한 표정으로 이에 공감했다.
“그렇긴 하지. 다른 건 몰라도 가끔 나오는 설탕으로 만들었다는 그 과일 잼은 정말...절대 못 잊을걸?”
“암. 처음 갓 구워 따끈따끈한 하얀 밀빵에 과일 잼을 듬뿍 발라 먹었을 때는 정말이지...너무 맛있어서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
서인도제도의 기후가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유럽 강대국들이 서인도제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노예를 이용해 사탕수수를 재배해 설탕을 만들어내고는 있지만, 유럽에서도 아직 설탕은 왕과 귀족들이 향유하는 일종의 사치품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루이 14세가 왕궁 정원에서 기른 각종 이국적인 과일들도 만든 잼을 즐긴다는 것은 유명했고.
헌데 북미왕국에선 그런 과일 잼을 선뜻 포로에게 내어주었고 이때 처음으로 과일 잼을 맛본 병사들은 당연히 그 맛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 건장한 남성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앞에 있는 접시 위에 고기를 들며 말했다.
“일 끝나고 이렇게 먹는 고기와 맥주는 또 어떻고.”
“그럼 그럼.”
물론 프랑스가 다른 나라들보다야 부유했기에 프랑스 백성들의 삶도 다른 나라의 백성들보다야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일반 백성의 생활 수준은 거기서 거기였기에 이렇게 자주 고기를 먹기는 어려웠다.
그때 키 작은 남성이 입을 열었다.
“난 오히려 돌아갈 때가 걱정이야.”
“음?”
“이곳에서 지내며 식사의 즐거움을 깨달았는데 배를 타면 그 맛없고 딱딱한 쉽비스킷으로 배를 채워야 하잖아?”
이들은 이미 이곳에 오면서 쉽비스킷으로 배를 채웠었기에 그 끔찍한 맛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키 작은 남성의 말에 격하게 투덜대기 시작했다.
“맙소사. 그걸 생각 못 했네?”
“아오. 쉽비스킷을 생각하니 돌아가기 싫어지는데?”
“아니. 생각해보니 북미왕국 포로수용소에서도 받지 않았던 고문을 돌아가는 길에 받는다고? 이게 말이 돼?”
“젠장...생각만 해도 술맛 떨어지네.”
이들은 이미 이곳에서 지내면서 씻는 것에 대한 즐거움, 식사에 대한 즐거움 등을 알게 되었다.
헌데 배에 타면 이러한 즐거움을 더는 누리지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들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창 시끄러워졌다가 조금 분위기가 진정되자 키 작은 남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본국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이곳에서처럼 질 좋은 식사를 하기엔 어렵겠지.”
“그건...그렇지.”
“그래서 난 돌아가면 가족들을 설득해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생각이야.”
“뭐?!”
키 작은 남성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키 작은 남성은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고 당당히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놀란 눈으로 봐? 당연한 거 아니야? 이곳으로 이주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데? 그렇다고 이곳 일이 무척 힘들고 고되냐면...솔직히 그건 또 아니잖아?”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 질문을 던졌다.
“뭐 뱃일보다야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편하긴 하지. 하지만 이주할 수 있긴 해? 내가 알기로 북미왕국은 외국 선박들을 철저히 막는다고 한 것 같은데?”
처음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환호했던 포로들은 시간이 흐르고 본국에서 보낼 배를 기다리면서 점차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돌아간 후 가족들과 이주해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고.
하지만 북미왕국은 남쪽의 항구 하나를 제외하면 외국 선박이 드나드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게 가능하냐는 듯 묻자 키 작은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적인 외국 선박은 북미왕국의 해안가에 접근하지 못하게 북미왕국 해군이 막는 것은 맞지. 하지만 너희들도 봤잖아? 뉴펀들랜드 섬을 드나드는 어선들 말이야.”
“어?!”
“그러네?”
그들이 북미왕국 해군에 항복한 이후 뉴펀들랜드 섬에 잠시 정박했을 때 분명 뉴펀들랜드 섬에는 유럽에서 온 어선들이 꽤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러니 그 배를 타고 이주하면 되지 않겠어?”
이에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북미왕국에서 받아 줄까?”
그 질문에 주변 사람들의 관심은 집중되었고 키 작은 남성은 그런 시선을 즐기면서 씩 웃었다.
“그럼. 받아 준다고 하더라. 어제 외무청의 관리에게 물어봤지.”
그 대답에 주변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되묻기 시작했다.
“그래?”
“그게 정말이야?”
“거짓말 아니지?”
“그럼! 내가 너희들에게 굳이 거짓말할 필요가 있나.”
이에 주변 사람들은 다들 생각이 많아진 표정으로 술을 홀짝이거나 생각에 잠겼고 키 작은 남성은 그런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아. 다만 외무청 관리가 정말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생각이면 혼자 오지 말고 결혼하고 오라더라.”
“왜?”
“여자들이 많은 편이 아니라 혼자 오면 결혼하기 쉽지 않다고 하던데? 옛 잉글랜드 식민지 지역도 그 문제 때문에 골치라고 하더라고. 그나마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의 여성들이 이주하고 있긴 한데 그 수가 많은 편이 아니라고 그러더라.”
옛 잉글랜드 식민지뿐만 아니라 누벨 프랑스 지역도 상황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음...”
“이곳에 이주하면 이 광산에서 일하는 건가?”
누군가가 키 작은 남성에게 묻자 키 작은 남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선택사항이라고 하더라. 광산에서 일하고 싶으면 광산에서 일하는 거고. 그게 아니면 밭을 일구며 살아도 되는 거고.”
“땅이 없잖아?”
“북미왕국에서 땅을 내준다는데?”
“뭐?! 정말?!”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은 눈을 빛내며 키 작은 남성에게 앞다투어 질문을 던졌고 키 작은 남성은 외무청 관리에게 들었던 북미왕국의 정책을 알려주었다.
이를 듣고 커다란 덩치의 남성이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아. 땅의 소유는 국가에 있고 경작권만 주는 형태인가?”
“그렇지. 그리고 세금으로 40프로만 내면 끝이라고 하고.”
“40프로? 땅 크기를 생각하면 괜찮겠는데?”
“그러게.”
루이 14세의 등극 이후 전쟁이 잦아지면서 계속 이런저런 잡다한 명목으로 세금을 거두기 시작한 터라 40프로의 세금만 내면 끝이라는 북미왕국의 세금 정책이 무척 괜찮아 보이는 프랑스인들이었다.
“그래서 난 가족들까지 설득해 이주할 생각인 거고. 최근 세금이 많이 올랐잖아. 그래서 자영농인 우리 가족들의 생활도 이전에 비한다면 무척 빈곤해졌고. 그러니 땅을 팔아 그 돈으로 이주할 생각이야.”
“으음...”
키 작은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맥주를 홀짝이기 시작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맥주도, 고기도 내버려 둔 채 진지하게 이주를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