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다음날 정성국은 집무실을 찾아온 청장들을 보고 실소했다.
“생각보다 가로등이 인상적이긴 했나 보군. 날이 밝자마자 자네들이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니.”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행정청장은 어제의 광경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환한 빛이라니...”
행정청장의 중얼거림에 다른 청장들도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고 그중에 관리청장이 입을 열었다.
“헌데 연구청장의 말에 의하면 지금 빛을 밝히는 것에는 별다른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게 정말입니까?”
“일단 수력 발전으로 전기를 만드는 것은 별다른 비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맞네. 그저 물이 흐르는 힘으로 전기를 발생시켜 이용하니까. 다만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것 자체가 꽤 큰 비용이 들어가긴 하지만...”
“오오.”
정성국의 대답에 관리청장을 비롯해 몇몇 청장들은 감탄사를 토해냈다.
이들이 생각하기에는 전기도 일종의 자원이나 다름없었는데 수력발전소만 건설하면 별다른 비용 없이 계속해서 자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으니 무척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곳에 오면서 연구청장에게 여러 질문을 던져보니 이 전기라는 자원이 생각보다 다방면으로 쓰이기도 했기에.
이에 관리청장은 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럼 계속 탄광을 늘릴 필요는 없겠군요?”
“글세...그건 당분간 어려울걸?”
정성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자 관리청장은 연구청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 하지만 연구청장이 말하기를 석탄 대신 전기로 각종 기계를 돌릴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건 맞아. 다만 수력 발전은 한계가 있네. 댐을 세울 수 있는 지형마다 댐을 건설한다고 쳐도 북미왕국이 발전하면서 소모하는 전기를 모두 감당하긴 현실적으로 어려울 거야. 그러니 화력 발전도 해야 할 테고.”
정성국의 설명에 관리청장은 표정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화력 발전이라면...물이 아닌 불로 전기를 만드는 겁니까?”
“그렇지. 방식은 뭐 증기기관과 비슷하네. 그러니 거기에 석탄이 들어갈 테고.”
엄밀히 따지자면 화력 발전소에 꼭 석탄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물론 천연가스야 당장 이용할 방법이 없으니 논외로 치고 전생엔 석유보다 석탄이 싼 편이었기에 주로 석탄으로 화력 발전소를 돌렸지만, 지금은 어쩌면 석유를 이용해 화력 발전소를 돌리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었다.
당장 새나주에서 정제하는 석유 상당수는 북미 서해안 지역을 오가는 선박들과 새한성의 각종 공방의 증기기관을 돌리는 데 사용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성국은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훗날엔 석탄보다 석유의 소모량이 급격히 늘어날 것을 고려해보면 나오는 곳이 한정적인 석유를 마구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일단 그렇게 대답하자 관리청장은 탄식했다.
“아...”
그때 개발청장이 입을 열었다.
“그 말씀은 당장은 수력 발전만으로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뭐 그렇긴 하겠지.”
정성국이 수긍하자 개발청장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허면 지금이라도 북미왕국 전역에 댐을 건설해 전기를 생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개발청장의 의견에 다른 청장들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성국은 너무 급한 것이 아닌가 싶어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 전역에 댐을 건설한다라...북미왕국 전역에 전기를 공급하겠다는 뜻인가? 그건 너무 성급한 것 같은데? 기술자들도 충분히 키워야 하고...”
이에 행정청장이 끼어들었다.
“댐을 하루아침에 건설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기술자야 그사이에 키우면 되겠지요. 그리고 파나마 운하 건설이 시작되기 전에 북미왕국의 역량을 총동원해 몇 개의 댐을 건설해서 북미왕국 전역에 전기를 공급해 북미왕국 백성들이 전기의 혜택을 받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정성국은 최근 방문했던 새진주에서 만난 추장들을 떠올렸다.
추장들은 계속해서 부족원들이 도시로 떠나 부족이 사라지고 부족이 살아갔던 지역이 텅 비어버리는 것을 우려했었다.
그리고 그건 꼭 새진주 인근만의 문제는 아니었고.
헌데 정성국의 계획대로 천천히 시간을 두고 새한성부터 천천히 전기를 공급한다면 당연히 원주민들은 생활 환경이 더 나은 새한성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었다.
‘수도가 발전하고 인구가 몰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새한성 공화국으로 만들 수야 없지. 어쩔 수 없나?’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생각해보면 파나마 운하 건설에 들어가면 다른 곳에 대규모 공사를 벌이기도 쉽지 않을 테니 그 전에 댐을 건설하고 각 도시와 마을에 전기를 공급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지.”
그러자 청장들은 반색하며 어느 지역에다 댐을 건설해야 하는지, 그리고 몇 개나 건설해야 하는지 등을 논의했고 그 회의가 끝나자 청장들은 정성국에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하나둘 나가기 시작했다.
“전하.”
하지만 그런 청장들과는 반대로 조용한 곰은 정성국에게 다가왔고 정성국은 왠지 피곤해 보이는 조용한 곰의 얼굴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표정을 보니 어제 조선 사절단에게 꽤나 시달린 모양이네?”
그가 알기로 조선 사절단은 새한성에서 벌어지는 축제에 무척 관심을 가졌고 그렇기에 조용한 곰은 직접 조선 사절단의 정사와 부사를 안내하고 대접할 예정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렇게 말을 걸자 조용한 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그렇습니다. 잘 모른다고 이야기해도 어찌나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던지...그나마 오늘 이곳에 오기 전에 북미신문을 보니 전기에 관한 내용이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되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아니었다면 오늘도 시달렸겠지요.”
어제 가로등을 직접 목격한 백성들은 이 가로등을 무척 궁금해할 것이 뻔했기에 오늘 발행된 북미신문에는 가로등이 전기로 작동된다는 것부터 전기가 무엇인지 간략히 설명하는 각종 기사가 실려있었으니 이를 확인한다면 질문 세례는 벗어나지 않겠느냐는 조용한 곰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랬을 테지. 헌데 자네가 이렇게 남은 것은...”
정성국이 말을 흐리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께서 조선에 전기 기술을 넘겨주실 생각이신지 정확한 의중을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생각보다 정성국이 조선에 호의적인 편이라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조용한 곰이 질문을 던지자 정성국은 시기상조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 언젠간 조선에 발전소를 지어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당장 북미왕국 백성들이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이에 조용한 곰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흐음...허면 당장은 불가라는 입장을 선언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당장 여지를 줘봐야 좋을 것은 없을 테니.”
* * *
“정말...환하군요.”
조선 사절단이 묵는 숙소는 새한성의 대로변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기에 숙소에서도 창문을 통해 가로등을 볼 수 있었고 해가 지고 깜깜한 밤이 된 지금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가로등의 불빛에 정사가 마치 홀린 듯 가로등을 바라보자 옆에 있던 부사도 비슷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벌써 며칠째 해가 떨어지면 켜지는 가로등이었기에 슬슬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저 가로등은 볼 때마다 신기할 뿐이었다.
그건 북미왕국 백성들도 마찬가진지 가로등이 생긴 이후로는 저녁에 새한성 대로를 따라 산책하는 북미왕국 백성들도 많아졌고.
그때 정사가 가로등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곳에 와서 기차를 타고 경운차로 논밭을 개간하는 모습을 보고 북미왕국의 기술이 참으로 대단하다고는 여겼습니다만 번개를 이용해 빛을 만든다니 이건 정말이지...”
정사와 부사도 점등행사 이후 발행된 북미신문을 읽어보았기에 대략적인 정보는 파악할 수 있었고 알면 알수록 북미왕국의 기술은 조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부사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지 중얼거렸다.
“예. 터무니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영상 대감과 예조 판서 대감이 왜 사대부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장인들의 대우를 끌어올리기 위해 애쓰는지를 이해할 수밖에 없군요.”
“그렇지요. 이러한 기술 발전은 결국...조선 장인들의 몫일 테니까요.”
정사는 무척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원래 이곳의 원주민들은 제대로 된 기술조차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의 각종 신묘한 기계 장치들을 실제 만들고 개량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조선의 장인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뜻은 조선의 장인들이 조선에 남아있었다면 지금 북미왕국의 각종 기술은 조선의 기술일 수도 있다고 해석할 수 있었고.
이에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정태화와 유철은 이러한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
우연히 북미왕국으로 이주한 장인들이 모두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있어 북미왕국에 정착하고 나서 이러한 기술 발전을 이룩했다기보다는 조선과는 달리 장인들을 억압하는 양반들이 없기에 장인들이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만들고 연구한 덕분에 이러한 기술들이 발전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더불어 그들이 조선에 남아있었다면 과연 증기기관과 기차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느냐고 반문했고.
그리고 조정 대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정태화와 유철의 해석이 맞는 것 같았다.
저러한 북미왕국의 발전은 한두 명의 천재로 이루어졌다고 보기엔 어려웠으니까.
그렇기에 조선도 북미왕국처럼 발전하기 위해서 중인들, 최소한 장인들의 처우라도 어떻게든 올려야 한다는 주장에 내심 동조하는 편이었다.
“저는 조선도 조금은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영상 대감과 예조 판서 대감은 너무 조급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북미왕국을 직접 방문해보니 알겠더군요. 세상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느긋했을 뿐이라고.”
“예. 북미왕국의 발전을 조금이나마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영상 대감과 예조 판서 대감은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매번 조선 사절단에 새로운 인물들을 배정하는 것일 테지요. 그리고 영상 대감과 예조 판서 대감의 의도대로 사절단의 일원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고요.”
정사의 말에 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북미왕국을 방문할 때만 하더라도 잔뜩 들떠 북미왕국을 구경할 생각만 하던 사절단의 일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는데 잔뜩 웅크리고 발전 없이 유학에만 매달린다면 훗날엔 이곳 미 대륙의 원주민들처럼, 유럽인들에게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점령당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할 정도가 되었으니.
“그보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물론 저들이 쉽사리 전기 기술을 내어주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단칼에 잘라버릴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왠지 넋두리만 심해지는 것 같아 분위기를 바꿀 겸 부사가 투덜거리자 그 의도를 파악한 것인지 정사가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저들도 이제 막 개발한 기술을 아무리 특수한 관계라고는 하나 곧바로 넘겨줄 리가 있겠습니까.”
가로등을 확인하고 신문을 통해 이 가로등이 전기로 작동하며 전기가 무엇인지 대략 설명이 되어 있었기에 조선 사절단의 정사와 부사는 조용한 곰을 찾아가 북미왕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어 줄 테니 전기 기술을 내어줄 수 없겠느냐고, 그게 어렵다면 새한성의 빛으로 가득한 궁궐처럼 조선의 궁에도 이를 설치해줄 수 없겠느냐고, 비용은 자신들이 대겠다고 요청했지만 조용한 곰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이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아쉬울 수밖에 없었고.
정사는 자신의 말에 자신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부사를 보고 슬쩍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전수해주지 않겠습니까?”
이에 부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그럴까요?”
“최소한 북미왕국의 국왕은 우리 조선에 어느 정도 호의를 갖고 있으니 이를 믿어 봅시다.”
부사는 북미왕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젊은 북미왕국의 국왕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북미왕국 국왕을 파악할 수 있었고 북미왕국의 국왕은 자신의 뿌리가 조선에 있기 때문인지 조선에 호의적인 편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그래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