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정성국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눈이 피로한 것을 깨닫고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통해 만물이 생동하는 기운이 물씬 풍기는 궁 주변 정원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며 들어왔다.
정성국이 뒤를 바라보자 호위대장과 호위대원들이 각종 보고서를 왕창 들고 왔길래 정성국은 드디어 쾌속선이 도착했음을 짐작했다.
“전하. 개항장과 포로나이에서 온 보고서입니다.”
정성국의 예상대로 호위대장이 쾌속선에서 가져온 보고서임을 알리며 호위대원들에게 눈짓하자 호위대원들은 가져온 보고서를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올려두기 시작했고.
“드디어 쾌속선이 도착한 건가? 무슨 일이 있다던가? 평소보단 좀 늦게 도착한 느낌인데?”
물론 항상 비슷한 시기에 쾌속선이 도착하지는 않았다.
날씨에 따라 북방 항로가 빠르게 열리기도, 늦게 열리기도 했었으니.
하지만 이번엔 너무 늦어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했기에 묻자 호위대장이 답했다.
“아. 쾌속선의 함장이 보고하길 평소보다 기온이 쌀쌀해 4월 중순까지도 자잘한 유빙이 떠내려왔다고 하더군요. 해서 안전을 위해 북방 항로를 늦게 개방했다고 합니다.”
“허. 그래? 허면 포로나이에 별다른 피해는 없고?”
정성국은 혹시 모를 이상기후가 발생한 것인지 살짝 긴장했지만, 호위대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봄이 늦게 왔을 뿐이지 오히려 한겨울에는 평소보다 포근했다고 하니까요.”
“흠. 그렇다면 다행이고.”
정성국은 그 말에 안도하면서도 아직 지금 시기는 소빙하기라는 것과 이상기후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자각했다.
특히 조선의 경우는 경신 대기근이나 을병 대기근처럼 이상기후가 언제쯤 발생했는지 정도는 기록이 있기에 짐작할 수 있었지만, 북미 대륙의 경우는 제대로 된 역사 기록이 거의 없었기에 실제 이상기후가 발생했다 한들 정성국이 알지 못했다.
그러니 슬슬 체계적으로 기상을 관측하고 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 정성국이었다.
‘기상청...까지는 아니고. 기상 연구소를 만들고 북미왕국 곳곳에 기상관측소를 지어 기상 정보를 수집할 필요는 있겠네. 이건 연구청 소속으로 둬야 하나 아니면 행정청 소속으로 둬야 하나.’
정성국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보고서를 다 내려놓은 호위대원들은 생각에 잠긴 정성국을 방해할까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아. 미안하네.”
문득 정성국이 정신을 차리고 집무실을 확인하자 호위대장만 가만히 서 있었기에 정성국이 사과하자 호위대장은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슬쩍 미소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그보다 저 보고서 중 맨 위쪽의 보고서가 바로 원상의 대방이 보낸 조선의 동향을 적은 보고서라고 하니 먼저 살펴보시지요. 또한, 포로나이의 투로시노가 보낸 보고서도 있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호위대장이 가리킨 보고서 중 원상의 대방이 올린 보고서를 확인해 살펴보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변하지 않는군.”
“예?”
“아. 아닐세.”
정성국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호위대장을 보고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젓고 잠시 보고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원상의 대방이 보낸 보고서에는 최근 조선의 왕대비인 인선왕후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정성국이 기억하기로도 전생에 인선왕후는 1674년에 사망하는 만큼 크게 의외랄 것은 없긴 했다.
다만 최근 조선에서 원상과 북미왕국에 극히 호의적인 정태화나 유철의 경우 원래는 경신 대기근 당시 사망했던 인물들이었는데 정성국의 개입으로 이들의 생사가 바뀐 셈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생사도 뒤바뀐 것이 아닐까 싶었는데 전생처럼 인선왕후가 사망하자 정성국은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대비 인선왕후는 효종의 부인이자 현 조선의 국왕인 현종의 어머니인데 이 인선왕후보다 6살 어린 시어머니인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아직 살아있어 이 자의대비가 며느리 죽음을 두고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의 문제로 다시 예법 문제가 불거져 결국 2차 예송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물론 이 2차 예송논쟁 역시 겉으로는 상복을 얼마나 입는지에 대한 예법 문제나 다름없었지만 실제로는 전 국왕인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문제였고 이는 결국 현 국왕인 현종의 정통성을 약화하려는 송시열과 서인들의 수작이나 다름없었기에 현종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특히 1차 예송논쟁이 벌어졌던 당시에는 아직 현종이 갓 즉위했을뿐더러 제대로 된 경험도 없는 10대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현종도 30대의 원숙한 나이에 15년 가까이 국정을 운영해오며 쌓인 경험과 관록이 있었으니 말이다.
해서 현종은 송시열과 서인들을 강하게 질책하며 자신의 뜻대로 자의대비에게 기년복, 즉 1년 동안 상복을 입게 함으로써 효종의 정통성을 지키고 단기간에 2차 예송논쟁을 마무리 지었지만, 어머니의 죽음으로 한창 슬퍼할 시기에 눈물을 참아가며 서인들과 논쟁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인 덕분인지 가뜩이나 건강이 좋지 않던 현종은 예송논쟁을 끝내고 한 달 후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혈질에 냉혹하기로 소문난 숙종이 등극하게 되고.
그러니 정성국으로서는 인선왕후의 사망 소식이 달가울 리 없었다.
숙종과는 달리 현종은 온화한 성격에 북미왕국의 도움으로 경신 대기근 당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기에 북미왕국을 무척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더불어 현종은 큰아버지인 소현세자처럼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 기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기에 북미왕국의 등장 이후 북미왕국이 서양보다 훨씬 나은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조선도 북미왕국처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태화와 유철을 뒤에서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었고.
덕분에 최근 조선은 화폐를 발행하고 길을 정비하며 상인, 장인들의 처우를 조금이나마 개선해주려 하고 있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그런 조선의 변화가 기꺼울 수밖에 없었다.
허나 현종이 죽고 숙종이 등극하면 상황이 여러모로 바뀔 수밖에 없었으니 정성국으로서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다만 타국의 국왕이라 할 수 있는 정성국이 이 문제에 개입할 수야 없었기에 외무청을 통해 모친상을 당한 현종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는 친서나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보고서를 내려놓고 투로시노의 보고서를 집어 들고 신음을 흘렸다.
“으음. 청나라에서 반란이 벌어졌다라...”
“예. 쾌속선의 함장도 그 이야기를 하더군요.”
투로시노가 보낸 보고서에는 이번 반란의 경위와 북경의 분위기가 적혀 있었다.
평남왕이었던 상가희가 나이를 이유로 장남에게 평남왕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갈 뜻을 밝히자 강희제는 상가희의 귀향은 허용했지만 평남왕작의 세습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권을 강화하려고 열을 올리는 강희제로서는 더는 삼번을 유지하지 않을 뜻을 내비친 것이다.
이에 상가희는 섭섭해하면서도 청의 개국공신인 만큼 강희제의 뜻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두 번왕은 강희제의 뜻에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해서 오삼계와 경정충은 상가희를 따라 철번하겠다는 상소를 올리며 강희제를 떠보았고 강희제는 이를 받아들인다면 분명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걱정하는 신하들에게 이대로는 두 번을 유지하느라 막대한 재정이 소모되어 청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이유를 들며 두 번왕의 상소를 받아들여 번을 폐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당연히 오삼계는 이대로 모든 기반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기에 청나라가 멸망시킨 명나라의 복수와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1673년 11월 반란을 일으켰고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면서 무척 어수선하다고 적혀 있었다.
거기에 최근 운남, 귀주에 있던 오삼계가 군을 움직여 호남, 호북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호남을 장악했으며 사천에서도 오삼계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고 그때까지 침묵하던 정남왕 경정충마저 반란에 가담하며 복건에서 절강, 강소로 군대를 이동한 터라 강희제의 의도와는 달리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 상황이라 북경의 분위기는 무척 무거우며 당분간 생사 수입 물량은 대폭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는 투로시노의 추측도 쓰여 있었다.
정성국은 이미 이 삼번의 난에 개입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이 삼번의 난이 북미왕국과는 크게 상관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최근 도자기에 이어 무척 비싸게 유럽에 팔려나가는 북미왕국산 비단의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쯧. 생각보다 반란이 크게 일어난 탓에 생사 수입 물량이 당분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니. 요새 비단 판매로 꽤 짭짤하게 수입을 올리는 것으로 아는데 아쉽군.”
“아. 그렇긴 하지요. 허나 청나라의 국력을 생각해보면 곧 반란을 진압하지 않겠습니까?”
호위대장은 이 반란이 금방 진압되리라 판단한 듯싶었지만, 정성국이 기억하기로 이 삼번의 난은 1681년에 끝나는 것으로 아는 만큼 어깨를 으쓱했다.
“글세...워낙 반란의 규모가 크니 또 모르지.”
이에 호위대장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성국이 얼마 안 되는 정보로 정세를 예측하는 것은 무척 정확한 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호위대장이 느끼기엔 정성국은 이번 반란이 금방 진압되지 않고 오래가리라고 판단한 듯싶었기에.
해서 호위대장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전하께서는...이 반란이 오래갈 거라 여기시는군요? 허면 이 반란에 개입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큰일 날 소리. 타국에 내정엔 섣불리 개입하는 것이 아닐세. 조선이야 워낙 특수한 관계이니 그렇다 쳐도 청나라와는 별다른 접점도 없고. 청나라에 신경을 쏟느니 북미왕국의 발전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 나아.”
호위대장은 반란이 장기화되면 꽤 오랫동안 비단 생산에 차질을 빚을 것으로 생각해 북미왕국이 청나라를 조금이나마 도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한 듯싶었지만, 오삼계를 제외한 다른 두 번왕은 청나라 군대를 감당하지 못하고 얼마 가지 못해 항복하면서 반란은 오삼계가 장악한 운남, 귀주, 사천, 호남 지역에 국한된다.
그런 만큼 3, 4년 정도면 생사 수급은 정상화될 것이라 보았기에 정성국이 이렇게 이야기하자 호위대장은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성국은 호위대장을 통해 연구청장을 호출했고 연구청장이 집무실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기상 연구소를 새롭게 만들 것을 지시했다.
이에 연구청장은 갑작스러운 정성국의 지시에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고.
“기상 연구소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네. 기상 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지역에 기상관측소를 세워 북미왕국의 기상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할 생각이네.”
정성국이 혼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온도계를 비롯한 각종 측량 도구 대부분은 이미 만들어 둔 만큼 굳이 기상 연구소를 만드는 데 미적거릴 이유가 없어 보였다.
더불어 하루라도 빨리 기상 연구소를 창설하고 각지에 기상관측소를 건설해 기상 정보를 축적해야 이를 통해 기상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았고.
이에 연구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날씨는 농업과 어업에 무척 중요한 터라 지금까지는 농업 연구소와 어업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신경 쓰고 있었으니 이들 중 일부를 기상 연구소로 보내면 되겠군요.”
정성국은 그런 연구청장의 이야기에 화색을 했다.
생각해보니 한해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날씨였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는 어민들의 안전에 중요한 것이 바로 날씨였기에 농업, 어업 연구소에서는 이미 날씨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당장은 기상 관측을 하는 데 필요한 관측 도구가 많지도 않은 만큼 일단 각 지역에 세운 각종 연구소 분소들에 세 들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았고.
정성국이 이를 이야기하자 연구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다른 연구소는 몰라도 농업 연구소와 어업 연구소는 곳곳에 만들어둔 만큼 당장은 이곳의 빈방을 사용하면 되겠군요.”
“그렇지. 그리고 규격화된 측량 도구와 사용법, 관측 방법과 보고서 작성 요령 정도만 책으로 만들어 보내면 될 것 같고. 그 외엔 새한성의 기상 연구소에서 이렇게 축적된 기상 정보를 분석하고 연구하면 되겠군.”
정성국의 설명에 연구청장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음...관측까지야 어려울 것 없지만 이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부분은 쉽지 않겠군요. 아무래도 생소한 만큼.”
“그렇지. 하지만 북미왕국에서 연구하는 다른 학문도 사정은 다 비슷하지 않던가. 그러니 일단 날씨에 관심 많은 사람을 모집해 보게.”
본격적인 기상 연구는 19세기 크림 전쟁 당시 폭풍으로 군함을 잃어버린 프랑스가 기상 예보의 필요성을 느끼고 국가 차원에서 나서면서 발전하게 되는 만큼 기상학 역시 북미왕국에서 발전하는 다른 학문들처럼 북미왕국의 연구원들이 스스로 발전시켜 나가야 했다.
이런 정성국의 말에 연구청장은 정성국이 만든 교과서를 기반으로 수많은 학문이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슬쩍 웃었다.
“그건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날씨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연구를 진행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