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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49화 (349/850)

349화

정성국은 증기기관을 사용한 새로운 인쇄기를 개발했다는 보고를 듣자마자 곧바로 실물을 보기 위해 연구청으로 향했다.

“호오. 이게 새로 개발된 인쇄기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이 행차한다는 소식에 급히 마중 나온 연구청장이 대답하자 정성국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열심히 돌아가는 인쇄기를 바라보았다.

실물을 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름대로 근대식 인쇄기를 생각했던 정성국이었고 처음 인쇄기를 보았을 때도 적당한 크기로 잘린 종이를 한 장씩 사용하는 수동식 인쇄기와는 달리 마치 휴지처럼 돌돌 말린 기다란 종이를 사용했기에 전생의 윤전 인쇄기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잘 살펴보니 정성국의 기대와는 달리 기존의 수동식 인쇄기를 조금 발전시켜 증기기관을 이용해 동작하게 만든 것에 불과했다.

‘어떻게 보면 커다란 도장을 찍는 기계 같은 느낌이네. 기다란 종이 위에 일정 간격으로 촘촘히 찍는. 그래서인지 속도도 무척 느린 편이고. 뭐 그래도 기존의 수동식 인쇄기와는 달리 인쇄기 하나당 사람이 붙어있을 필요는 없어 보여 다행이긴 한가.’

수동식 인쇄기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무조건 사람 손이 필요했고 북미왕국에선 수많은 각종 책을 찍어내야 했기에 생각보다 많은 인력이 이 일에 묶여 있던 참이었다.

더불어 인쇄량을 폭발적으로 늘리기도 어려웠고.

허나 새로 개발된 이 인쇄기로 인해 이러한 제약이 어느 정도 풀린 셈이었으니 정성국은 옆에서 인쇄기를 보고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연구청장을 보고 말했다.

“괜찮네. 사람 손으로 일일이 작업하던 것을 증기기관으로 대체한 셈인가?”

“그렇습니다. 한번 가동하면 사람 손은 그리 필요 없지요.”

연구청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성국은 이 소식을 듣고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이거 하루에 얼마나 인쇄할 수 있나?”

“하루에 약 4500장 정도를 인쇄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인쇄기보다 3배 정도 많은 셈이지요.”

“흐음...”

생각보다 종이의 이동 속도가 느렸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존의 인쇄량에 3배에 달한다는 만족한 정성국은 인쇄기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시선에 들어오는 연구소 구석에 자리한 천을 씌운 거대한 무언가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 저건 뭔가?”

“아. 저것도 증기기관을 이용한 인쇄기 중 하나입니다만...아직 개발 중인 녀석입니다. 해서 저렇게 천을 씌워둔 거고요.”

연구청장의 말에도 정성국이 호기심을 보이자 연구청장은 주변 연구원들에게 눈짓했고 연구원들은 즉시 천을 치웠다.

“저건...”

“기존의 방식과 달리 인쇄판은 고정되어 있고 원통을 이용해 종이를 눌러 인쇄하는 방식입니다. 해서 아까 녀석보다 더 빠르게 인쇄할 수 있습니다만 생각보다 인쇄 품질이 별로라 이를 개선 중입니다.”

“허.”

정성국은 연구청장의 설명에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천에 가려져 있던 거대한 인쇄기는 정성국이 책에서나 보던 현대 인쇄기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쾨니히가 만든 증기식 실린더 인쇄기와 무척 비슷해 보였고 여기서 발전하면 결국 전생의 윤전 인쇄기가 만들어지는 셈이었기에.

“제가 예전에 전하께 인쇄기에 대한 보고를 올렸을 때 증기기관 방식을 사용하는 인쇄기를 연구 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바로 이 녀석입니다.”

“아. 그래?”

“예. 헌데 생각보다 개선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터라 제가 따로 이야기해 몇몇 연구원들이 당장 써먹을 만한 인쇄기를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아까 보신 인쇄기이고요. 물론 저 녀석보다 인쇄량은 적습니다만...”

이에 정성국은 연구청장의 결정을 칭찬했다.

“올바른 결정일세. 당장 찍어내야 할 인쇄물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는 판국이니. 자네도 알다시피 연구원들과 장인들은 특유의 장인 정신으로 최대한 완성도가 높은 물품을 만들기 위해 북미왕국의 사정을 애써 모른 척하는 만큼 이것처럼 자네나 연구청 관리들이 적당히 개입해야 하네.”

“그렇지요.”

정성국의 말에 연구청장은 뿌듯한 미소를, 그리고 주변의 연구원들과 장인들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슬쩍 고개를 숙였고 그런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한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인쇄기도 계속 연구해 개량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아까 본 인쇄기도 대량 생산하도록 하게. 최소한 수작업 방식의 인쇄기는 모두 교체할 수 있을 정도로.”

“알겠습니다.”

연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시선을 돌려 계속 움직이는 인쇄기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리고 한 20개 정도는 따로 빼두게.”

“예? 설마 저 새로 개발한 인쇄기도 조선에 넘기시려고요?”

연구청장의 지레짐작에 정성국은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따로 쓸 데가 있어서 그러네. 그리고 저걸 넘기려면 증기기관까지 넘겨야 하는데 그럴 수야 있나. 차라리 기존의 인쇄기를 넘기면 모를까. 헌데 그것도 어렵지 않나?”

기존의 인쇄기와 이번에 새로 개발된 인쇄기는 작동 방식이 수작업에서 증기기관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기존의 활자가 고정된 인쇄판은 동일했다.

그렇기에 만들어 둔 활자는 그대로 쓸 수 있다는 뜻이었고.

“예. 활자는 호환이 되는지라 활자 없이 인쇄기만 남을 겁니다.”

정성국은 예상대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냥 폐기하지 말고 잘 손질해서 보관해두게. 훗날 써먹을 데가 있을지도 모르니.”

정성국은 훗날 조선이 인쇄기를 추가로 요청하거나 혹은 원상을 통해 민간에 풀 생각으로 그렇게 이야기하자 연구청장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필요하면 활자야 만들면 그만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 * *

정성국은 연구청장에 돌아오자마자 정평국을 호출했고 정성국이 한참 업무를 보고 있을 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정평국이 들어왔다.

이에 정성국은 오랜만에 보는 정평국을 보고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 티테이블로 향했다.

정성국은 커피를 내리다가 예전과는 달리 묘하게 쌩쌩한 정평국을 보고 말했다.

“요새 얼굴 보기가 영 힘들다?”

“바쁘니까 그렇지요.”

이에 정성국은 콧방귀를 꼈다.

물론 정평국은 초기엔 맡은 일이 많아 결혼하고 나서도 제대로 집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었다.

하지만 원상에서 했던 대로 싹수가 보이는 인재들을 적당히 밀어주며 키운 결과 현재는 그가 맡은 업무 대부분을 간단한 보고서만으로 처리하고 있었고 덕분에 꽤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정성국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요새 퇴청시간이 되면 칼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뻔히 아는데 그런 소릴?”

하지만 정평국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하며 고개를 저었다.

“바쁩니다.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정평국은 약 작년에 쌍둥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는 시기상 정평국이 키운 인재들이 국영 상단의 사장이 되어 정평국의 업무를 줄여준 이후에 애가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정성국은 내심 반성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정평국이 쌍둥이를 거론하자 정성국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뭐 한창 이쁠 때긴 하지. 하지만 가끔은 조카들과 궁에 좀 들려. 나도 조카들 구경 좀 하게. 그리고 안문이와 나리도 귀여운 쌍둥이 사촌 동생들 보고 싶다고 칭얼대던데.”

나이 차이가 좀 나서 그런지 안문이도, 나리도 쌍둥이 조카 동생을 무척 귀여워하는 터라 그렇게 이야기하자 정평국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주 들르도록 하지요. 헌데 무슨 일로 절 부르신 겁니까? 형님께서 절 부르신 것 보면 또 일거리를 왕창 떠넘기실 작정이신 것 같은데?”

정성국이 자신을 공적으로 불렀다는 뜻이 무슨 의미인지를 아는 정평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를 묻자 정성국은 왠지 조카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번에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새로운 인쇄기가 개발되었거든? 해서 슬슬 신문을 만들어볼까 하고.”

정성국의 말에 정평국은 잠시 기억을 되짚어보고 중얼거렸다.

“신문이라...전에 형님께서 설명해주신 일종의 소식지 말씀이지요?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정성국은 예전 개척촌 시절 신문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고 정평국이 아직도 이를 기억하고 있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뭐 인쇄기가 개발된 이후로 곧바로 이를 발행하고 싶었지만, 당시에는 신문보다 교과서를 찍어내는 것이 우선이라 일단 미뤄뒀었지. 헌데 이젠 새진주까지 철도가 뚫리기도 했고 새로운 인쇄기의 개발로 더 많은 인쇄물을 찍어낼 수 있으니 슬슬 신문을 발행할 때가 된 것 같아.”

이미 최초의 주간 신문은 1609년 독일에서 발간되었고 1660년에 최초의 일간지도 독일에서 탄생한 만큼 새로운 인쇄기가 개발된 김에 그동안 미뤄두었던 신문을 발행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정성국이었다.

그 때문에 연구청장에게 인쇄기 일부를 따로 빼두라고 지시한 것이고.

“허. 새한성 인근뿐만 아니라 새진주까지 신문을 배포하실 생각이십니까?”

정평국은 처음부터 일을 키우는 정성국의 발언에 조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정성국은 정평국의 말에 피식 웃고 입을 열었다.

“새진주? 북미왕국 전역에 배포할 생각인데? 기차뿐만 아니라 배로도 운송해서 북미 동해안 지역부터 저 아이누 섬까지 보낼 생각이야.”

역시나 엄청난 일거리를 떠넘기는 자신의 형님을 질린 듯 바라보던 정평국은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형님. 그렇게 되면 북미왕국의 정보가 타국으로 흘러 들어갈 텐데요?”

정성국이 그동안 정보를 관리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다는 것과 이 때문에 정보기관까지 설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정평국이 의아한 듯 질문을 던지자 정성국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북미 대륙에 존재했던 유럽 세력은 모두 물러난 상황이고 특히 최근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쟁 결과를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의 정보가 어느 정도 알려진다 한들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루이 14세 등극 이후 프랑스 해군은 규모를 키워 유럽에서도 프랑스 해군을 대적할 나라는 몇 없었는데 그런 프랑스 해군이 허무하게 북미왕국 해군에 깨져버리자 유럽인들은 무척 경악하고 있었고 이러한 사실을 최근 외무청을 통해 북미왕국 고위 관리들은 다들 알고 있었기에 정평국은 북미왕국의 정보가 어느 정도 알려져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는 형 정성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리고 언제까지 새한성을 방문하고자 하는 유럽의 외교관들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조만간 이를 풀어줄 생각인데 그렇게 되면 저들도 북미왕국의 정보를 어느 정도는 파악하게 될걸? 그러니 정보 유출이 무섭다고 신문을 새한성 인근에만 배포하기보다는 북미왕국 전체에 배포하는 것이 나아. 특히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수도의 소식을 접하기 어려운 만큼 말이지.”

교육과 함께 근대 사회와 문화 발전에 이바지한 것이 바로 언론, 즉 신문이었고 신문을 통해 백성을 계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정성국은 이 기회에 북미왕국 전역에 신문을 배포할 뜻을 밝혔다.

특히 계속해서 학교에 다니며 이런저런 지식을 배우는 아이들과는 달리 어른들의 경우는 기껏해야 기본 교육을 받고 북미왕국의 말과 글을 배우는 정도에 불과했기에 신문을 통해 나라 안팎의 사정을 알려 이들에게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려주고 싶기도 했고 이를 통해 북미왕국이 한층 더 발전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성국의 설명에 정평국은 조금 우려스럽긴 했지만, 정성국은 이미 결정을 내린 듯 보였기에 별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허면 새한성에 신문사와 인쇄소를 차리고 신문을 인쇄해 배포해야 할까요?”

“일단은 새한성에서 신문을 인쇄해 각지로 배포하는 형태로 가고 나중에는 원본을 받아 각지에서 인쇄하는 방식으로 가야겠지. 그리고 당장은 신문에 실을 기사를 채우기도 쉽지 않을 테니 일단은 매주 발행하고 신문사의 규모가 커지고 곳곳에 지사를 마련해 정보 수집이 원활해지면 그때 매일 발행하는 것으로 하자고.”

그러면서 정성국은 일단은 신문의 내용을 채우기 위한 기사를 작성할 기자들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상기시키자 정평국은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신문사의 규모가 엄청 크겠는데요?”

“뭐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에 정평국은 예전 정성국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헌데 전에 형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수많은 신문사가 생겨날 거라고? 그게 가능할까요? 생각보다 엄청난 비용이 들어갈 것 같은데?”

그렇기에 정성국은 처음에 중심을 잡아 줄 국영 신문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었지만 정평국이 볼 때는 막대한 초기 투자가 필요한 신문사가 과연 우후죽순처럼 생길까 싶어 묻자 정성국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연히 보조금을 줘야지. 그리고 이번에 차릴 신문사야 북미왕국 전 지역을 대상으로 배포할 예정이니 규모가 큰 거고.”

“아. 전 지역이 아닌 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신문도 존재할 수 있겠군요?”

발행 범위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규모를 줄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정평국이 말하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특히 북미왕국은 워낙 땅덩이가 넓은 터라 수많은 소식을 수집할 테지만 이를 다 기사화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이런 지방 신문사와 계약을 맺어 수집한 소식과 정보를 넘길 수도 있겠지.”

“알겠습니다. 일단 국영 신문사를 창설하고 형님께서 말씀하신 기자를 모집하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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