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봄바람이 불어오는 3월 말.
정성국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급하게 집무실을 들어오는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전하. 웅크린 늑대가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아. 프랑스와의 협상이 끝났나 보군?”
정성국이 가족들과 새나주를 방문한 후 다시 궁으로 돌아왔을 때 새진주에 프랑스의 특사가 도착했다는 것과 협상에 들어간다는 보고가 올라왔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쯤이면 협상이 끝났을 것 같아 묻자 조용한 곰은 정성국을 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습니다. 프랑스가 누벨 프랑스를 포기함에 따라 이제 공식적으로 북미 대륙은 온전히 북미왕국의 것이 된 셈입니다. 경하드립니다. 전하.”
“허. 드디어.”
어차피 누벨 프랑스를 되찾으려 보냈던 대규모 함대가 4함대에 박살 난 이상 프랑스가 북미 대륙의 모든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결과는 정해져 있긴 했다.
다만 프랑스의 특사가 조약문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북미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유럽 국가들이 모두 철수해 결국 북미 대륙엔 유럽 세력이 사라진 셈이었기에 정성국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애당초 정성국은 자신이 죽기 전까지 유럽 세력을 북미 대륙에서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결국 이것을 달성한 셈이었으니.
특히 정성국이 처음 북미 대륙에 발을 디디고 북미왕국을 건설할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단기간에 북미 대륙에 진출한 유럽 세력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다.
신생국 북미왕국과 이 미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의 국력을 지닌 유럽 국가와의 격차는 생각보다 컸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내심 최선은 애팔래치아 산맥을 경계로, 최악은 미시시피 강을 경계로 유럽 세력의 확장을 막으면서 북미왕국을 천천히 발전시키며 복잡한 유럽 정세에 맞춰 기회를 엿볼 생각이었고.
이는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역사가 어느 정도 바뀐다 하더라도 루이 14세의 야심을 생각하면 유럽에서의 대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 정성국은 자신이 죽기 전쯤엔 충분히 이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헌데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유럽 국가들이 북미왕국의 국력을 높게 평가하기 시작했고 잉글랜드는 북미왕국과 맞서기보다는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려 들면서 예상보다 빠른 시기에 북미 동해안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다시 없을 기회라고 생각한 정성국은 무리하면서까지 병력을 확장해 배치했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이른 시기에 프랑스마저 북미 대륙에서 내쫓을 수 있게 되어 앞으로 이 북미 대륙의 역사와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미래는 전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리라 생각되었으니 정성국은 벅찬 감동과 안도,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기대감 등이 섞인 묘한 감흥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정성국의 그런 반응에 조용한 곰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정성국은 자신이 너무 과했나 싶어 감정을 추스르고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 괜찮네. 그냥 북미왕국을 세우고 처음으로 목표했던 결과를 달성하니 뭔가 감회가 새로워서 말이지. 그보다 그게 웅크린 늑대가 보낸 보고서인가? 줘보게.”
그제야 정성국이 왜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이해한 조용한 곰은 잔잔하게 웃으며 가져온 보고서를 건넸고 정성국은 종전조약문과 보고서를 빠르게 훑으면서 중얼거렸다.
“흠...토르투가 섬과 생크루아 섬이라...”
“프랑스를 압박해 섬 한두 개는 더 얻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고 합니다만...문제는 서인도제도에서 살던 원주민들의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어 섣불리 받아봐야 이를 관리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더 커질 것을 우려해 그나마 위치가 괜찮은 토르투가 섬과 생크루아 섬을 받아냈다는군요.”
프랑스 소유의 서인도제도 중에 원주민들이 많은 섬이 있다면 그 섬을 추가로 얻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지만 이미 유럽인들과 접촉한 원주민들은 각종 질병에 의해, 그리고 유럽인의 횡포와 착취 때문에 인구수가 급격히 줄어든 이후였다.
완전히 멸족해 무인도가 된 섬이나 원주민이 전혀 없는 섬도 많았고.
그렇기에 현 서인도제도는 원주민들보다 흑인 노예들이 더 많은 실정이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정성국은 괜히 웅크린 늑대가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에 만족하며 말했다.
“현명한 선택이야. 웅크린 늑대가 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셈이고.”
“그렇습니까?”
조용한 곰 역시 너무 많은 섬을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저 두 섬을 결정한 웅크린 늑대의 결정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히 토르투가 섬은 무척 작은 섬이라 굳이 받아올 이유가 있나 싶었고.
그렇게 조금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조용한 곰을 보고 정성국은 청장들에게는 에스파냐와의 협상이 끝나면 이야기할 생각이었던 파나마 운하에 대해 언급했고 처음 이를 듣고 조용한 곰은 무척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허. 파나마 운하라...그래서 웅크린 늑대가 이 두 섬을 선택한 거군요. 훗날을 생각해서.”
“그렇지.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2함대가 토르투가 섬을 공격했기에 이곳의 주민들은 우리에게 적대적일 것 같다는 건데...”
토르투가는 해적들의 근거지나 다름없었기에 2함대가 생도맹그를 공격하는 김에 토르투가 역시 철저하게 해안가를 공격해 초토화한 만큼 토르투가의 주민들은 북미왕국에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이 컸다.
해외 군사기지의 경우 현지 세력과 적대적인 관계라면 장기적으로는 결코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는 정성국이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 웅크린 늑대가 외무청으로 보낸 이 섬들의 상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토르투가 섬의 주민들은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대부분이 뜨내기들이라 3개월의 유예기간 동안 태반은 다른 섬으로 이동할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문제는 크게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서인도제도의 인구는 무척 적은 편이었고 그런 만큼 프랑스는 북미왕국에 넘겨 준 토르투가 섬과 생크루아 섬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다른 자국의 섬으로 이동시키려 들었다.
웅크린 늑대로서는 어차피 두 섬 모두 원주민은 거의 없었기에 북미왕국이 섬을 장악하고 개발하기 위해서라도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에 이에 동의했고 결국 3개월 후에 북미왕국의 해군을 이동시킬 테니 그 전에 사람들을 이동시키라고 유예기간을 주었고.
정성국은 그러한 설명에 안도하며 중얼거렸다.
“아. 그래? 그럼 다행이긴 한데...그렇다면 거의 무인도가 될 테니 섬을 개발하는 것이 문제가 되겠군.”
이에 조용한 곰은 묘한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토르투가 섬뿐만 아니라 생크루아 섬도 비슷한 상황이고요. 그리고 인구가 부족한 본토에서 이주민을 보낼 수야 없으니 방법은 하나뿐이지요.”
“쩝...또 노예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정성국은 노예를 사들이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지만 현 상황에서 노예를 사들여 해방하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도 없었고 어차피 캐롤라이나 지역의 인구 증가를 위해 성비를 맞춰 노예를 사들여 해방하고 있었기에 입을 열었다.
“그럼 개발청장과 이야기해서 두 섬의 개발 준비가 끝나면 캐롤라이나 지역으로 보내던 노예들을 토르투가 섬과 생크루아 섬으로 보내면 되겠군.”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당장은 두 섬을 개발할 물자를 보내기도 벅찰 테니까요.”
북미 동해안의 물자 부족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아직 물가가 안정되진 않았기에 당장 이 두 섬의 개발에 착수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는 것을 아는 조용한 곰이 맞장구치자 정성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당장은 그저...2함대 일부를 그나마 가까운 투르투가 섬으로 보내서 주변 해역에서 설치는 해적들을 잡는 것으로 만족해야겠어. 당분간 보급이야 에스파냐의 항구를 이용하면 될 테고.”
이에 조용한 곰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2함대 사령관이 무척 기뻐하겠군요.”
“그럴 테지.”
정성국도 김봉길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 보고서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웅크린 늑대가 프랑스 특사를 잘 설득한 덕분에 최소 반년은 더 프랑스 포로들을 광산에 처박아둘 수 있게 되었군.”
“그렇습니다. 이미 4함대에 건설한 석탄저장고는 추가로 증축 중이고 그 외에도 북미 동해안 곳곳에 석탄저장고를 증축해 옮기는 중이라고 들었는데...이 추세라면 다시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서양에서 활동하는 북미왕국의 배는 모두 기선이었기에 석탄은 필수였다.
그렇기에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에 진출한 이후 곳곳에 석탄저장고를 세우고 높은 일당을 주며 탄광에서 일할 사람들을 모집하기도 했고.
하지만 농업연구소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농사를 짓기만 해도 먹고 사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기에 탄광에서 일하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더불어 정성국은 광부의 건강을 위해 마스크를 강제한 덕분에 탄광에서 일하는 것이 더욱 힘들었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석탄저장고에는 석탄이 거의 없어 간신히 배에 연료를 보급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누벨 프랑스에서 데려온 프랑스인 포로들과 누벨 프랑스를 향해 이동하다 분함대에 붙잡힌 포로가 석탄을 캐기 시작하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졌고 4함대가 프랑스 함대의 항복을 받아내며 3만에 가까운 포로를 확보하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매사추세츠 지역 곳곳에 건설된 석탄저장고에는 석탄이 넘쳐나기 시작했고 이를 감당하지 못해 급히 석탄저장고를 추가로 증축하면서 4함대를 동원해 북미 동해안 곳곳에 건설된 텅 빈 석탄저장고에 석탄을 수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미 동해안 곳곳에 건설된 석탄저장고마저 거의 찬 상황이라 추가로 확장해야 할 처지였고.
이러한 조용한 곰의 보고에 정성국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이 기회에 왕창 비축해둬야지. 점점 북미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하는 선박들이 많아질 테니.”
“다만 웅크린 늑대가 굳이 석탄 가격을 더 쳐주겠다고 한 부분이 이해가 가지 않던데...혹시 전하께서 언질을 주셨습니까?”
조용한 곰이 보기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포로수용소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프랑스 포로들은 북미왕국이 노동의 대가를 정확하게 계산해준다며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더 대우해줄 필요가 있는가 싶었던 것이다.
이에 정성국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내가 그러라고 명령했지. 일단 저들도 이젠 포로가 아니란 것을 알 테니 조금이나마 더 대우해줘야 불만을 누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저들을 잘 대우해줘서 에스파냐인들처럼 가족들과 다시 되돌아오는 것을 노리고 말이야. 더불어 저들이 프랑스로 복귀함으로써 북미왕국의 물가가 싸서 살기 좋다는 것이 프랑스 내에도 알려질 테니 훗날 우리가 문을 연다면 북미왕국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예전 북미왕국에 포로가 되었던 에스파냐 선원들도 북미왕국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북미왕국의 백성들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를 깨닫고 이곳에서 살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결국 포로 협상을 통해 누에바 에스파냐로 돌아갔다가 가족, 친구들과 함께 북미왕국으로 아예 이민했다.
그 수는 생각보다 많았고.
그런 만큼 정성국은 이번 프랑스 포로들을 잘 대우해주어 에스파냐인들처럼 다시 북미왕국으로 돌아오게 만들 생각이었다.
‘프랑스의 병사로 살아가는 것보다 탄광에서 일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일부는 분명 가족들과 함께 북미왕국으로 돌아올 거야. 더도 말고 딱 1만 명 정도만 이주해오면 이들을 퀘벡과 몬트리올 주변에 정착시켜 누벨 프랑스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을 테고.’
정성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뜻을 파악하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이해했습니다. 허면 포로수용소의 포로들과 주로 이야기를 나누는 외무청 관리들에게 북미왕국의 백성이 되어 잘 사는 잉글랜드인들과 최근 북미왕국에 합류한 후 생활 환경이 나아진 아카디아 주민들의 이야기를 흘려 저들을 선동하라고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반색하며 덧붙였다.
“오. 그거 좋네. 그렇게 하도록 하라고. 그리고 정말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생각이라면 허가장을 받고 뉴펀들랜드 섬을 방문하는 어선을 타고 오면 된다고 슬쩍 알려주게.”
“하하하.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