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정성국이 새진주를 다 둘러보고 슬슬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정성국이 머무는 관사로 게으른 곰이 찾아왔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하하하. 이거 오랜만이군. 게으른 곰. 자. 앉게.”
정성국은 정보기관을 맡아 새한성을 떠나 그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게으른 곰을 환영하며 관사의 창문 근처에 놓여있는 티테이블에 게으른 곰과 앉아 잠시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의 근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 음흉한 여우는 아직 매사추세츠 지역에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처음 음흉한 여우와 게으른 곰은 정보기관을 맡아 새한성을 떠나 한창 철도 공사가 진행 중인 지역으로 이동해 개발청의 도움을 받아 철도 공사를 하는 일꾼들 사이에 잠입해 정보망을 구축하고 북미왕국과 기차에 대한 여러 소문을 마구 퍼트렸다.
그 일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둘은 새진주로 와 외무청의 도움을 받아 외국인 거주 구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포섭해 정보망을 구축했고.
그렇게 이들은 새진주를 방문하는 외국인 선원들에게 여러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먹히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이 소문을 단호하게 헛소문이라고 일축하는 에스파냐 선원들이 있었기에 게으른 곰과 음흉한 여우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에스파냐 선원들과 대화를 시도했고.
술을 잔뜩 먹이며 알아본 결과 북미왕국의 배는 출항 전 무조건 석탄을 실었기에 북미왕국의 배는 석탄으로 이동한다고 확신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곧바로 이를 정성국에게 알렸고.
다행히 정성국은 문책 대신 걸린 것을 어쩌겠느냐면서 신경 쓰지 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지만 게으른 곰도, 음흉한 여우도 처음으로 맡은 임무를 실패한 꼴이었기에 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특히 이들은 증기기관이 북미왕국에서 얼마나 중요한 기술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들의 무능력으로 에스파냐에서 증기기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분노하기도 했고.
해서 음흉한 여우는 정보기관을 더 키우기 위해 이곳의 일을 게으른 곰에게 맡기고 백인 정보원들을 모집하겠다며 정성국의 허락을 받고 북미 동해안 지역으로 떠났고.
정성국은 음흉한 여우가 매사추세츠 지역에서 정보망을 구축하며 백인 정보원들을 모집하는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기에 이에 관해 묻자 게으른 곰이 북미 동해안 지역에 구축한 정보망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정성국은 커피를 마시고 이를 듣다가 게으른 곰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헌데 자네답지 않게 좀 좌불안석인 것 같은데? 뭐 사고라도 쳤나?”
그가 기억하는 게으른 곰은 묘하게 담담하고 귀찮다는 표정을 달고 살았는데 지금의 게으른 곰은 묘하게 정성국의 눈치를 보는 느낌이라 정성국이 질문하자 게으른 곰이 움찔했다.
“그게...”
“편히 이야기해보게.”
정성국의 재촉에 게으른 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정보기관을 창설하고 처음으로 내리신 임무를 결국 실패해서 전하를 뵐 낯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게으른 곰의 모습에 정성국은 실소했다.
“난 또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네. 뭐 어쩌겠나. 이미 알려진 것을.”
“하지만...”
“그리고 그건 정보기관의 잘못 때문이라고 보긴 어렵지. 아무리 자네들이 이런저런 소문을 흘린다 하더라도 북미왕국의 배들이 출발하기 전에 석탄을 잔뜩 적재하는 모습을 계속 보인다면 당연히 저들도 눈치챌 수밖에 없지 뭐. 처음 새진주를 건설하고 외국인 거주 구역을 설정할 때 미리 이런 사항을 고려했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한 불찰이지.”
정성국의 말에도 게으른 곰의 표정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정성국은 속으로 혀를 차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일을 자네들이 보고했을 때 내가 편지로도 이야기하지 않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이에 게으른 곰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첫 임무에 실패했는데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에스파냐에 증기기관의 존재가 알려진 이상 기차에 대한 정보를 숨기는 것도 어려울 테고요.”
게으른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알려진 것을. 그리고 증기기관 건 외에는 나름대로 잘하고 있고. 덕분에 아직 에스파냐는 우리 북미왕국이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저들의 예상보다 인구가 적다는 것도 모르지 않는가. 그건 자네들의 공이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게으른 곰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합니다만...그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음?”
“지금이야 외국인들이 외국인 거주 구역을 넘지 못하고 외국인 거주 구역에 일하는 주민들을 외무청과 정보기관이 관리하고 있기에 정보를 통제할 수 있지만, 언제까지 그러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더불어 외무청의 이야기로는 에스파냐나 잉글랜드의 외교관들이 은근슬쩍 북미왕국의 수도인 새한성을 방문하고 싶다고 요청하기도 했고 이렇게 철도가 깔린 이상 그 요청은 더 심해질 테고요.”
“그래서 더는 보안을 유지하긴 어렵다고 보는 건가?”
“그렇습니다.”
정성국은 침통한 게으른 곰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상관없지 않나.”
“예?”
게으른 곰이 놀란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내가 정보기관을 창설했을 때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나. 북미 동해안 지역에 충분한 병사들을 배치하고 2, 4함대가 성장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주면 족하다고.”
“아...”
“그리고 이번 뉴펀들랜드 해전으로 북미왕국 해군이 무척 강하다는 것이 알려진 이상, 그리고 새한성에서 새진주까지 철도를 통해 신속한 병력 이동이 가능해진 이상, 북미왕국이 신생국에 불과하다는 것이 알려진다 해도 큰 문제는 없어. 자네들 덕분에 가장 위험한 순간은 넘긴 셈이지.”
처음 정보기관을 설립했을 당시만 해도 북미왕국의 군사력은 미약했고 유럽의 나라들이 북미왕국의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덤벼든다면 솔직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정성국은 정보기관까지 설립해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해 시간을 벌었고.
덕분에 2, 4함대를 키워 프랑스 대함대를 막을 정도가 되었고 북미왕국의 군사력도 몇몇 국가를 제외하면 유럽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수준까지는 올라왔기에 이젠 어느 정도 북미왕국의 사정이 알려져도 크게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성국이었다.
“휴우. 그렇습니까?”
이러한 설명을 듣고 게으른 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분명 게으른 곰이 이름대로 게으른 성격이긴 했지만 최소한의 책임감은 있었고 자신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큰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압박감도 받았던 터라 이상할 정도로 유럽의 사정에 밝은 정성국의 확언에는 내심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은 그런 게으른 곰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 북미왕국의 정보를 통제하는 문제에 관해선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네.”
“허면 이젠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동안은 주로 북미왕국에 대한 과장된 소문을 퍼트리는 일을 주로 했지만 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정성국의 말에 게으른 곰이 묻자 정성국은 물어 무엇하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외국인 거주 구역을 완벽히 장악해 혹시라도 총기를 비롯한 북미왕국의 각종 중요한 기술이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면 되네. 뭐 저들이 우리를 관찰해 그 원리를 짐작하고 이를 재현하려는 노력 끝에 기술을 습득하는 것까지야 넘어간다 치더라도 우리의 기술을 몰래 훔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지. 그리고 이곳에 들르는 선원들을 통해 외국의 정보를 입수하는 일도 그렇고.”
“흐음...알겠습니다.”
* * *
정성국이 새진주를 떠나고 며칠 후.
갑작스럽게 이전 전열함 구매 문제로 새진주를 방문했던 베라쿠르즈에 상주하는 에스파냐 외교관이 다시 새진주에 방문했다는 보고에 웅크린 늑대는 외국인 거주 구역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초조한 기색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에스파냐 외교관을 만났다.
“갑자기 무슨 일로 방문하신 겁니까? 설마 벌써 전열함 구매 대금을 가져오신 겁니까?”
네덜란드의 사절단이 본토로 돌아가 전열함 구매 대금 일부를 가져올 때 에스파냐도 대금을 건네기로 했는데 이렇게 일찍 찾아온 에스파냐 외교관을 보고 의아한 듯 웅크린 늑대가 묻자 에스파냐 외교관은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그건 아니고 뭐 이런저런 일로 귀국과 논의할 것이 있어서 방문했습니다만...”
“그렇습니까?”
웅크린 늑대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일단 에스파냐 외교관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에스파냐 외교관이 마치 지나가듯 질문을 던졌다.
“헌데 제가 타고 온 배의 선장이 그러더군요. 저번에 이곳에서 흰머리수리 깃발은 본 적이 있다고. 헌데 제가 알기로 흰머리수리 깃발은 북미왕국 왕실의 깃발 아닙니까?”
이에 웅크린 늑대는 에스파냐 외교관이 갑작스럽게 새진주를 방문한 까닭을 파악하고 속으로 실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러면 혹시...”
웅크린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파냐 외교관은 잔뜩 긴장하며 말을 흐리자 웅크린 늑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 처음으로 새진주를 방문하셨었지요.”
“헉! 그...그러면 제가 귀국의 국왕 전하를 알현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에스파냐가 만난 왕실 인사는 푸른 안개뿐이었기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이번 기회에 베일에 싸인 북미왕국의 국왕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급히 질문을 던졌지만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국왕 전하께선 며칠간 새진주를 둘러보고 다시 새한성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
북미왕국의 국왕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한 에스파냐 외교관은 아쉬움에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궁금한 것은 많았기에 에스파냐의 외교관은 다시 표정을 관리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헌데 귀국의 국왕 전하께서 꽤 특이한 마차를 타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기차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아. 그 스스로 움직이는 마차를 기차라고 하는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웅크린 늑대의 대답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내심 긴장한 기색으로 지나가듯 질문을 던졌다.
“음...말도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기차라...참으로 신기하군요. 혹시 그 기차도 북미왕국의 배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겁니까?”
이미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의 배가 증기기관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선장의 이야기를 들은 에스파냐 외교관은 기차도 아마 증기기관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짐작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니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물어보았지만 웅크린 늑대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에 웅크린 늑대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저는 그런 부분은 잘 모르는지라...”
“아...그렇습니까.”
에스파냐 외교관은 웅크린 늑대가 정말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북미왕국 사람들이 증기기관을 비롯한 각종 기술과 관련된 이야기는 철저히 함구하는 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웅크린 늑대가 대답해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를 굳이 물어본 것은 웅크린 늑대의 반응으로 짐작해볼 생각이었지만 웅크린 늑대의 표정으로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기에 결국 포기하고 기차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웅크린 늑대는 이에 대해 적당히 대답해주다가 질문 공세가 조금 수그러들자 커피잔을 들면서 말했다.
“기차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많으시군요?”
이에 커피로 목을 축이던 에스파냐 외교관은 확실히 자신이 너무 속 보이게 질문을 던졌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움에 살짝 얼굴이 붉어지며 웅크린 늑대에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신기하다 보니 질문이 많아진 것 같군요.”
에스파냐 외교관의 사과에 웅크린 늑대는 슬쩍 웃고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면서 말했다.
“아닙니다. 그나마 기차에 익숙해진 새진주의 주민들도 기차가 새진주역에 도착할 때면 이를 구경하느라 바쁘니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고 보니 슬슬 기차가 도착할 시간인데...어떠십니까. 먼발치서나마 직접 기차를 구경하는 것이?”
이에 에스파냐 외교관은 잔뜩 기대감 섞인 표정으로 들고 있던 커피잔을 단숨에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습니까? 그럼 기차가 도착하기 전에 어서 나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