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장 바스티스 콜베르의 추천으로 루이 14세를 만나 특사로 임명되어 이번 북미왕국과의 협상에서 전권을 갖게 된 데니스 도다르는 선실에 있다가 북미왕국의 군함으로 짐작되는 선박이 보인다는 보고에 급히 갑판 위로 올라왔다.
갑판 위에는 선원들이 다들 불안한 표정으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데니스 역시 선원들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 위에는 특이하게 생긴 배 한 척이 데니스가 탄 배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고 데니스는 이를 보고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으음...저게 바로...”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의 해군 같습니다.”
선장이 데니스에게 다가와 입을 열자 데니스는 북미왕국의 배에서 눈길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허면...이 근처에서 해전이 벌어졌겠군.”
루이 14세의 명령을 받고 떠났던 듀케인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역시 저기 보이는 정찰선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지고 뒤이어 출동한 북미왕국 해군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기에 선장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선장의 대답에 데니스는 한숨을 내쉬고 잠시 주변 바다를 향해 묵념하듯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고 선장은 뒤에서 묵묵히 이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북미왕국의 선박이 점차 가까워지자 선원들이 불안한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기에 선장은 조심스럽게 데니스에게 말을 걸었다.
“특사님. 북미왕국의 해군이 다가오는데 어쩔까요.”
그제야 눈을 뜬 데니스는 선원들의 반응에 쓴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바로 백기를 올리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 * *
한창 집무실에서 수많은 서류와 씨름하던 이정운은 갑자기 찾아온 외무청 관리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 프랑스에서 외교 사절을 보냈다고?”
“그렇습니다. 해서 분함대에서는 프랑스의 배는 뉴펀들랜드 섬에 정박시키고 프랑스의 사절단을 북미왕국 배에 태워 이곳으로 보낸 모양입니다.”
“아니...왜 여기로 온 거지?”
북미왕국은 지금껏 프랑스의 외교관을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내 프랑스에서 외교 사절을 보냈으니 환영할만한 소식이긴 했다.
하지만 이정운을 비롯한 북미왕국 관리들은 프랑스의 사절단이 남쪽의 서인도제도를 통해 곧바로 새진주로 도착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뉴펀들랜드 섬에 프랑스의 외교 사절이 탄 배가 도착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외무청 직원이 들은 이야기라도 있는지 입을 열었다.
“이곳에 도착한 프랑스의 특사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프랑스는 이번 협상에서 잉글랜드가 개입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했습니다.”
루이 14세는 함대를 북미왕국으로 보내자마자 단독으로 네덜란드와 강화 협상을 마친 잉글랜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았기에 이번 북미왕국과의 협상에서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해서 특사로 임명한 데니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며 직접 북미왕국과 접촉해 협상하라고 명령했고 그 때문에 데니스는 서인도제도가 아닌 뉴펀들랜드 섬으로 이동한 것이다.
“아하. 그래서 우리와 직접 협상을 할 생각으로 프랑스 함대가 이동한 경로를 따라 이곳에 온 거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뉴펀들랜드 섬에 주둔해있는 분함대를 보자마자 백기를 든 것이고요.”
사정을 알게 된 이정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고민 없이 명령을 내렸다.
“흠...그럼 바로 새진주로 보내도록 하게.”
하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집무실을 나갈 거라고 예상했던 외무청 관리가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이정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이번에 방문한 프랑스의 특사와 대화를 나누다 이곳에 프랑스의 포로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거든요.”
그제야 이정운은 외무청 관리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피식 웃었다.
“아. 그렇다면 분명 프랑스의 특사는 포로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겠군.”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외무청 관리가 사과하자 이정운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흠...뭐 만나게 해 줘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
“어? 그렇습니까?”
“그래. 어차피 새진주에서 협상하다 포로들의 상태를 파악하겠답시고 다시 이곳으로 오는 것보다야 지금 만나고 내려가는 것도 나쁠 것 없잖아?”
이정운의 말에 외무청 관리는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요.”
“그리고 북미왕국 해군과 직접 싸워본 자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떻게든 종전 협상을 맺으려 들 테니 웅크린 늑대께서 그런 특사를 잘 요리해서 최대한 뜯어내겠지.”
이정운이 씩 웃으며 이야기하자 웅크린 늑대의 성정을 잘 아는 외무청 관리는 과연 그렇다면서 웃었다.
“하하. 그건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허면 특사가 원하는 대로 포로들의 만남을 주선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 * *
아브라함 듀케인은 북미왕국 병사들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북미왕국 병사들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고.
“맙소사...듀케인 제독 맞습니까?”
방 안의 의자에 앉아있던 프랑스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자신을 보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알아보는 눈치이자 아브라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당신은?”
“아. 전 북미왕국과의 협상을 위해 특사 자격으로 북미왕국을 방문한 데니스 도다르라고 합니다.”
데니스의 말에 아브라함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소리쳤다.
“본국에서 오셨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아...”
데니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브라함은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드러내는 얼굴로 신음을 흘리며 마치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그런 아브라함의 반응에 데니스는 조금 놀랐지만, 아브라함의 얼굴에서 보이는 복잡한 감정을 눈치채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데니스는 프랑스 해군의 일방적인 패배에 북미왕국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오판한 루이 14세의 결정이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이를 대놓고 이야기할 수야 없었고 아브라함은 이번 원정의 총 책임자인 만큼 아브라함이 자책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기에.
해서 데니스는 잠시 침묵하며 아브라함이 스스로 감정을 수습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고 잠시 후 아브라함은 감정을 수습하고 기다려 준 데니스에게 사과와 감사의 뜻은 전했고 데니스는 괜찮다고 말하며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아브라함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국왕 폐하께선...?”
“처음 잉글랜드 대사를 통해 뉴펀들랜드 해전의 결과를 전해 들으신 국왕 폐하께서는 무척 분노하셨습니다만 곧 이성을 되찾으신 후 콜베르 경과 상의해 북미왕국과의 전쟁을 끝낼 뜻을 밝히셨습니다.”
“휴우. 그렇습니까? 참으로 다행이군요.”
데니스의 말에 아브라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데니스는 그런 아브라함의 반응에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음...정말 북미왕국의 해군이 강력한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서인도제도에서 파악한 정보를 통해 북미왕국의 해군을 어느 정도 짐작했고 잘 하면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습니다만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사실만 뼈저리게 깨달았을 뿐이죠.”
“으음...그 정도였습니까?”
아브라함은 뉴펀들랜드의 해전을 떠올리고 조금은 괴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의 무기로는 저들의 군함에 아무런 타격을 입힐 수 없고 저들의 포탄에 맞은 우리 프랑스의 최신 전열함은 부서지고 결국 침몰하는데 무슨 수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수많은 해전으로 잔뼈가 굵은 아브라함이 북미왕국 해군과의 전투는 승산이 없다고 단언하자 데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허...”
“그리고 저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철저히 거리를 벌리며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터라 도저히 상대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북미왕국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종전 협상을 맺어 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의 함대가 서인도제도나 혹은 대서양을 건널까 두렵습니다.”
“으음...”
그 말에 데니스는 다시 한번 신음을 흘렸고 그런 데니스의 반응에 아브라함은 놀란 표정으로 데니스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에 데니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생도맹그에 배치된 프랑스 함대가 북미왕국 함대에 의해 모두 침몰했고 생도맹그 해안가 전역이 불타올랐다는 보고가 전해졌습니다.”
“아...”
북미왕국의 함대가 생도맹그를 공격한 것은 뉴펀들랜드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브라함은 자책했고 데니스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반응에 급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제독께서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보고를 확인해보니 뉴펀들랜드 해역 인근에서 벌어진 해전과는 며칠 차이가 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저들의 공격은 보복성 공격이라기보다는 예정된 공격이라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데니스의 말에 잠시 안도했던 아브라함은 그래도 자신이 북미왕국을 상대로 승리했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내쉬었고 데니스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다시 함부로 말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을 우려해 급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 이곳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저들이 포로를 학대하지는 않던가요?”
이에 아브라함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비록 탄광에서 일정 시간 일해야 하긴 합니다만...먹을 것도 풍부하게 주고 충분한 휴식 시간을 보장하는 터라 괜찮습니다.”
하지만 데니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인상을 쓰며 물었다.
“음? 북미왕국에서 강제 노역을 시킨단 말씀입니까?”
“뭐 할당량이 있으니 엄밀히 따지자면 강제 노역이라고 볼 수 있긴 하지만 우리가 캐는 석탄을 저들이 값을 치러주기에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일을 하는 터라...”
“아니 그게 무슨...”
데니스가 아브라함의 말에 황당해하는 표정이자 아브라함은 데니스의 반응을 이해했다.
자신 역시 이곳에서 지내면서 북미왕국이 포로를 관리하는 방식에 놀란 점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데니스에게 북미왕국이 포로를 대하는 방식과 포로수용소의 생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 데니스는 이를 듣고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허. 그래도 포로수용소인데 거의 통제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목책을 넘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제재가 없습니다.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삽이나 곡괭이, 요리 할 때 필요할 거라면서 부엌칼마저 넘겨줄 정도라 조금 놀랐지요. 아. 전에 누벨 프랑스의 행정관이 그러더군요. 고립된 광산 도시나 다름없다고. 그 말이 딱 맞습니다. 덕분에 이곳 생활에 만족해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아마 이곳에 여자만 있다면 계속 이곳에서 지내는 것도 괜찮겠다는 친구들도 있고요.”
“허...”
데니스는 아브라함의 설명에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아브라함은 그런 데니스를 보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포로수용소는 이렇게 돌아가는 만큼 본국에서 지불해야 하는 포로들의 몸값은 그리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야기해주는 포로수용소의 생활이 너무 의외라 이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데니스는 아브라함의 지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아아! 그렇군요! 포로들이 자체적으로 일을 해 석탄으로 각종 물자와 교환하는 셈이니 몸값이 비쌀 이유가 없군요!”
“그렇습니다. 그것이 알려졌기에 포로가 된 병사들도 일하는 것에 별다른 불만을 품고 있지는 않고요.”
“휴. 다행이군요. 북미왕국에서 포로들의 몸값을 너무 높게 부르면 수가 수인지라 곤란했을 텐데.”
아브라함이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빠르게 항복한 것은 프랑스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었다.
어차피 이기지 못할 거라면 정예 병력이라도 보존하는 편이 나았으니까.
문제라면 워낙 많은 병사가 고스란히 포로가 된 터라 이들의 몸값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반 병사들의 몸값은 포로가 되어 사용하는 모든 물품의 가격을 몸값에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시간을 끌어봐야 몸값이 오르는 구조라 급히 데니스를 특사로 임명해 파견한 것이었고.
헌데 북미왕국에서 포로를 관리하는 방침 덕분에 포로들의 그렇게 몸값이 부담될 것 같지 않으니 데니스는 안도했다.
그러다 데니스는 북미왕국과 협상해야 할 것이 포로 문제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급히 질문을 던졌다.
“아.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는데 북미왕국에서 노획한 선박 중 그냥 내어준 전열함은 몇 척이나 됩니까?”
“으음...제 기억으론 17척입니다.”
아브라함의 대답에 데니스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피해가 무척 크군요. 허면 23척은 모두 침몰한 겁니까?”
“...침몰한 전열함은 9척입니다. 그 외에 14척은 갑판이나 선체가 반파되었지요.”
“그렇습니까? 허면 그 반파된 배들도 수리하면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은 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그건 왜...아. 설마 북미왕국이 노획한 전열함을 되살 생각인 겁니까?”
이에 데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당장 해군의 절반이 사라진 이상 해군력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길은 그뿐이니까요. 서인도제도에 배치된 함대도 모두 침몰했고 말입니다. 헌데 제가 북미왕국의 배를 타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 근처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전열함은 17척뿐이던데...”
데니스가 이곳으로 오면서 보았던 선착장의 풍경을 떠올리며 중얼거리자 아브라함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까? 저희가 북미왕국 해군의 감시하에 이곳에 도착했을 때 온전한 전열함 17척, 반파된 전열함 14척, 수송선 20척, 프리깃 10척까지 총 61척이 이곳의 선착장에 정박했었습니다만...”
아브라함의 대답에 데니스는 안색을 찌푸렸다.
“흐음...그렇습니까? 전열함 17척 외에는 범선은 거의 보이지 않던데...아무튼, 알겠습니다. 허면 조금만 더 버텨주시지요. 빠르게 북미왕국과 협상해 곧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데니스의 말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디 원만하게 협상이 이뤄지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