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정성국이 김봉길과 함께 웅크린 늑대의 집무실로 올라가 문을 두드리고 웅크린 늑대의 집무실 문을 열자 웅크린 늑대는 외투를 들고 있다가 정성국을 보고 곧바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전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오랜만일세. 헌데 어딜 가려는 건가?”
묘하게 담담한 표정으로 정성국과 그 뒤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봉길을 바라본 웅크린 늑대는 슬쩍 웃으며 외투를 다시 옷걸이에 걸면서 말했다.
“전하께서 오실 것 같아 마중하기 위해 새진주역으로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만...이렇게 먼저 오실 줄은 몰랐군요.”
“음? 날 마중하러?”
웅크린 늑대의 대답에 정성국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는 표정으로 김봉길을 바라보자 김봉길은 고개를 저었다.
“웅크린 늑대에겐 입도 뻥긋 안했는뎁쇼?”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웅크린 늑대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새진주에 도착하는 기차를 구경하겠다고 새진주역으로 나갈 수야 있겠죠.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쉬고 있던 2함대 소속 병사를 모조리 무장시켜 끌고 나갔다면 답은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아하? 날 호위하기 위함이었을 거다?”
그제야 정성국은 웅크린 늑대가 왜 이렇게 평온한지를 깨닫고 피식 웃자 웅크린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2함대 사령관이 오랜만에 새진주에 복귀해 쉬고 있는 병사들을 차출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뭐 외무청 관리의 보고가 생각보다 늦은 것이 문제였습니다만...”
“하하하. 바쁜 사람들이 업무를 제쳐두고 새진주역에 나올까 봐 일부러 알리지 않은 거니 신경 쓰지 말게. 그럼 커피나 한잔하자고.”
“알겠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커피를 내리면서 오랜만에 만난 웅크린 늑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린 커피를 멋들어진 커피잔에 따른 후 넘겨주었다.
이에 김봉길과 웅크린 늑대는 무척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커피잔을 받았고.
웅크린 늑대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정성국이 직접 내린 커피의 향을 즐겼고 김봉길은 조심스럽게 커피를 마시며 웃었다.
“으하하. 전하께서 직접 내려주시는 이 커피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이제 철도도 깔렸으니 가끔은 궁에 들르게. 오면 커피 한잔 정도야 기꺼이 대접하지.”
정성국의 말에 김봉길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슬슬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리실 줄 알았습니다만...”
“복귀하라면 할 텐가?”
“명령이라면 당연히 따라야지요!”
“그으래?”
김봉길의 대답에 정성국은 정말 김봉길을 1함대로 복귀시킬까 고민하기 시작하자 김봉길은 혹시라도 정성국이 바로 1함대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릴까 봐 급히 입을 열었다.
“어...다만 곧 서인도제도로 진출하게 되면 2함대의 역할이 중요한데 당장 2함대를 맡을 인물이 마땅히 없는지라...한 1, 2년 후에 복귀하면 안 될까요?”
결국, 2함대가 서인도제도에 진출하게 되면 당분간은 해적들과 전투를 치러야 할 테니 재미 좀 보고 복귀하면 안 되냐는 김봉길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눈치를 슬쩍 살피는 김봉길을 타박했다.
“거참. 이번에 서인도제도에서 프랑스의 함대와도 싸웠는데 그래도 부족한 건가?”
“에이. 이정운이 상대한 것처럼 대규모 함대도 아니고 소규모 함대뿐이었는걸요. 오히려 2함대의 규모가 더 컸으니...오히려 입맛만 버렸습니다.”
김봉길의 너스레에 정성국이 피식 웃으며 다시 커피잔을 들자 옆에서 정성국과 김봉길의 대화를 듣던 웅크린 늑대가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향후 예상되는 프랑스와의 협상에 대해 별다른 지침을 받지 못했기에 서인도제도의 진출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전하께서는 서인도제도로의 진출을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정성국이 이전에 자신의 장인인 푸른 안개에게는 서인도제도 진출에 관한 의견을 내비친 적이 있긴 했지만, 당시에는 서인도제도로 진출할 여력이 전혀 없었기에 푸른 안개는 이를 외무청에 알리진 않았었다.
그리고 정성국은 북미 대륙의 장악을 더 중요시하는 눈치였고 북미왕국은 북미 대륙 해안가만 장악하고 있었기에, 더불어 외무청에서 따로 내려온 협상 지침은 없었기에 웅크린 늑대는 서인도제도의 진출은 생각하지 않고 있었고 해서 프랑스와의 협상에서도 최대한 많은 금을 뜯어낼 생각이었고.
헌데 정성국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 하자 웅크린 늑대는 당황했고 그런 웅크린 늑대의 반응에 정성국은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내가 조용한 곰과 상의해 자네에게 협상 지침을 보낼 생각이었네만 내가 직접 새진주를 방문할 예정이었기에 자네와 상의해 협상 기준을 마련할 생각이었네.”
이에 웅크린 늑대는 외무청에서 아직 연락이 오지 않은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허면 전하께선?”
“나중을 생각하면 이 기회에 해군 기지를 세울 만한 서인도제도의 섬을 얻어 두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네. 지금까지야 서인도제도에 진출할 여력이 없었지만, 김봉길 2함대 사령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젠 가능할 것 같고. 이번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 손쉽게 서인도제도의 섬 일부를 얻을 수 있을 테니 이 기회에 진출하는 것도 나쁠 것 없지.
“그렇습니까?”
“우리가 서인도제도에 진출하면 그동안 서인도제도에서 설치던 해적들은 줄어들 테고 그러면 유럽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새진주가 더욱 발전할 테니까.”
“흐음...그렇기야 하지요.”
정성국은 자신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웅크린 늑대를 보고 덧붙였다.
“그리고 훗날 우리 북미왕국의 선박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서인도제도로 진출할 필요가 있고.”
하지만 웅크린 늑대는 정성국의 설명에 의아한 표정을 짓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훗날 유럽에 직접 배를 보낸다 하더라도 현재 유럽인들이 서인도제도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항로를 이용하기보다는 해안가를 따라 뉴펀들랜드 섬 인근까지 올라가 대서양을 건너는 항로를 이용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정성국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이곳 새진주에서 배가 출발한다면야 자네가 말한 항로로 이동하는 편이 나을 테지. 하지만 새김포에서 출발하게 된다면 사정이 다르지.”
“예? 새김포에서요?”
웅크린 늑대는 정성국의 대답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김봉길은 정성국의 대답에 무언가 감을 잡은 듯 탄성을 내질렀다.
“아! 전하께선 파나마 운하가 훗날 건설될 것으로 예상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파나마 운하에 대한 개념은 이미 16세기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넌 것도 결국 아시아로 향하는 다른 항로를 찾기 위함이었고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려면 남미를 빙 돌아 험난하기로 유명한 드레이크 해협을 넘어야 했으니 당시 신대륙의 지리를 파악하게 된 에스파냐인들은 운하의 건설을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에스파냐의 국왕인 카를 5세도 운하의 건설을 진지하게 검토했지만, 독일에서의 내전을 시작으로 대프랑스 전쟁, 대오스만 전쟁을 치러야 했기에 신대륙에 신경 쓰지는 못했고 그 이후의 국왕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막대한 전비를 소모해야 했기에 마찬가지로 엄청난 비용이 예상되는 신대륙의 운하 건설을 잠정적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곳에서 여러 에스파냐인을 만나며 이러한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웅크린 늑대는 정성국의 말에도 회의적인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허. 파나마 운하라...정말 가능할까요?”
이에 정성국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파나마 지역에서 가장 좁은 지역은 직선거리로만 따지면 60km 정도에 불과하네. 물론 쉽지야 않겠지만...그렇다고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군.”
하지만 웅크린 늑대는 정성국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으음...하지만 에스파냐가 과연 그러한 대공사를 진행할 여력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북미왕국에서 비단까지 생산하면서 에스파냐는 아시아 무역의 비중을 줄이는 모양새라 굳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운하 공사를 시작할까 싶습니다만...”
원래였다면 아시아에서만 구할 수 있는 도자기, 비단 등을 구하기 위해 태평양을 횡단하기 위해 배를 띄웠던 에스파냐는 북미왕국에서 손쉽게 도자기, 비단 등을 살 수 있게 되자 자연스럽게 아시아 무역의 비중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물품은 북미왕국에서 구할 수 있고 품질도 비슷하거나 좋았으며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에스파냐가 과연 운하를 건설할 생각이 있긴 한가 싶은 웅크린 늑대였고.
이에 정성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당연히 우리가 건설해야지.”
“예?!”
정성국의 말에 웅크린 늑대가 기겁하자 정성국은 웅크린 늑대의 놀란 모습을 이렇게 보게 되는구나 싶어 슬쩍 미소짓고 말했다.
“뭘 그리 놀라나. 파나마 운하가 개통된다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이 우리인데. 그리고 전략적인 차원에서도 파나마 운하가 필요하긴 해.”
이에 옆에서 듣고 있던 김봉길이 커피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지요. 특히 만약의 사태에 수월하게 함대를 이동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 뭐 당장이야 어렵겠지만...언젠가는 에스파냐와 협상해서 어떻게든 파나마 운하를 파긴 해야지. 그 이후에 서인도제도에 진출하겠다고 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야 지금 진출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처음 덤벼들었던 프랑스의 경우 2만 2천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결국 손을 뗐고 후에 미국이 미 해군의 신속한 이동을 위한 전략적인 차원으로 파나마 운하를 건설했지만, 미국 역시 6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파나마 운하를 완공시켰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정성국으로서는 섣불리 파나마 운하를 파겠다고 덤빌 수가 없었다.
‘운하 건설에 필요한 기술이야 연구청에 이야기해서 연구해보라고 하면 되겠지만...문제는 말라리아나 황열병인데...’
파나마 운하 건설에 그토록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원인은 바로 말라리아와 황열병 때문이었다.
그나마 말라리아의 경우는 키니네의 원료인 킨코나 나무껍질을 복용하면 효과가 있었지만, 황열병의 경우 마땅한 치료제도 없었고.
다만 아예 답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이 전염병들을 옮기는 매개체는 모기였기에 모기를 박멸하기 위해 운하 공사의 반경 5km 정도의 지역을 깨끗이 밀어버리고 오염을 감수하고 석유를 뿌려 모기의 유충이 자라는 것을 막는다면 충분히 도전해 볼만은 하다고 판단했다.
정성국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웅크린 늑대는 정성국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깨닫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까? 허면 이번 일을 빌미로 에스파냐에 운이라도 띄워봐야겠군요.”
한창 모기를 효과적으로 박멸하기 위해 고민하던 정성국은 웅크린 늑대의 말에 생각을 멈추고 의문을 표했다.
“음? 이번 일?”
“베라크루즈에서 온 선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 이번 기회에 생도맹그를 점령해 히스파니올라 섬을 되찾으려는 것 같습니다.”
웅크린 늑대의 보고에 정성국은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만 하더라도 에스파냐의 요청으로 비밀 동맹을 체결하고 은근슬쩍 프랑스의 사정을 상세히 알리면서 프랑스와의 충돌을 유도했던 에스파냐였다.
그러다가 막상 북미왕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자 본국의 사정을 이유로 쏙 빠져버렸고.
헌데 2함대가 생도맹그에 배치된 프랑스 함대와 해안가를 모두 불태우자 손쉽게 히스파니올라 섬을 되찾을 기회라고 생각해 움직인다니 정성국으로선 에스파냐의 행동이 얌체 같을 수밖에 없었다.
“얼씨구? 이제 와서 숟가락을 들이밀겠다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웅크린 늑대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참...믿기 어려운 족속들이지요.”
“뭐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우리 입장에선 참으로 얄밉군.”
정성국이 투덜거리자 김봉길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둘의 반응에 웅크린 늑대가 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 북미왕국은 히스파니올라 섬을 에스파냐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긴 했습니다만...그것과는 별개로 히스파니올라 섬 서쪽은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고 에스파냐는 히스파니올라 섬을 되찾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지요. 그렇기에 이번에 에스파냐가 히스파니올라 섬을 완전히 장악한다면 우리 북미왕국의 지분도 없지는 않을 테고요.”
“아...설마 이를 빌미로 에스파냐를 압박할 생각인가?”
정성국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짓자 웅크린 늑대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들 역시 2함대의 공을 무시하지 못할 테고 전열함 매매 계약 때문에 우리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니 히스파니올라 섬을 먹고 입을 싹 닦지는 못할 겁니다. 정 뭐하면 계약금을 받지 않은 상황이니 계약을 파기하고 남아있는 온전한 전열함 17척을 프랑스에 판매하면 그만이니까요.”
웅크린 늑대의 말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나쁠 것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어려워도 이 기회에 파나마 운하를 건설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내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지.”
“알겠습니다. 허면 에스파냐가 생도맹그를 점령해 히스파니올라 섬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곧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하하하. 그러도록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