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부는 2월 초에 정성국은 연단에 올라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을 넘기며 계속 말했다.
“...그대들이 이곳에서 4년간 배운 지식을 활용할 시기가 왔다. 그대들은 지금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이 북미왕국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생각한다.”
정성국의 말에 앉아 있는 졸업생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우리 북미왕국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다. 즉, 그대들이 바로 북미왕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이니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그럼 그대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모두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한다.”
그 말을 끝으로 정성국은 짧은 졸업 축사를 마무리하자 졸업생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정성국은 그런 졸업생들을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한번 흔들어주고는 연단에서 내려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교육청장을 보고 중얼거렸다.
“휴. 이것으로 끝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족들의 축하를 받고 환하게 웃는 졸업생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새한성 대학교와 사범 대학교가 처음으로 졸업생을 배출하는 무척 의미깊은 날이었다.
4년 전 처음으로 문을 열고 처음으로 입학한 신입생들을 환영하기 위해 정성국이 직접 대학교를 방문해 신입생들에게 연설한 것처럼 처음으로 두 대학교에서 졸업생이 배출된다는 교육청장의 보고에 정성국이 졸업식 축사를 하기 위해 이렇게 대학교를 방문한 것이다.
더불어 4년 전에는 새한성 대학교를 먼저 방문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번엔 사범 대학교부터 먼저 들러 연설을 하고 곧바로 마차를 타고 이곳 새한성 대학교를 방문했고.
정성국은 넓은 공터를 가득 메운 졸업생들을 보고 입을 열었다.
“이번에 졸업하는 대학생들이 한 8천 명쯤 되지?”
“그렇습니다. 이곳 새한성 대학교의 졸업생이 2천 명 남짓이고 사범 대학교의 졸업생이 6천 명가량 됩니다.”
아무래도 새한성 대학교의 경우 대학생들을 가르칠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이 적었기에 많은 신입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졸업생이 많지 않아 무척이나 아쉬운 정성국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턴 매년 졸업생이 배출될 테고 이들 중 일부는 학문에 매진해 다시 대학교로 돌아와 대학생들을 가르칠 테니 점차 나아질 것으로 생각하면서 말했다.
“휴.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이겠네. 졸업생들은 모두 갈 곳이 정해졌지?”
“그럼요. 작년부터 각 청에서 더 많은 대학생을 포섭하기 위해 신경전까지 벌였는걸요.”
인재에 허덕이는 각 청에서는 하루빨리 대학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4학년이 된 대학생들을 어떻게든 포섭하기 위해 작년부터 각 청에서 관리들을 보냈다는 연구청장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성국은 졸업하고 취업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 전생을 떠올리며 묘하게 배가 아프긴 했다.
하지만 당장 급격히 발전하면서 인재가 부족한 북미왕국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했고 어차피 저들 중 상당수는 연구청에 소속되어 연구 개발을 위해 갈려 나가리라는 것을 깨닫고 정성국은 마음이 평온을 되찾고 히죽 웃으며 교육청장을 보고 입을 열었다.
“뭐 그것도 차차 나아지겠지. 그보다 이번에 사범 대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꽤 있으니 중등 교육 기관의 추가 설립이 가능할까?”
이에 교육청장은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중등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이번 졸업생은 모두 현재 설립되어있는 중등 교육 기관에 배치될 예정입니다.”
“아. 기존에 근무하는 선생들과 교체한다는 거군. 그리고 기존의 선생들을 사범 대학교에 입학시켜 재교육하고?”
“그렇습니다. 전하.”
“그럼 내년은 가능할까?”
계속 중등 교육 기관의 추가 설립을 묻는 정성국을 보고 교육청장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음...북미 동해안 지역에 새로운 중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시고자 그러시는 겁니까?”
“그렇지. 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뉴욕, 매사추세츠 지역과 이로쿼이 부족 연맹의 땅에도 중등 교육 기관을 설립했으면 하는데?”
원래야 이 북미 동해안 지역에는 교육에도 어느 정도 제한을 둘 생각이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이 발발한 후 이 지역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서자 정성국은 자신들이 먼저 이들을 포용하면 이들은 북미왕국의 백성으로 남을 거라는 생각에 대부분의 제약을 풀어버렸다.
그렇기에 고등 교육 기관은 어려워도 중등 교육 기관은 당장 세웠으면 싶었고.
이에 교육청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곳에 세워봐야 과연 저들이 중등 교육 기관에서 가르치는 지식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시기상조 같습니다만...”
교육청장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북미왕국의 교육 체계는 체계적으로 짜여 있었기에 급하게 중등 교육 기관을 세워봐야 이곳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하지만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반론했다.
“새김포나 새한성을 제외하면 처음 중등 교육 기관이 설립되고 입학한 친구들은 뭐 다르던가? 나이만 찼지 2, 3년도 채 배우지 않은 학생들이었는데? 하지만 결과를 보게. 그 친구들은 배우려는 의지가 있으니 잠을 줄이고 독학하면서까지 따라간 거고 그들 중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교에 입학한 친구들도 있지 않나. 그리고 저기 보이는 졸업생 중 11년간 착실히 공부한 후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있긴 한가?”
정성국의 말처럼 당장 인재가 부족했던 북미왕국에선 중등 교육 기관을 세워 적당히 나이가 맞고 영특해 보이며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학생들은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어도 중학교, 고등학교로 보내버렸다.
이에 선생들은 어떻게든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속성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교육청장은 정성국의 말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거야...그렇지요. 다만 북미 동해안 지역은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저들은 아직 북미왕국의 말과 글에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배우려는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말이 통하지 않고 책을 읽지를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겠냐는 교육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저기서 졸업을 기뻐하는 졸업생들 대부분이 조선인 출신과 처음 조선인들이 정착할 때부터 우호적이었던 원주민 부족 출신들뿐인 것은 다 그 때문이었기에.
“흠...그런가? 그럼 3년 후쯤에 중등 교육 기관 중 중학교부터 설립하면 되겠군.”
“예.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전까진 새한성 인근에 추가로 중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면 될 것 같고요.”
“그러도록 하게.”
* * *
저녁 식사를 마친 정성국은 가족들과 함께 응접실에서 후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 새진주를 다녀오신다고요?”
정성국이 느닷없이 잠시 궁을 비우고 새진주를 다녀오겠다고 이야기하자 전아라가 놀란 표정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이에 정성국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새진주까지 철도가 개통한 김에 한 번 다녀오려고.”
정성국의 대답에 정안문이 좋아하는 쿠키를 건네주던 하얀 들꽃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올해 여름쯤에 공사가 끝나는 것 아니었나요?”
“개발청에서 애를 썼는지 꽤 단축된 모양이야. 덕분에 얼마 후면 곧 공사가 마무리된다고 하네.”
이에 하얀 들꽃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그럼 새진주까지 기차를 타고 얼마나 걸려요?”
“밤낮으로 이동하면 딱 4일이 걸린다는데?”
“와...엄청나게 빠르네요.”
정성국을 도와 일을 했었던 하얀 들꽃은 새나주에서 새진주까지 이동하는데 40일 가까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말 놀란 표정으로 감탄했다.
그리고 전아라는 그런 하얀 들꽃의 반응에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정성국에게 질문을 던졌다.
“새한성에서 새진주까지 엄청...멀죠?”
전아라는 지도로만 파악했기에 실제 거리를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 정성국은 웃으며 대답했다.
“멀지. 의주에서 동래까지의 거리에 대략 4배 정도? 그리고 한양에서 연경까지 왕복 거리보다도 조금 멀고. 대략 7천 리에 가까우니까.”
그렇게 설명하자 새한성에서 새진주까지의 거리를 확실히 실감한 전아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렸다.
“그런 거리를 4일 만에요? 정말 기차가 대단하긴 하네요.”
“그럼. 대단하지. 그래서 내가 어떻게든 새나주-새진주 구간 철도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던 거고. 아무튼, 이 철도 공사가 완료되면 새진주에 다녀오느라 새한성을 비워야 할 것 같아.”
이에 전아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하얀 들꽃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오래 걸리시나요?”
“음...못해도 2, 3주는 걸리지 싶은데?”
“어? 그렇게 나요?”
새한성에서 새진주까지 딱 4일 걸린다는 이야기에 왕복 8일에 새진주에서 잠깐 볼일을 보고 오는 것으로 생각했던 전아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성국을 바라보자 정성국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예전에 새나주에 잠깐 들른 뒤로 북미왕국의 영토는 넓어졌는데 실제 방문한 적은 없었잖아? 그래서 새진주를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남부 지역을 한번 둘러볼 생각이라서...”
“아...”
“원래는 새진주에 간 김에 배를 타고 북미 동해안 지역까지 방문할까 했는데...”
정성국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아라와 하얀 들꽃이 무척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건 너무 위험해요! 아무리 소강상태라 해도 현재도 프랑스와 전쟁 중이잖아요.”
“맞아요. 물론 프랑스와의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사실은 알지만...”
어머니들의 그런 반응에 정안문과 정나리가 슬쩍 눈치를 보자 정성국은 아이들에게 괜찮다는 듯 손짓하며 말했다.
“알지. 뭐 정말 프랑스가 또 함대를 보낼 수 있는가, 그리고 프랑스 함대가 우리 북미왕국의 해군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가는 둘째 치더라도 그랬다간 일정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북미 동해안 지역이 더 안정되면 그때 방문해볼까 생각 중이야.”
정성국의 설명에 전아라와 하얀 들꽃은 안도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걱정할 필요 없어. 호위대하고 함께 움직이니 별일 없을 거야.”
정성국의 말에 하얀 들꽃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당분간 전하의 업무를 제가 대신할까요?”
물론 하얀 들꽃이 꽤 오랫동안 업무에 손을 떼긴 했지만, 간간이 정성국의 집무실에 간식거리를 가져다주러 방문하면서 정성국의 업무를 도와준 적은 많았다.
그래서 정성국은 이제 정나리도 아기가 아닌 만큼 혹시 일하고 싶으면 정나리는 유모에게 맡기고 복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지만 하얀 들꽃은 이렇게 가끔 정성국을 돕는 것으로 충분하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었기에 정성국은 그녀의 의견을 존중했었고.
헌데 정성국이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하얀 들꽃이 업무를 맡아보겠다고 하니 정성국은 정말 괜찮겠냐는 표정으로 하얀 들꽃을 바라보았고 하얀 들꽃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전아라는 옆에서 쿠키를 오물거리는 전아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당분간 개인 연구는 조금 쉬고 내가 나리까지 신경 쓰면 되니까 나리 걱정은 하지 말고.”
“음...어차피 내가 자리를 비우면 업무 대부분은 청장들이 도맡아 하니까 하얀 들꽃이 확인만 좀 해줘.”
“그럴게요.”
그렇게 대화를 마치자 정안문이 잽싸게 정성국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소자도 함께 가면 안 되겠습니까?”
정성국은 자신을 바라보는 정안문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보고 피식 웃었다.
“왜? 기차를 타고 싶어서?”
“...옙.”
정성국은 정안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금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이번 순행에 네가 참여하긴 어렵겠구나. 너까지 움직이면 청장들이 반대할 것이 뻔하거든. 그리고 이번 일정은 너무 길고.”
정성국의 후계자가 바로 정안문이었기에 정성국과 정안문이 함께 전쟁 중에 국경이라고 할 수 있는 새진주를 방문한다고 하면 안전과는 별개로 청장들이 반대할 것이 분명했다.
“아...”
정안문은 정성국이 안 된다고 하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고 이에 정성국은 그런 정안문이 귀엽기도 하고 아직 애인데 떼를 쓰지 않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해서 정안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입을 열었다.
“대신 다녀와서 밀린 업무를 해결한 후에 가족 모두와 기차를 타고 저 새나주까지만이라도 다녀오자꾸나. 그때까지 조금 기다릴 수 있겠지?”
이에 정안문은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아버지!”
“대신 내가 없는 동안 네가 나리를 잘 돌봐주렴. 어머니 말씀도 잘 듣고. 알았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정안문은 씩씩하게 대답하고 옆에서 쿠키를 빠르게 해치우던 정나리에게 다가갔고 전아라는 살짝 목소리를 낮추고 걱정스럽다는 듯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안문이와 그런 약속을 하셔도 되겠어요? 제가 잘 타일러 볼까요?”
정성국이 워낙 업무에 치여 산다는 것은 전아라도 잘 알고 있었기에 며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 한동안 고생할 것이 걱정스러운 전아라였다.
이에 정성국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생각해보면 저 아이들은 이 궁궐이 전부잖아? 그러니 이렇게 시간을 내서 간간이 궁 밖을 나가 봐야지. 그리고 너도 새나주에 있는 원유정제공방은 내심 가보고 싶어 했잖아. 일단 새진주에 다녀오고 나서 밀린 일거리 다 해치운 후에 한 2, 3일 빼서 다녀오자. 뭐 볼거리는 많지 않겠지만.”
정성국의 대답에 전아라와 하얀 들꽃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최대한 업무를 처리해 놓을게요. 그리고 다녀와서도 당분간 전하를 도와드릴게요!”
정성국은 그런 전아라와 하얀 들꽃의 반응에 아차 싶었다.
‘아...궁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가끔은 가족들과 외유를 하긴 해야겠구나. 하얀 들꽃은 몰라도 전아라도 궁 밖을 나간다는 것을 반길 줄은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