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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28화 (328/850)

328화

잉글랜드 대사가 알현실을 나가자 루이 14세는 은근슬쩍 자신의 눈치를 보는 시종과 병사들을 모조리 물리고 왕좌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처음 잉글랜드 대사가 전해준 아브라함 듀케인의 편지를 보고 당황하고, 또 분노했던 루이 14세였지만 알현실에서 홀로 앉아 아브라함의 편지를 꼼꼼히 읽어보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일단 프랑스는 루이 14세의 할아버지인 앙리 4세 시절 낭트 칙령을 선포해 공식적으로는 가톨릭교도들과 개신교도들이 동등한 권리를 보장했지만, 루이 14세 즉위 이후 꾸준히 개신교도들을 탄압해 개신교도들의 개종하도록 부추겼다.

그런 루이 14세가 독실한 개신교도인 아브라함을 신임하고 이번에 구성한 프랑스 대규모 함대를 맡긴 것은 오로지 그의 출중한 능력 때문이었다.

비록 최근 네덜란드와의 해전에서 체면을 좀 구기긴 했지만, 네덜란드 해군이 강력하다는 것은 루이 14세도 잘 알고 있었고 몇 번의 패배에도 피해는 최소화했던 지휘관이 바로 아브라함이었기에 루이 14세는 그를 믿은 것이다.

그런 아브라함이 북미왕국의 해군과 해전을 벌이고 전열함이 남아있는데도 결국 항복했다면 그건 북미왕국의 해군이 네덜란드의 해군 이상이라는 뜻이었기에 루이 14세는 현 상황을 직시한 것이다.

‘강력한 해군을 자랑하는 네덜란드와 그보다 더 강력한 북미왕국과 전쟁 중인 상황에서 우리 프랑스 해군의 전력은 4할이 사라진 셈이니...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한다?’

그렇게 루이 14세가 옥좌에 앉아 고민하고 있을 때, 장 바스티스 콜베르가 종이를 들고 창백한 표정으로 허겁지겁 알현실을 들어왔기에 루이 14세는 생각을 멈추고 콜베르를 보고 입을 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시종에게 이야기를 들었나 보군?”

“예? 그게 무슨...?”

루이 14세는 자신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콜베르를 보고 생각해보니 시종이 불러 왔다면 이렇게 빨리 올 수는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 질문을 던졌다.

“음? 그럼 따로 보고할 것이 있어서 온 건가?”

그제야 콜베르는 자신이 루이 14세를 만나기 위해 급히 달려온 것을 깨닫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 서인도제도에서 올라온 긴급 보고이옵니다. 북미왕국의 함대가 생도맹그와 토르투가를 공격했다는 보고이옵니다.”

“하. 잉글랜드 대사가 한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었단 말이지?”

콜베르는 루이 14세가 놀라기보다는 탄식하며 손을 들어 머리를 부여잡는 루이 14세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잉글랜드 대사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전해주었다는 뜻입니까?”

“그렇네. 일단 그 보고서부터 줘보게.”

루이 14세의 재촉에 콜베르는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시종이 보이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루이 14세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가져온 보고서를 넘겼다.

루이 14세는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으음...생도맹그와 토르투가의 모든 선착장이 철저하게 부서졌고 북미왕국 함대가 추가로 공격할 가능성이 있기에 당장 복구는 어려워 일단 서인도제도에 배치된 모든 군함을 가까운 세인트크로이 섬에 배치하겠다라...이게 의미가 있나? 어차피 북미왕국의 함대를 막지 못하는데?”

냉소하는 루이 14세의 말에 콜베르는 움찔했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분명 북미왕국의 함대를 막긴 쉽지 않아 보입니다만...그렇다고 북미왕국이 재차 서인도제도의 다른 프랑스 영토를 공격할지도 모르는데 물러날 수야 없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루이 14세는 콜베르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가뜩이나 듀케인 제독이 지휘했던 함대가 전부 사라졌는데 이 배들조차 북미왕국의 함대를 막겠답시고 덤볐다가 침몰하면 뒷일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루이 14세의 말에 콜베르는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루이 14세를 바라보았다.

“예?!”

그런 콜베르를 보고 루이 14세는 옥좌 옆에 있던 아브라함의 편지를 턱으로 가리켰다.

“저걸 읽어보게.”

이에 콜베르는 조심스럽게 루이 14세에게 다가가 편지를 집어 다시 물러난 후 편지를 읽으면서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이...이건...말도...”

현실을 부정하는 콜베르를 보고 루이 14세는 설마 자신도 잉글랜드의 대사 앞에서 저런 반응을 보였나 싶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 읽어보았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네만...최소한 그 인장이나 필적은 듀케인 제독의 것이지 않은가.”

루이 14세의 말에 더는 이 편지를 부정하지 못한 콜베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루이 14세를 바라보았다.

“맙소사...그럼 정녕?”

이에 루이 14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누벨 프랑스를 탈환하라고 보낸 대규모 함대와 병력은 사라진 셈이네.”

“아아...”

루이 14세의 대답에 콜베르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해상 패권의 장악과 무역로의 보호를 위해 루이 14세를 설득해 프랑스 해군을 키웠는데 이 강대한 프랑스 해군이 단 한 번의 해전으로 전력이 절반 가까이 사라진 셈이니 콜베르로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콜베르는 해군의 일도 관여하는 만큼 만약 자신의 정적들이 이 해전의 결과를 빌미로 공격한다면 실각할 수도 있었고.

해서 참담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을 때 루이 14세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자네를 급히 찾은 것은 이 사실에 좌절하라고 찾은 것이 아닐세. 당장 대책을 세워야 하니 찾은 것이지.”

콜베르는 그제야 자신이 루이 14세와 대화 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루이 14세의 반응을 볼 때 루이 14세가 당장 이번 일을 빌미로 자신을 내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 했다.

“아...참으로 송구스럽습니다. 국왕 폐하.”

루이 14세는 콜베르가 정신 차린 듯 하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고. 북미왕국과는 협상해야겠지?”

아브라함의 편지 끝부분에는 북미왕국의 군함이 너무나 대단해 현 프랑스 해군으로는 북미왕국 해군을 감당할 수 없으니 무조건 북미왕국과 협상을 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고 이미 프랑스 해군의 절반에 가까운 전력이 북미왕국 해군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한 상황에서 계속 북미왕국과 전쟁을 할 수야 없는 법이었기에 루이 14세가 내심 결정을 내리고 묻자 콜베르는 잠시 고민하면서 아브라함의 편지를 바라보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 외엔 없는 것 같습니다.”

“쯧. 결국, 누벨 프랑스를 포기할 수밖에 없나.”

생각보다 담담한 루이 14세의 반응에 콜베르는 조심스럽게 첨언했다.

“그 외에도...서인도제도의 몇몇 섬도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배상 문제와 포로의 몸값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일단 북미왕국에서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누벨 프랑스의 총독이 먼저 북미왕국을 공격한 만큼,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누벨 프랑스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북미왕국이 제대로 인정할 리 없는 만큼 우리가 누벨 프랑스를 포기하는 선에서 협상을 마치긴 어려워 보입니다.”

북미왕국은 아카풀코 조약 이후 북아메리카의 권리는 오로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해온 만큼 콜베르의 말에 일리가 있었기에 루이 14세가 고개를 끄덕이자 콜베르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거기에 포로만 하더라도 약 3만에 달하는 만큼 이들의 몸값까지 생각하면 정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급해야 하겠지요. 문제는 현재 네덜란드와의 전쟁으로 인해 재정 상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해군을 재건할 때까지는 무역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이 예상되는 만큼 전쟁 배상금을 귀금속으로 지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콜베르의 말이 끝나자 루이 14세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끙...그러고 보니 해군의 재건 문제도 있었군.”

이에 콜베르는 루이 14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프리깃함 10척과 전열함 46척이 사라진 셈이라...이를 다시 건조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겁니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도 꽤 걸리겠지. 젠장.”

그런 루이 14세의 반응에 움찔한 콜베르는 슬쩍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최선은...북미왕국과 협상해 나포된 전열함들을 돌려받는 것입니다만...”

이에 루이 14세는 그게 가당키는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국력에서 차이가 나면야 적당히 겁박해 돌려받을 수도 있겠지만 북미왕국을 상대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봐야 계속 싸우자는 소리나 다름없었으니.

“북미왕국이 바보도 아니고 나포한 선박들을 돌려주겠나?”

“그렇지요. 그러니 차선으로 저들과 협상해 적당한 가격에 사들이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으음...적당한 가격에 사들인다? 그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콜베르의 말에 루이 14세가 나쁘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자 콜베르는 급히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저들이 운용하는 배와는 다르니 어쩌면 저들은 나포한 배를 자리만 차지하는 골칫덩이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잘만 협상한다면 적당한 가격에 사들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해군의 공백을 당장 메울 수 있지요.”

그렇게만 된다면야 당장 해군을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으니 자신들에게 나쁠 것은 없었지만 문제는 가뜩이나 전쟁 배상금과 포로의 몸값을 내어줘야 하는데 여기에 배를 되사는 비용까지 추가되는 만큼 루이 14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와 중얼거렸다.

“하...그럼 어디까지 내어줘야 하나...”

이에 콜베르는 루이 14세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생도맹그를 넘겨주는 것이 최선입니다만...”

그 말에 루이 14세는 표정을 확 구기면서 콜베르를 바라보았다.

“광활한 누벨 프랑스를 포기하는 것도 아까운 판에 우리가 소유한 서인도제도의 가장 큰 섬마저 내어주자는 뜻인가?”

“송구합니다. 국왕 폐하.”

자신의 반응에 잔뜩 위축된 콜베르를 보고 루이 14세는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쯧. 됐네. 왜 생도맹그를 넘겨주는 것이 최선인지 설명이나 해보게.”

콜베르는 루이 14세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생도맹그는 국왕 폐하께서 소유하신 서인도제도의 섬 중 가장 넓은 땅입니다. 그런 만큼 가치도 높고요. 그런 만큼 생도맹그만 넘겨주는 것으로 북미왕국과 종전 협상을 맺을 수 있다면 나쁠 것은 없습니다. 특히 생도맹그 해안가는 북미왕국 함대에 의해 이미 파괴된 상태라 이를 복구하는데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테니...”

프랑스가 정착지를 건설한 섬 대부분은 소앤틸리스 제도에 속해 있었기에 섬의 크기가 무척 작은 편이었고 그 때문에 프랑스는 에스파냐와 대립하면서까지 대앤틸리스 제도에서 두 번째로 커다란 섬인 히스파니올라 섬 일부를 점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들여 만든 항구 대부분이 북미왕국의 공격 때문에 철저히 박살 난 만큼 당장 이를 복구하는데 추가로 비용을 들이기보다는 북미왕국에 넘겨주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낫다는 콜베르의 이야기에 루이 14세가 중얼거렸다.

“그럴 바엔 그냥 북미왕국에 넘겨주자는 거군.”

“그렇습니다. 다만 북미왕국은 에스파냐와 꽤 친하다는 겁니다.”

“그게 왜? 아...북미왕국에서 우리가 주장하는 생도맹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의 지적에 의아한 표정이었다가 그가 걱정하는 것을 눈치채자 콜베르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꽤 곤란해지지요.”

콜베르는 곤란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루이 14세가 생각하기에 저들이 생도맹그를 협상 대상에 넣지 않는다면 오히려 자신들에겐 이득이라고 생각해 말했다.

“흠...솔직히 저들이 생도맹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로선 나쁠 것은 없어.”

하지만 콜베르의 생각은 다른지 이에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답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이번 해전의 결과를 에스파냐나 잉글랜드는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그 말에 루이 14세는 표정을 조금 굳히고 콜베르를 바라보았다.

“...잉글랜드나 에스파냐가 생도맹그를 노릴 수도 있다고 보나?”

“잉글랜드는 북미왕국에 북아메리카에 건설한 모든 권리를 넘긴 이후로 더 적극적으로 서인도제도에서 영역 확장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파냐도 당장은 본국의 재정 상황이 무척이나 좋지 못해 전쟁보다는 우리의 확장을 불편한 기색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만 최근 북미왕국 간의 교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면서 상황이 많이 나아지지 않았습니까.”

콜베르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루이 14세는 신음을 흘렸다.

“으음...그런 상태에서 당장 우리 프랑스 해군의 전력이 깎여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고 보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최대한 빠르게 북미왕국과 협상해야 합니다.”

그제야 루이 14세는 콜베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파악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소유권을 상실하기 전에 넘겨야 한다는 건가?”

“송구합니다. 국왕 폐하.”

“젠장...”

결국, 콜베르는 잉글랜드나 에스파냐를 상대로 생도맹그를 지키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과 같았기에 루이 14세는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다 루이 14세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콜베르를 보고 질문을 던졌다.

“후. 그래. 자네 예상대로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빠르게 북미왕국과 협상은 해야 할 것 같아. 그러니 이야기해보게. 만약 저들이 생도맹그의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땐 어찌할 건가?”

“차선으로 다른 섬들을 내어줘야겠지요. 뭐 면적만으로는 서인도제도의 다른 섬들을 다 합쳐도 생도맹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섬들입니다만...”

콜베르의 말에 루이 14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다 넘겨 줄 수야 없는 법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무인도를 제외한 정착지가 건설된 섬 서너 곳을 넘겨준다면 저들도 만족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콜베르의 대답에 루이 14세는 잠시 고민했지만, 괜히 시간 끌어봐야 좋을 것은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알겠네. 그럼 빠르게 전권 대사를 북미왕국으로 보내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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