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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24화 (324/850)

324화

네덜란드 사절단의 총 책임자인 얀센 반 마이어는 웅크린 늑대와의 기나긴 교역 협상을 마치고 웅크린 늑대의 집무실로 이동해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한참 북미왕국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묻던 얀센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슬쩍 웅크린 늑대에게 말을 건넸다.

“그보다 프랑스의 최신 전열함마저 상당수 노획했으니 북미왕국 해군은 더욱 강력해지겠군요. 이 기회에 북미왕국도 서인도제도로 진출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네덜란드가 소유한 서인도제도의 섬은 모두 소앤틸리스 제도에 속해 있었고 프랑스가 소유한 섬 역시 대부분은 이 소앤틸리스 제도에 속해 있는 만큼 네덜란드로서는 북미왕국이 프랑스와의 종전 협상에서 프랑스 소유의 섬 일부를 넘겨받아 서인도제도로 진출했으면 했다.

그동안 이곳에서 지내며 정보를 수집하고 협상하면서 웅크린 늑대와 대화를 나누어본 결과 북미왕국은 북미 대륙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지 다른 지역엔 큰 관심이 없었기에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불어 북미왕국의 해군은 무척 강력하고 해적을 싫어했기에 북미왕국이 소앤틸리스 제도에 진출한다면 자연스럽게 해적들이 사라질 테니 무역에 집중하는 네덜란드로선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런 얀센의 부추김에서 웅크린 늑대는 얀센이 무엇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지 짐작하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음? 아...글쎄요. 북미 대륙만 해도 드넓은데 굳이 서인도제도까지 진출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요. 더불어 프랑스가 소유한 섬은 다 자잘한 섬들이라...”

“하하하. 자잘한 섬들이라. 뭐 북미왕국 입장에서보면 그렇긴 하겠군요. 하지만 생도맹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비록 생도맹그는 히스파니올라 섬 서쪽 지역에 불과했지만, 그것만 하더라도 소앤틸리스 제도에 그 어떤 섬보다 큰 지역이었기에 이를 언급하자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현재 프랑스가 히스파니올라 섬 일부를 점유하고 있을 뿐이지 히스파니올라 섬은 엄연히 에스파냐의 소유잖습니까. 굳이 우방국의 영토를 노리고 싶지는 않군요.”

“그렇습니까.”

다른 유럽의 국가였다면 이 기회에 생도맹그를 차지하기 위해 애쓸 것이 분명했는데 북미왕국은 북미 대륙이 워낙 넓기 때문인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북미왕국의 반응에 더욱 북미왕국이 믿을만하다고 여긴 얀센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웅크린 늑대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전열함은 우리가 이용하지 않고 다시 프랑스에 넘겨줄 생각이라 해군력이 부족하기도 하고요.”

“예? 아니. 그게 무슨...?!”

웅크린 늑대의 말에 얀센은 당연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대서양을 건넌 프랑스 함대가 모두 항복함에 따라 프랑스 해군은 반 토막이 난 셈이고 이를 이용해 승기를 잡고 프랑스를 압박해 좋은 조건으로 종전 협상을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북미왕국에서 프랑스에 전열함을 다시 돌려준다면 당연히 프랑스는 북미왕국은 몰라도 네덜란드와 종전 협상을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이에 얀센은 심각한 표정으로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잠시만요. 엄연히 해전을 통해 북미왕국이 노획한 전열함을 프랑스에 돌려주시겠다는 뜻입니까?”

왜 노획한 전열함을 사용하지 않고 돌려줄 생각을 하느냐는 비난의 뜻이 담긴 눈빛을 보내는 얀센을 보고 웅크린 늑대는 담담한 목소리로 북미왕국의 입장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음...이번에 노획한 프랑스 전열함은 꽤 비효율적인 부분이 있어 그냥 운용할 수는 없으니 천상 전열함을 개조해야 하는데...그러자면 배를 거의 분해한 후에 다시 조립해야 하는 상황이라 무척 비효율적이라서 말입니다. 그런 노력과 비용을 들일 바엔 그냥 새로 전선을 건조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저 많은 전열함을 선착장 한 편에 내버려 두고 썩힐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 말에 얀센은 북미왕국의 배는 돛도 노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왜 프랑스에서 건조한 최신 전열함을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며 개조해야만 써먹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 것인지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북미왕국이 프랑스에 전열함을 돌려주면 네덜란드가 위협받을 수 있었기에 얀센은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다시 생각해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귀국의 입장이 이해가 되긴 합니다만...그렇다고 노획한 전열함을 돌려주시겠다고요? 그건 아니잖습니까.”

이에 웅크린 늑대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그냥 돌려준다기보단 적당한 대가를 받고 넘겨줄 생각입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매사추세츠에 정박해 있는 전열함들은 4함대가 전쟁을 통해 노획한 물품이니 그냥 돌려줄 수야 없지요. 그리고 프랑스는 당장 전열함 40척이 사라져 해군력에 공백이 생긴 상황이니 새로 건조하기보단 꽤 괜찮은 가격을 제시할 것 같기도 하니까요.”

“으음...”

결국, 북미왕국도 프랑스가 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아는 만큼 자신들에게 필요 없는 전열함을 비싸게 팔아 이득을 챙기겠다는 뜻이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얀센은 문득 괜찮은 생각이 떠올라 급히 고개를 들어 웅크린 늑대를 바라보고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이야기를 프랑스 외교관에게 하신 겁니까?”

아직도 프랑스 외교관과는 만나지도 못한 상황이었기에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과 제대로 교류한 적이 없기에 아무런 의견도 나누지 못한 상황입니다. 생도맹그를 공격한 이후 잉글랜드 측에 다시 한번 중재를 요청하기는 했습니다만...답변이 오려면 조금 더 걸리겠지요.”

웅크린 늑대의 대답에 얀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전열함의 판매 문제는 조금만 미뤄주시지 않겠습니까?”

얀센의 말에 웅크린 늑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가 얀센에게 전열함의 처리에 관한 북미왕국의 입장을 슬쩍 흘린 것은 쓸모없는 전열함을 더 비싸게 팔아먹기 위함이었다.

북미왕국의 입장에서야 누가 사 가든 비싸게만 사가면 그만이었고 네덜란드라면 프랑스보다 더 비싸게 전열함을 사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고 보았기에.

하지만 웅크린 늑대는 이를 애써 숨기며 고개를 갸웃하고 얀센을 바라보았다.

“예? 그게 무슨...”

“결국, 귀국의 의도는 프랑스 전열함이 필요 없으니 프랑스에 되팔겠다는 건데...굳이 프랑스에 되팔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얀센의 말에 웅크린 늑대는 내심 환호했지만, 애써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흐음...그 말씀은 전열함을 귀국에서 사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내심 긴장하고 있던 얀센은 웅크린 늑대의 말에서 가격만 맞는다면 팔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안도하며 당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본국에 이야기해봐야겠지만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아국이 노획한 전열함은 총 31척에 달하고 그 중 온전한 전열함만 하더라도 17척에 달합니다. 그 값비싼 전열함 17척을 한창 전쟁 중인 귀국이 구매하실 수 있겠습니까?”

웅크린 늑대의 미심쩍은 눈빛에 얀센은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네덜란드가 얼마나 부유한지 잘 모르시나 보군요.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열함은 값비싼 배였고 북미왕국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선 프랑스가 제시할 금액보다도 높은 금액을 불러야 했으니 생각보다 막대한 자금이 나갈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한 지출을 통해 전쟁을 끝내고도 몇 년간 프랑스를 압박할 수 있다면 충분히 지출할 수 있다고 판단한 얀센이었다.

더불어 루이 14세가 왕이 된 이후 프랑스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으니 이 기회에 해군을 증강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그런 얀센의 대답에 웅크린 늑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언가 좀 아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프랑스와 협상해서 온전한 전열함과 반파된 전열함을 모두 팔 생각이었는데...”

웅크린 늑대의 대답에 얀센은 움찔했다.

전열함 17척을 사들이는 것도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반파된 전열함 14척까지 사들이는 것은 아무리 부유한 네덜란드라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부담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이 요청을 거절하면 북미왕국은 프랑스에 전열함을 팔겠다고 선언할 것 같아 얀센은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리다가 웅크린 늑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으음...아. 혹시 이 사실을 다른 나라에 알리지는 않았겠지요?”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웅크린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얀센은 안도하며 말했다.

“그럼 한 달 정도만 기다려주시지요.”

이에 웅크린 늑대는 돈 많은 호구를 보는 시선으로 얀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일단은 프랑스와 협상하더라도 전열함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후우. 감사합니다.”

* * *

북미왕국과의 협상이 끝나면 곧바로 북미왕국의 배를 타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려 했던 얀센은 일정을 바꿔 새진주에 드나드는 에스파냐 선박에 올라타고 베라크루즈로 이동했다.

베라크루즈에 도착한 후 얀센은 베라크루즈의 관리에게 자신의 신분을 이야기하며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과 만남을 요청했고 안토니오 부왕은 이를 승낙했다.

“그래. 중요한 용건이 있다면서 날 만나기를 원했다는데...무슨 일인가?”

멕시코시티로 이동해 안토니오 부왕과 만난 얀센은 인사를 끝내자마자 바로 용건을 묻는 안토니오 부왕을 보면서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부왕 전하께서는 뉴펀들랜드 섬 인근에서 북미왕국의 해군이 프랑스 해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물론이네만...그걸 네덜란드의 외교관인 자네가 거론하는 이유가 뭔가?”

안토니오 부왕이 어리둥절한 표정이자 얀센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북미왕국 해군은 프랑스 해군의 항복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프랑스 해군의 전열함을 전부 노획했습니다. 제가 뉴펀들랜드 섬에서 북미왕국의 배를 타고 매사추세츠에서 배를 갈아탈 때 선착장 한쪽에 고스란히 정박해 있는 프랑스 전열함을 확인하기도 했었지요. 헌데 북미왕국은 이 전열함을 쓸 생각이 없기에 다시 프랑스에 적당한 대가를 받고 돌려줄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얀센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기겁했다.

그는 프랑스 해군이 약화된 사이 히스파니올라 섬을 완전히 장악할 생각으로 준비 중이었는데 북미왕국이 프랑스와 협상하며 전열함을 돌려주게 되면 뒷감당이 어려울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반응에 얀센은 역시나 싶어 그를 설득하기 쉽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이는 북미왕국 외교관인 웅크린 늑대에게 직접 들은 사안입니다.”

얀센의 대답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안토니오 부왕은 얀센이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눈치채고 중얼거렸다.

“으음...그럼 자네가 날 찾아온 것은...”

“프랑스 전열함이 다시 프랑스에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면 이 전열함을 모조리 우리가 사들이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얀센이 싱긋 웃으며 자신이 방문한 목적을 이야기하자 안토니오 부왕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프랑스 전열함을 사들이자고? 그것도 같이?”

“북미왕국이 노획한 프랑스 전열함만 총 31척입니다. 그중 온전한 배만 17척이고요. 전열함의 가격을 생각하면 갑작스럽게 모두 사들이는 것은 좀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흐음...그건 그렇긴 하지.”

그의 말처럼 갑작스럽게 그 많은 전열함을 사들이면 당분간 재정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얀센이 덧붙였다.

“거기에 북미왕국은 반파된 전열함까지 함께 프랑스에 넘길 생각인 것 같습니다. 선체는 괜찮으니 수리해서 사용하라는 건데...그렇게 되면 프랑스 해군의 공백은 쉽게 메워질 겁니다. 9척 정도야 뭐...”

“으음...”

얀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안토니오 부왕이었고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반응에 얀센은 덧붙였다.

“그리고 이곳에 오다 보니 베라크루즈에 묘하게 병사들이 북적이는 느낌이던데...부왕 전하께서는 이 기회에 히스파니올라 섬을 되찾으시려고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니십니까? 그러자면 훗날을 대비해서라도 전열함을 사들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안토니오 부왕은 얀센의 말을 부정하려다 그가 이미 확신하고 있음을 깨닫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 반파된 전열함까지 함께 사들여 당장 프랑스 해군이 복구되는 것을 막아보자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는 편이 여러모로 낫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얀센이 북미왕국으로 오기 전에 전권을 위임받았다고는 하지만 31척에 달하는 전열함을 모두 사들인다는 계약서에 사인하기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절반 정도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다른 파트너를 고민한 얀센이었고.

결국, 잉글랜드나 에스파냐뿐이었는데 그의 선택은 당연히 에스파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떠나기 전에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 강화할 뜻을 밝히긴 했지만, 잉글랜드와는 그동안 해상 패권을 두고 여러 차례 다툰 만큼 잉글랜드보다는 에스파냐가 더 나아 보였던 것이다.

“흐음...”

안토니오 부왕은 한참을 고민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미왕국은 노획한 전열함을 꽤 비싸게 팔 생각인 듯했기에 자신들이 적당히 바람만 잡아 전열함 가격을 올려버린다면 프랑스는 당장 해군을 어느 정도 복구하더라도 악화된 재정에 당분간 움직이긴 어려울 테니 굳이 막대한 돈을 들여 전열함을 살 필요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가 고갈된 재정을 복구하기 위해 돈이 되는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서인도제도에 집중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안토니오 부왕은 결정을 내렸다.

“좋네. 함께 전열함을 구매하도록 하지.”

이에 얀센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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