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북미왕국으로 떠났던 조선 사절단이 북미왕국을 둘러보고 다시 제물포에 도착했을 때 유철이 주문했던 북미왕국 인쇄기 30대와 함께 복귀했다.
그리고 이 북미왕국 인쇄기는 곧바로 조선에서 책을 출판하고 관리하는 기관인 교서관에 옮겨졌고.
북미왕국의 인쇄기가 마침내 인쇄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태화와 유철은 곧바로 교서관을 방문했다.
교서관은 수많은 관리로 꽤 북적거렸는데 이는 작년에 북미왕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워낙 북미왕국의 기술력에 대해 감탄하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북미왕국의 기물은 세계 최고라는 이야기를 하는 통에 많은 사람이 북미왕국을 궁금해하는 상황에서 북미왕국을 다녀온 자들이 쓴 여러 견문록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며 인기를 끌 때 삽화까지 제대로 그려 넣은 유철의 북미왕국 견문록이 발간되자 며칠간 한양의 양반들은 북미왕국 견문록을 구하기 위해 난리를 칠 정도였다.
이렇게 유철의 북미왕국 견문록이 인기를 끌면서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이 사용한다는 기물에 관한 관심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을 더욱 증폭시킨 것이 공조에서 만든 증기기관이었다.
북미왕국이 건네준 설계도를 연구해 몇 번이고 도전한 끝에 공조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작동하는 증기기관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기술의 부족으로 제대로 된 효율은 나오지 않았고, 아직은 이를 활용할 방법이 마땅치 않아 증기기관이 동력원이라는 것을 떠올려 단순히 방아와 연결해 작동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를 친히 관람했었던 이연과 조정 대신들은 증기기관의 효용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북미왕국의 지식과 기물에 관한 관심이 더욱 커진 상황에서 북미왕국을 다녀온 조선의 사절단이 복귀하면서 북미왕국의 인쇄기를 30대나 가져왔으니 북미왕국의 기물에 관심이 많던 관리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교서관을 찾은 것이다.
그런 광경에 정태화와 유철은 무척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정태화와 유철이 방문한 것을 눈치챈 교서관의 제조가 다가왔다.
”영상대감과 예판 대감께서도 오셨습니까.“
이에 유철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와야지. 저 북미왕국의 인쇄기를 들여오기 위해 북미왕국과 협상한 것이 나인데.“
유철의 대답에 교서관의 제조가 슬쩍 미소지을 때 정태화가 말했다.
”예판이 하도 북미왕국의 인쇄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통에 궁금해서 와 봤네. 혹시 인쇄한 것을 볼 수 있겠는가?“
이에 교서관의 제조는 들고 있던 종이를 곧바로 정태화에게 건넸고 정태화는 이를 받아들면서 물었다.
“이것이 바로 북미왕국의 인쇄기로 인쇄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영상 대감. 그것도 고르고 고른 것이 아니고 그냥 방금 인쇄된 결과물이지요.”
“호오...비교적 깔끔하게 인쇄되었군.”
정태화는 북미왕국의 인쇄기를 사용해 인쇄된 종이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조선의 금속 활자로 인쇄할 경우 이렇게 깔끔한 결과물이 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북미왕국의 인쇄기였기에 한자가 아닌 한글로, 세로쓰기가 아닌 가로쓰기로, 그것도 좌에서 우로 인쇄되어 있었지만 최근 북미왕국의 책을 많이 접한 터라 딱히 어색하지는 않았다.
정태화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인쇄된 종이를 바라보다가 교서관의 제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실제 북미왕국의 인쇄기를 사용해보니 어떠한가.”
그 질문에 교서관의 제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북미왕국의 인쇄기라는 기물의 성능이 생각보다 대단합니다.”
“그래?”
“일단 인쇄하는 것이 무척 편합니다. 세세하게 힘 조절할 필요 없이 그냥 저기 보이는 손잡이를 당기면 위쪽의 판이 내려와 인쇄되니까요. 더불어 활자가 완벽하게 고정되는지라 인쇄 중에 흔들림이 전혀 없다는 것 또한 대단하지요.”
“으음...”
조선의 금속 활자는 마치 탁본을 뜨는 것처럼 종이 위를 두드려 먹을 묻혀야 했기에 종이가 흔들리거나 문지르는 도중 힘을 주게 되면 글자가 번져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더불어 금속 활자끼리 맞물리는 부분을 고정하기 위해 활자의 틈새를 나무로 메우기도 했지만, 저 북미왕국의 인쇄기처럼 완벽하게 고정되지는 못했기에 인쇄가 쉽지 않았다.
허나 북미왕국의 인쇄기는 그러한 부분이 모두 개선되어 있었기에 당연히 사용하기 편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 자세히 설명하자 정태화는 놀란 표정을, 유철은 무척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때 제조가 인쇄기 옆에 있는 잉크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소관의 생각으로는 저 인쇄기라는 기물보다 북미왕국에서 가져온 인쇄용 잉크라는 것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예. 먹과는 달리 조금 끈적한 편이라 그런지 글자가 번지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덕분에 기존의 금속 활자처럼 인쇄 후 결과물을 확인할 필요 없이 빠르게 인쇄하면 그만이지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정태화는 한쪽에서 관원들이 북미왕국 인쇄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그런가. 허면 저 인쇄기를 복제할 수는 있겠는가?”
이에 교서관의 제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인쇄기를 분해해 제대로 된 구조를 확인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 그래?!”
이에 정태화와 유철은 반색했고, 그러한 반응에 교서관의 제조는 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인쇄기를 복제한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북미왕국 인쇄술의 핵심은 저 인쇄기가 아닌 이 인쇄용 잉크입니다. 헌데 이걸 복제하려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떤 재료로 만드는지도 모르겠고.”
교서관 제조의 말에 유철이 입을 열었다.
“음...기존에 사용하던 먹을 사용하면...?”
이에 교서관 제조는 이미 해본 듯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존의 금속 활자보다는 조금 낫긴 합니다만...그래도 번짐이 심한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북미왕국에서 무조건 저 인쇄용 잉크를 계속 사와야 한다는 소리였기에 정태화는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유철이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 인쇄기를 복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딥니까. 잉크야 싼 편이니 북미왕국에서 사 오면 그만이지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긴 정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긴 하군요. 허면 분해용으로 한 대를 뺀 나머지 인쇄기로 당분간 북미왕국에서 가져온 서적들을 인쇄하면 되겠군요.”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정태화는 유철과 대화를 나눈 후 교서관의 제조를 보고 질문을 던졌다.
“헌데 저 인쇄기를 연구해 복제하는 것은 얼마나 시간이 걸리겠는가?”
“단순히 구조를 파악해 복제하면 그만이기에 인쇄기 자체의 복제는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활자를 저렇게 작고 정교하게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비용도 많이 들 테고.”
그러면서 작고 정교한 금속 활자를 대량으로 만드는 비용까지 설명하자 정태화는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리고 정태화나 유철은 북미왕국이 무척이나 헐값에 인쇄기를 넘겼다는 사실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북미왕국에서는 인쇄기에 사용되는 금속 활자도 함께 만들어 보냈는데 이것을 직접 만들려니 당장은 도저히 만들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이에 유철은 잠시 고민하다 정태화를 보고 말했다.
“어차피 당분간은 북미왕국의 서적을 찍어낼 생각이니 굳이 새로운 인쇄기를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의 이야기로는 하루에 인쇄기 하나당 1500장을 인쇄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여기 있는 인쇄기만으로 하루에 무려 45000장이나 인쇄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 해도 당분간은 충분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북미왕국의 인쇄기로는 북미왕국의 방식으로밖에 책을 만들 수 없기에 당장 북미왕국의 책을 찍어내는 것은 큰 문제가 없어도 기존의 조선식 서책을 인쇄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 때문에 직접 인쇄기를 복제해보고 연구해 조선에 맞는 인쇄기를 만드는 것이 어떨까 싶었지만 당장 수많은 활자를 만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에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인 정태화였다.
“...그렇긴 하군요. 허면 일단은...저 인쇄기 하나를 분해해 구조를 파악해 설계도를 만들어 두게. 그리고 이를 통해 조선에 실정에 맞도록 개조할 수 있을지도 연구해보고.”
“알겠습니다. 영상 대감.”
* * *
새진주를 떠난 2함대는 플로리다 반도 남쪽에 건설한 작은 보급항에서 연료를 보급한 후 곧바로 남동쪽으로 항해했다.
일단 에스파냐와는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기에 쿠바 섬이 보이자 해안가를 따라 동쪽으로 항해하다 쿠바 섬이 멀어지기 시작하자 조심스럽게 동쪽으로 항해했고.
그러다 마침내 히스파니올라 섬을 발견하고 해안가를 따라 빠르게 동진하기 시작했다.
김봉길은 히스파니올라 섬을 발견했을 때부터 갑판에 나와 망원경으로 해안가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흐음...저곳도 작은 선착장에 불과하군. 프랑스 전선도 보이지 않고. 기껏해야 조그만 수송용 범선뿐인가.”
생도맹그의 해안가 인근의 마을과 그 마을에 건설된 선착장을 살펴본 김봉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발견한 선착장 세 곳에는 전부 작은 어선이나 물자를 수송하는 조그마한 범선만이 전부였기에 이 해역에 진입하면 곧장 프랑스의 함대와 전투를 벌이지 않을까 기대했던 김봉길로서는 맥빠질 수밖에 없긴 했다.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부관은 슬쩍 미소를 지으면서 물어보았다.
“허면?”
이에 김봉길은 뭐하러 질문을 던지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단 무시하지.”
“알겠습니다.”
부관이 부함장에게 명령을 전달하자 곧 김봉길이 탑승한 지급 전선에 깃발이 올라왔고 2함대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동쪽으로 항해하기 시작했다.
부관이 김봉길에게 돌아오자 김봉길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에스파냐의 이야기론 프랑스 함대가 이 해역을 순찰한다고 들었는데...안 보이는군. 시기가 맞지 않은 모양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섬이 바로 서인도제도 해적들의 소굴이라는 토르투가 섬인데 해적들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지금 2함대는 히스파니올라 섬과 토르투가 섬 사이의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해적들의 소굴이라 알려진 토르투가가 보였지만 역시나 조용했기에 김봉길이 툴툴거리자 부관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뻔히 이 함대가 북미왕국의 함대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섣불리 덤비기야 하겠습니까?”
북미왕국이 멕시코만에 진출한 이후 북미왕국 해군에 의해 서인도제도의 해적들은 처참하게 당했고 그 때문에 북미왕국 해군이 순찰하는 해역엔 얼씬도 하지 않는 해적들이었다.
더불어 북미왕국 소속의 배들은 돛도 노도 없이 삼태극기만을 휘날리고 있었기에 멀리서도 북미왕국 소속의 배라는 것을 알아보기 쉬웠고.
그런 만큼 해적들이 섣불리 덤빌 리는 없다고 생각한 부관의 말에 김봉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저들은 프랑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프랑스와 전쟁 중이라는 사실과 이대로 가면 카프 프랑수아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테니 어떻게든 막으려 들 줄 알았지.”
생도맹그 북쪽 해안가에 위치한 카프 프랑수아는 현재 생도맹그의 중심지나 다름없었고 2함대는 동쪽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으니 토르투가 섬의 해적들도 2함대의 목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상황인 만큼 토르투가 섬의 프랑스 관리가 해적들을 압박해 해적들이 공격할 수도 있다고 보았고.
하지만 토르투가 섬 남쪽의 항구에 정박해 있는 해적선이나 사략선으로 짐작되는 선박들은 움직일 기미가 없어 보였기에 김봉길이 아쉽다는 듯 투덜거리자 부관이 대꾸했다.
“지금 덤비면 저희와 그대로 맞붙어야 하는데 해적들이 과연 그러겠습니까? 아마 공격하더라도 기회를 보아서 공격하겠지요.”
“기회라...그럼 시야 밖에서 천천히 따라오다가 우리가 카프 프랑수아를 공격할 때 뒤에서 기습할 가능성이 크겠군.”
김봉길의 말에 부관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습니다. 아니라면 뭐...카프 프랑수아를 공격하고 돌아갈 때 토르투가 섬에 들러 포탄을 먹여주면 그만이지요.”
이에 피식 웃은 김봉길은 망원경을 품 안에 넣고 하늘에 떠 있는 해의 방향을 머릿속에 계산해보고 이대로 아무런 방해가 없다면 해가 지기 전에 카프 프랑수아에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관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건 그래. 허면 지금처럼 대열을 유지하고 전속력으로 카프 프랑수아로 이동하지. 그리고 도착하는 즉시 카프 프랑수아를 공격할 테니 미리 전투 준비하라고도 알리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