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어? 아니! 화선이 왜 지금 돌격을!”
아브라함은 지금껏 전열함을 방패 삼아 포탄을 피하며 접근하던 화선들이 일제히 돌격하는 모습을 보고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아브라함은 분명 50m 정도 근접했을 때나 돌격하라고 이야기했는데 아무리 보아도 100m는 넘는 거리였기에.
“어느 정도 가까워졌으니 돌격 명령을 내린 것 같습니다만...”
화선이 일제히 돌격한 것을 보면 분명 전열함에서 명령을 내렸을 것이 분명했기에 함장은 애써 좋은 쪽으로 이야기했지만, 아브라함은 탄식했다.
“아아...저려면 안 되는데...”
“그래도 거리가 가까우니 괜찮을...”
이에 아브라함은 손을 들어 함장의 말을 막고 말했다.
“저들의 재장전 시간을 생각하면 화선이 가까이 근접하기 전에 2번에서 3번은 포격할걸세. 과연 그 포격을 버틸 수 있다고 보는 건가?”
북미왕국 군함에 장착된 속사포는 상상 이상이었고 자폭을 위해 최대한 가볍게 만든 비교적 작은 화선은 북미왕국의 포탄에 명중하는 즉시 박살 날 거라는 것은 함장도 충분히 짐작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심각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고민하다 함장에게 명령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네. 바로 깃발을 올리게. 당장 모든 전열함은 최대한 속도를 내서 남하하고 프리깃함은 작전대로 우회하도록.”
“예? 아...알겠습니다. 제독님.”
그사이 어떻게든 가까이 붙으려던 화선은 북미왕국의 포격으로 인해 모두 침몰하고 배를 조정하기 위해 화선에 올라탔던 용감한 병사들은 미처 탈출할 기회도 잡지 못하고 고혼이 되었기에 아브라함은 다시 한번 탄식했다.
“하아...역시...”
그렇게 탄식하던 아브라함은 북미왕국의 함대가 화선을 공격하는 사이 어느 정도 접근한 전방의 전열함들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결심을 내리고 함장에게 명령했다.
“함장. 붉은 깃발도 올리게.”
아브라함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몇 가지 약속해둔 것이 있었는데 그중 붉은 깃발이 올라오면 뒤쪽의 수송선들은 일제히 전장을 이탈해 가까운 뉴펀들랜드 섬에 병력을 내려놓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붉은 깃발을 올린다는 뜻은 해군을 희생해서라도 육군 병력 일부라도 살려보겠다는 뜻과도 같았기에 함장은 안색을 굳히고 주저할 수밖에 없었고.
“예? 그건...”
“작전과는 달리 화선이 그대로 격침당해 북미왕국 함대에 제대로 된 타격을 주기는커녕 연기로 시야조차 제대로 가리지 못한 상황일세. 이대로는 저 앞에서 북미왕국 함대에 붙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전열함들이 북미왕국 함대에 다가가기 전에 집중 포격으로 침몰하거나 전투에서 이탈할 테고 그다음은 우리 차례가 될 테지.”
“으음...”
“거기에 저들은 계속해서 바람을 거슬러 풍상 측으로 이동하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함대의 이동 속도는 계속 줄어들 거야. 그리고 저들의 화력이면 우회한 프리깃들도 저들을 제대로 막긴 어렵겠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함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차라리 백기를 올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함장이 생각하기에는 지금 항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현 상황에서 후퇴도 여의치 않았다.
북미왕국의 군함은 바람과는 상관없이 무척 빠르게 움직이는 터라 후퇴해봐야 저들의 추격을 뿌리치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이번 해전에 승산이 보이지도 않았으니 항복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함장이었다.
화선이 모두 침몰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화선에는 배를 조정하기 위해 탑승한 병사 수십 명 정도가 전부였고 재수 없게도 유폭이 발생해 침몰한 2척의 전열함을 제외하면 일단 피해는 발생했을지언정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런 함장의 말에 아브라함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백기라...이제 와서 항복하자?”
“지금까지의 인명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함장은 어떻게든 아브라함을 설득하려 했지만, 아브라함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들에게 누벨 프랑스를 내어준 것도 모자라 30척이 넘는 최신 전열함을 고스란히 넘길 수야 없네. 거기에 백기를 들어 올리고 항복하는 순간 해군 병사 1만 명과 수송 중인 육군 병사 2만 명은 북미왕국의 포로가 될 테고...본국의 부담은 엄청날걸세.”
지금 백기를 올리고 항복하게 되면 당연히 모든 프랑스 병사들은 북미왕국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고 프랑스의 모든 배는 북미왕국의 전리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훗날 협상에서 무척 불리해질 수밖에 없고.
하지만 붉은 깃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프랑스 해군은 북미왕국 함대를 최대한 붙잡기 위해 늘어지다 모두 침몰할 테고 전열함에 타고 있는 프랑스 육군 병사 1만 명은 그대로 물귀신이 될 것이 뻔했다.
더불어 상륙한 프랑스 육군 1만 명도 결국은 섬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해서 함장은 어떻게든 아브라함을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난 아직 포기한 것이 아닐세.”
“예?”
“북미왕국 해군도 저 함대들이 수송 함대라는 것은 짐작할 거야. 그리고 지금처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을 고집하다간 저들이 이 해역을 지나쳐 병력을 내릴 거라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테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함장은 그가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파악했다.
“으음...허면 저들은 수송 함대를 막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달리 달려들겠군요.”
“그렇지. 그러면 분명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올 거라 믿네. 그러니 붉은 깃발을 올리게. 이건 명령일세.”
함장은 잠시 고민하다 아브라함의 포기하지 않은 눈빛을 바라보고 결국 결정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제독님.”
* * *
뒤쪽에서 다가오던 함대의 선박 일부가 선회해 이동하기 시작했고 저들의 진행 방향은 북미왕국 함대의 앞쪽으로 판단되었기에 이정운이 중얼거렸다.
“저것도 일종의 정찰선 같은데...어떻게든 우리 함대의 진로를 막겠다는 뜻이로군.”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앞쪽의 전열함을 상대하는 사이 뒤쪽의 전열함이 접근하고 저 정찰선들은 우리의 진로를 막겠다는 계획 같은데...저 정도면 그냥 밀어붙여도 될 것 같습니다. 선수포도 있고요.”
“그렇지. 충돌만 피하면 될 것 같은데...”
그때 견시수가 이정운을 보고 소리쳤다.
“함대 사령관님! 저 맨 뒤쪽을 보십시오!”
“음?”
“수송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견시수의 보고에 급히 망원경으로 수송 함대를 바라보자 멀리 정박해있던 수송 함대는 어느 순간 돛을 활짝 펴고 남쪽으로 남하하고 있었다.
“허. 이것 봐라?”
부관 역시 이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우회해 병력을 내려놓겠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러게. 이거 예상외인데?”
애당초 이정운은 저 수송 함대가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으리라고 판단했다.
프랑스 함대가 북미왕국 함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결국 보급이 불가능해지는 만큼 상륙에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멀리서 상황을 보고 불리하다 싶으면 함대를 돌리면 그만이었으니.
헌데 수송 함대가 이동하기 시작하고 뒤쪽에서 접근하던 전열함으로 구성된 함대가 진형을 펼치기 시작하자 이정운은 프랑스 함대를 지휘하는 함대 사령관의 속내를 파악했다.
“하. 저 수송 함대를 막으려면 자신들과 제대로 붙자 이건가? 그리고 우리가 이동하면 저 우회하는 정찰선들은 우리의 뒤를 칠 테고?”
“바람만 아니라면 그냥 무시하고 저 함대를 모두 격멸한 후 빠르게 추격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래. 그러면 늦겠지. 저들이 누벨 프랑스까지 가면 충분히 추격할 수 있겠지만 뉴펀들랜드 섬을 목표로 한다면...”
그러면서 고개를 젓자 부관이 이정운에게 물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이에 이정운은 잠시 고민했다.
저 수송 함대의 규모로 볼 때 많아 봐야 1만 명 정도의 병사가 타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뉴펀들랜드 섬에 주둔해 있는 갑오 소총으로 무장한 3천 명의 경비병이라면 프랑스 병사 1만 명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물론 4함대와는 달리 제대로 된 전투 경험이 없다는 부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출항하기 전 경비대에 만약 프랑스 함선이 나타나면 당황하지 말고 각종 물자를 쌓아둔 병영에서 농성해 시간을 끌라고 이야기해둔 만큼 이정운은 경비대를 믿고 상대의 의도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출항 전 경비대에 이야기해두었으니 저들이 뉴펀들랜드 섬에 상륙한다 해도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누벨 프랑스로 이동한다면 결국 추격할 수 있을 테고. 그러니 무시하고 일단 눈앞의 전열함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 * *
화선을 침몰시킨 북미왕국 함대는 그사이 가까이 다가온 전열함에 포격을 집중했고 멀리서 사격할 때와는 다르게 전열함 한 척에 명중하는 포탄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유폭되어 침몰 되는 전열함은 늘어만 갔다.
이에 일부는 더는 버티기 힘들었는지 배를 선회하고 포격전을 시도했지만, 소문처럼 북미왕국의 배는 튼튼했고 전열함에 장착된 대포는 북미왕국의 군함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포탄에 맞으면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돌격하던 캥페르 함이 북미왕국의 한 작은 군함에 가까워지자 북미왕국 군함은 즉각 함대 진형을 풀고 선회해 캥페르 함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선미포를 발사하기 시작했고.
결국, 마지막까지 북미왕국 군함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캥페르 함이 화려한 폭발과 함께 불타면서 침몰하고 병사들이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광경을 바라보며 함장이 무척이나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캥패르 함. 마지막까지 분투했습니다만...결국...”
“후우...이럴 줄 알았다면 함대를 나누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브라함의 중얼거림에 함장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제독님의 작전대로 최후의 최후까지 화선이 전열함 뒤에서 버텼다가 붙었다면 또 상황이 달랐겠지요.”
함장의 위로에도 어차피 무의미한 가정이었기에 아브라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보다 전열함의 포격에도 북미왕국의 군함엔 큰 피해가 없는 것을 보았는가?”
분명 전열함들은 접근하는 동안 선수포를 발사했고 몇몇 전열함은 선회해 포격전을 시도했지만, 북미왕국의 군함은 외형적으로는 부서진 곳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에 아브라함이 이야기하자 함장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소문대로 북미왕국의 군함은 튼튼하군요.”
이에 아브라함은 함장을 바라보고, 그리고 선행 함대가 북미왕국의 함대에 하나둘 침몰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잔뜩 굳어 있는 병사들을 슬쩍 바라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저들을 이길 방법은 피해를 무릅쓰고 다가가 백병전을 하는 방법 외엔 없네. 그리고 이제 저들은 수송 함대를 막기 위해 우리를 향해 돌격할 테니 어떻게든 저들의 진로를 막고 배를 붙여야 하네.”
“알겠습...어?”
아브라함의 말에 대답하던 함장이 갑자기 얼빠진 소리를 내자 아브라함이 함장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
“저기 북미왕국 함대를 보십시오!”
이에 아브라함은 급히 북미왕국의 함대를 바라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저들이 왜...”
수송 함대가 이동하고 있는 만큼 북미왕국 함대는 당연히 이를 막기 위해 곧바로 이쪽으로 달려들 것으로 생각했지만 북미왕국 함대의 이동 방향은 조금 달랐다.
북미왕국 함대는 포탄을 맞고 멈춰있는 전열함들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천천히 이동한 북미왕국 함대는 멈춰있는 전열함에 한 발씩 포격을 가했다.
다행히 북미왕국 함대는 당장 전열함을 침몰시킬 생각은 없었는지 포탄은 전열함 주변에 떨어져 물기둥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에 멈춰있던 전열함에 타고 있는 프랑스 병사들은 우왕좌왕하다 결국 백기를 올렸다.
그러자 북미왕국 함대는 아직 백기를 올리지 않은 다른 전열함으로 이동했고 결국 북미왕국의 포탄을 맞아 멈춰있던 모든 전열함에 백기가 올라오자 그제야 방향을 바꾸어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해서 함장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아브라함을 바라보았지만, 아브라함은 무척이나 창백한 안색으로 몸을 덜덜 떨면서 북미왕국 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함장은 화들짝 놀라서 아브라함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제독님? 왜 그러십니까?”
“...자네는 저들이 왜 시간을 들여 전열함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생각하나.”
이에 함장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와 전투할 때 전열함 일부가 가세할 것을 우려한 탓 아니겠습니까?”
“그게 두렵다고 수송 함대가 남하하는 것이 뻔히 보이는 데 시간을 소모한다고?”
아브라함의 이야기처럼 북미왕국 함대가 멈춰있는 전열함의 항복을 받아내는 동안 수송 함대는 열심히 남하해 거리가 꽤 벌어진 상태였다.
헌데도 북미왕국의 함대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기에 함장도 그 의미를 파악하고 기겁했다.
“아?! 그러면...”
이에 아브라함은 무척이나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들은 수송 함대가 이동해 프랑스 병력을 내려놓더라도 상관없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보인 걸세.”
아마 북미왕국의 군함 일부가 배치되어 있거나 뉴펀들랜드 섬에 추가로 병력이 배치되어 있을 거라고 짐작한 아브라함의 이야기에 함장은 점차 다가오는 북미왕국 함대를 바라보며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럼 저들은 우리의 예상대로 수송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우리에게 돌진하기 보다는...”
“아. 아마 선회해 아까처럼 포격으로 차근차근 침몰시키려 하겠지.”
아브라함은 씁쓸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고 이에 점차 가까워지는 북미왕국 함대를 보고 함장은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그럼 어떻게 합니까?!”
‘퍼퍼퍼펑!’
북미왕국 함대는 선수포를 발사한 후 일제히 선회하기 시작했고 견시수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북미왕국 함대! 일제히 선회합니다!”
함장은 그 광경을 보고 저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처럼 돌격할 생각은 없고 방금처럼 거리를 두고 철저히 포격만으로 상대할 것임을 직감했을 때 앞쪽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콰쾅!’
맨 앞쪽에 있던 전열함이 북미왕국의 포탄에 맞았는지 갑판 위가 엉망이 되는 광경과 조금 전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농락당하다가 한 척씩 침몰한 전열함들이 떠오르자 함장은 아브라함에게 소리쳤다.
“제독님!”
아브라함은 잔뜩 겁에 질린 함장과 갑판 위 병사들의 얼굴을 바라본 후 한숨을 쉬었다.
“후우. 조금 전 분투한 병사들을 생각해서라도 끝까지 싸우고 싶지만...그건 무의미하겠지. 함장. 백기를 올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