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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311화 (311/850)

311화

멕시코 시티의 안토니오 부왕은 보좌관이 가져온 비단을 손으로 만져보고 감탄했다.

“허. 이게 북미왕국에서 생산한 비단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부왕 전하.”

작년에 청나라에서 투로시노가 가져온 생사는 고스란히 북미왕국으로 옮겨졌고 투로시노가 청나라와 잘 협상한 덕분에 계속해서 생사를 수입할 수 있게 되고 그동안 비단의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연구한 덕분에 최상품에 가까운 비단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정성국은 이상돈과 회의를 한 후 바로 비단을 제조하는 공방을 세웠다.

그리고 공방이 완공되고 창고에 쌓여있던 생사가 줄어들고 대신 비단이 차곡차곡 쌓여가자 북미왕국에서는 일단 이 비단을 유럽 국가에 팔기로 했다.

그 대상은 당연히 만만한 에스파냐였고.

외무청 관리는 새진도의 로하스에게 북미왕국에서 생산한 비단을 보여주었고 비단을 확인한 로하스는 놀라 급히 북미왕국의 비단을 일부 사들여 멕시코시티로 보냈다.

그렇게 북미왕국의 비단은 안토니오 부왕에게 도착했고 안토니오 부왕은 이 북미왕국산 비단을 손으로 쓸어내리고 햇빛을 반사하며 보이는 광택을 확인하며 비단의 품질을 평가했다.

“이거...생각보다 품질이 좋군. 광택도 그렇고.”

이에 보좌관은 안토니오 부왕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청나라의 비단과 견줄 만하지요.”

비단 특유의 감촉과 부드러움을 만끽한 안토니오 부왕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보다 북미왕국에서 비단까지 생산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북미왕국은 대량으로 판매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게 말입니다. 거기에 청나라의 비단과 가격도 비슷합니다.”

보좌관의 대답에 안토니오 부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품질은 비슷한데 가격마저 비슷하다고? 그럼 굳이 청나라에서 비단을 살 이유가 없지 않나.”

“그렇습니다.”

보좌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토니오 부왕은 혀를 차며 북미왕국산 비단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것 참...이렇게 되면 청나라와의 무역은 쇠퇴하겠군. 자연스럽게 아시아 무역도 축소될 테고.”

북미왕국의 등장 전까지 아시아 무역, 그중에서도 청나라와의 무역은 에스파냐에 무척이나 중요했다.

유럽의 귀족들에게 대유행인 도자기, 비단, 차 등을 모두 청나라에서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신대륙 전체에서 나오는 귀금속을 싣고 아시아로 가져가 청나라의 사치품을 구한 후 다시 신대륙으로, 그리고 유럽으로 전달하는 마닐라 갤리온 무역이 활성화되었고.

하지만 북미왕국이 등장하면서 이 무역에서 도자기는 빠지게 되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의 내부 상황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청나라의 도자기는 물량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유럽인들의 기호에 맞는 화려한 디자인의 북미왕국의 도자기는 단숨에 유럽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북미왕국은 은보다는 각종 현물을 더 좋아했기에 에스파냐 입장에서는 청나라에서 귀금속을 주고 도자기를 사들이는 것보다야 북미왕국에서 현물을 주고 도자기를 가져오는 것이 더 이득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이 청나라의 비단과 비슷한 품질의 비단을 청나라의 비단과 비슷한 가격에 대량으로 팔 수 있다고 제의했으니 에스파냐로선 굳이 멀리있는 청나라에서 비단을 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시아 무역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에스파냐의 경우 일부 귀족만 차를 즐길 뿐이고 나머지는 차 보다는 커피나 카카오 음료를 더 선호했기에 북미왕국의 도자기를 수입하게 된 이후 신대륙에서 캐낸 귀금속은 대부분 청나라의 비단을 사들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럴 것 같습니다. 향신료와 차 외엔 북미왕국의 물품을 수입하는 것이 더 이득이니까요.”

보좌관 역시 안토니오 부왕의 예상에 동의하자 안토니오 부왕이 비단을 보고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러다 북미왕국에서 향신료와 차도 생산하는 것은 아닐까 모르겠어.”

“지리도, 기후도 다르니 향신료가 자라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북미왕국은 차는 마시지 않고 커피를 마시는 만큼 굳이 차를 재배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보좌관의 말에 북미왕국에서는 차를 즐기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린 안토니오 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생각해보니 저들은 커피를 주로 마신다고 했던가? 아무튼, 내가 보기엔 최상품의 비단인 것 같고 본국 귀족들의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산 비단이라면 불티나게 팔릴 테니...내년부턴 은을 아시아로 보내기보단 북미왕국의 물품을 사들이는 데 써야겠군.”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농장을 키우고 광산에 투입되는 원주민을 늘려 열심히 고무를 채취하고 구아노와 철광석을 캐고 있습니다만...도자기를 비롯한 각종 물자의 가격을 치르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라 현물로 비단까지 사들이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긴...최근엔 도자기 수입량이 더 늘었으니.”

보좌관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미왕국의 도자기가 유럽 귀족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에스파냐 왕실 차원에서 현물로 사들인 북미왕국의 도자기를 유럽 각국에 팔아 쏠쏠하게 이득을 챙기고 있었으니까.

“더불어 최근 북미왕국은 누에바 에스파냐 북쪽 지역에 대규모의 목화밭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북미왕국에 고용된 인디오들이 그곳에서 일하고 있고요. 헌데 그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그래?”

“그 때문인지 작년부터 북미왕국산 면직물의 가격이 조금씩 저렴해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 더 떨어질 것 같다는군요. 더불어 모직물도 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질문을 던졌다.

“흐음...당연히 직물의 품질은 더 좋겠지? 가격도 저렴할 테고?”

이에 보좌관은 물어 무엇하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유럽에서 수입해오는 면직물, 모직물과 비교하기 어렵지요. 그 때문에 최근 인디오들은 이전처럼 급여로 식량을 받아오기보단 면직물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결국, 자네는 면직물과 모직물도 북미왕국에서 정식으로 수입하자는 뜻이겠지?”

“그렇습니다. 차라리 그편이 우리에게도 이득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세금도 걷을 수 있고요.”

원래 식민지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식민지의 자원을 수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을 비싼 가격에 팔아 이윤을 극대화해야 했다.

문제라면 에스파냐 본국은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모두 생산할 역량은 없다는 점이었다.

원래 에스파냐의 제조업을 지탱하는 축은 무어인들이었는데 필리페 2세가 이들을 모조리 추방해버리면서 제조업의 기반인 기술자 인력이 사라져버린 탓이다.

덕분에 에스파냐에서는 누에바 에스파냐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전량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수입해 제공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식민지를 통해 에스파냐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줄어들었고 물품은 값비싸질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물품이 너무 비싼 탓에 원주민들은 살 엄두를 내지 못했고 다른 물품들은 몰라도 직물의 경우 필수품에 가까웠기에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렇게 되면 효율적인 과세가 어려웠기에 누에바 에스파냐에서는 이를 막으러 들었지만,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고.

하지만 북미왕국의 직물을 값싸게 들여와 세금을 붙여 판다면 원주민들은 조금 비싸지만 월등한 품질의 북미왕국 직물을 사서 이용할 테니 누에바 에스파냐의 입장에선 나쁠 것은 없었다.

“그렇긴 한데...이거 열심히 귀금속을 캐서 고스란히 북미왕국에 넘겨주게 생겼군.”

안토니오 부왕이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자 보좌관은 무어라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 보좌관의 반응에 집무실의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이를 인지한 안토니오 부왕은 짐짓 쾌활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의 주제를 돌렸다.

“그보다 북미왕국은 아직도 프랑스와 협상을 생각하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누벨 프랑스를 점령한 후 웅크린 늑대가 잉글랜드와 접촉했다는 보고를 생각해보면...”

“쯧. 섬나라 놈들이 괜히 재를 뿌리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북미왕국과 프랑스의 전쟁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 했던 안토니오 부왕은 괜히 잉글랜드가 중간에 서로를 중재해 종전 협상을 맺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에 보좌관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요. 하지만 북미왕국도 계속 기다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음? 뭐 다른 소식이라도 있나?”

“이번에 새진주의 외무청에서 서인도제도의 상세한 해도를 요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더불어 생도맹그의 상황과 지형을 자세하게 물어봤다고 하는군요.”

“오! 그래?”

보좌관의 대답에 안토니오 부왕은 반색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이 생도맹그의 상황과 지형을 파악하려는 이유는 뻔했으니까.

“예. 해서 서인도제도의 상세한 해도와 더불어 생도맹그의 상황을 상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외무청 관리가 무척 만족해했다고 합니다.”

“하하하. 아주 좋아. 프랑스가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생도맹그를 공격할 속셈이겠군.”

안토니오 부왕의 의견에 보좌관 역시 동의했다.

“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에 안토니오 부왕은 밝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부디 북미왕국의 2함대가 서인도제도의 프랑스 함대를 모조리 침몰시키고 생도맹그를 초토화했으면 좋겠군.”

* * *

김봉길은 웅크린 늑대를 찾아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흐음...여전히 반응이 없나?”

최근 들어 잉글랜드의 배가 새진주에 도착할 때마다 득달같이 방문하는 김봉길을 보고 웅크린 늑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번에 코트렐 경이 서인도제도의 프랑스 외교관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만...자신들은 그런 권한이 없다며 본국의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답니다.”

에스파냐의 경우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이 생각보다 많은 권한을 지니고 있었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달랐다.

설사 권한이 있다 하더라도 북미왕국은 북아메리카를 북미 대륙이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영역이라고 주장해왔고 이미 누벨 프랑스가 북미왕국에 점령된 상황에서 협상한다는 뜻은 누벨 프랑스를 포기하겠다는 의미와도 같았기에 문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루이 14세의 명령이 떨어져야만 했다.

해서 이들은 협상에 나설 수 없다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김봉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근데 지금쯤이면 본국에서 연락이 도착했을 시기 아닌가?”

“...그렇긴 하지요.”

북미왕국이 선전포고하자 누벨 프랑스의 총독은 본국으로 배를 보냈고, 누벨 프랑스의 총독이 결국 항복하자마자 이정운 4함대 사령관이 새진주에 연락해 웅크린 늑대가 곧바로 자메이카의 클레멘트에게 중재를 요청한 만큼 프랑스 본국에서 이에 대한 답을 줄 때가 되긴 했다.

이에 웅크린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봉길이 덧붙였다.

“헌데 저런 반응이라면 뭐 볼 거 있나? 저들은 우리와 협상할 생각이 없는 거지.”

“음...솔직히 그래 보이기는 합니다만...일단 잉글랜드에서는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합니다. 보통은 에스파냐처럼 빠르게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서요. 더불어 프랑스는 네덜란드와 전쟁 중이라 결국 협상에 나설 거라면서요.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이...”

김봉길은 웅크린 늑대의 말을 끊었다.

“벌써 2함대의 절반이 이곳에 묶인 지도 4개월째야. 4함대 역시 태반이 뉴펀들랜드 섬에 묶여있고. 덕분에 북미 동해안 지역의 물품이 부족해 가격을 올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고 있어. 그럼 여러모로 곤란하지 않나.”

“음...”

북미왕국은 좋은 품질의 물품을 싸게 보급해 북미 동해안 지역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특히 이제 막 합류한 이로쿼이 연맹과 전 누벨 프랑스의 동맹 부족들, 그리고 프랑스인들이 북미왕국의 통치에 만족하게 하려면 물가 안정은 무척 중요한 사항이었고.

이에 웅크린 늑대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봉길이 선언하듯 말했다.

“더 기다려봐야 시간 낭비야. 난 군사청을 통해 전하께 2함대의 출정을 요청할 생각이네.”

그러면서 김봉길이 웅크린 늑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웅크린 늑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휴우. 알겠습니다. 저도 외무청을 통해 프랑스 외교관을 협상장으로 불러들이려면 2함대가 서인도제도를 공격한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보고하겠습니다.”

이에 김봉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무어라 말하려 했을 때 웅크린 늑대의 집무실이 벌컥 열렸다.

“헉헉! 함대 사령관님! 새한성에서 온 급보입니다!”

“응?”

김봉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는 병사가 건네준 서신을 뜯어 확인하고 파안대소했다.

“푸하하하! 역시 전하시군! 앉아서도 만 리를 본다니까!”

“예? 그게 무슨...”

그런 김봉길의 반응에 웅크린 늑대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김봉길은 들고 있던 서신을 웅크린 늑대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 보게. 전하의 명령이네. 1673년 9월 1일까지 프랑스가 협상할 뜻을 내비치지 않으면 2함대는 즉각 생도맹그를 공격하라고.”

“아...”

“하하하. 일주일만 기다렸다가 출항하면 되겠군! 조금만 기다려라! 굼벵이 같은 프랑스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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