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조용한 곰과 군사청장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정성국의 집무실에 들어왔고 군사청장이 정성국을 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드디어 이정운 4함대 사령관의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
“오. 그래?”
정성국은 군사청장이 넘겨준 보고서를 쭉 확인하고 혀를 찼다.
이전에 퀘벡에 있는 누벨 프랑스의 총독에게 항복 권유를 했지만, 총독은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소식과 지형을 살펴본 결과 4함대로 이동하는 병력만으로 퀘벡을 직접 공격하겠다는 보고가 전해졌기에 무혈입성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포격에 현실을 파악한 부하들의 강요로 결국 항복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쯧쯧. 누벨 프랑스의 총독이 뻗댔다길래 혹시나 했는데 제대로 된 전투도 없이 누벨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낸 셈이군.”
“그렇습니다. 매복을 걱정해 퀘벡의 선착장 인근 마을에 포격을 가해 초토화하자 이대로는 개죽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행정관과 장교가 총독을 설득한 모양입니다.”
군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보고서를 덮고서 약간 허무하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뭐 동맹 부족이 모두 이탈해 우리와 손잡기로 했으니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지만...생각보다 허무하게 끝났군.”
이에 군사청장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옆에서 듣던 조용한 곰이 고개를 저었다.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렇긴 하지. 누벨 프랑스가 항복한 거지 프랑스와는 아직 전쟁 중이니까. 하지만 프랑스는 현재 유럽에서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이고 있으니 우리의 예상대로 잉글랜드의 중재에 따라 우리와 종전 협상을 하지 않겠어? 그리고 보면 웅크린 늑대의 보고는 없나?”
누벨 프랑스의 점령으로 유럽 세력을 북미 대륙에서 완전히 내몰겠다는 북미왕국의 목적은 이미 달성한 만큼 굳이 프랑스와 계속 드잡이질을 할 필요는 없었다.
특히 그동안 북미 동해안을 열심히 오가며 물자를 수송하던 2함대와 4함대의 전선 일부가 만약을 대비해 묶여 있는 것은 큰 차질이었기에.
해서 북미왕국에서는 누벨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는 대로 프랑스와 종전 협상을 벌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종전 협상을 주도할 인물이 바로 웅크린 늑대였고.
이에 정성국이 조용한 곰을 쳐다보며 질문을 던지자 조용한 곰이 바로 대답했다.
“있습니다. 누벨 프랑스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프랑스를 협상장에 앉히기 위해 예정대로 잉글랜드와 접촉하겠다는 보고입니다.”
애초에 프랑스와는 제대로 교류한 적이 없었기에 프랑스를 협상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 다른 유럽 국가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현재 북미왕국과 교류하는 유럽 국가는 에스파냐와 잉글랜드 정도인데 에스파냐는 루이 14세의 프랑스와는 썩 좋지 못한 관계였기에 북미왕국이 누벨 프랑스에 선전포고해 자연스럽게 북미왕국과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진 현 상황을 내심 반기며 전쟁이 더 길어지고 북미왕국이 프랑스를 최대한 공격해주길 바랄 것이 뻔했다.
반면 잉글랜드의 경우 현 국왕인 찰스 2세는 나름 프랑스에 우호적인 인물이기도 하고 프랑스와 함께 네덜란드를 공격하는 중이었기에 북미왕국이 누벨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는 소식과 북미왕국이 프랑스와의 협상을 원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적극적으로 프랑스를 설득하지 않을까 싶었다.
최소한 잉글랜드는 북미왕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어느 정도 아는 상황이었으니.
그 때문에 북미왕국에서는 프랑스를 협상장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잉글랜드와 접촉해 중재를 요청할 생각이었고 이 때문에 누벨 프랑스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마자 웅크린 늑대는 예정대로 잉글랜드와 접촉하고 있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중얼거렸다.
“흠.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잘 설득해줬으면 좋겠는데...”
조용한 곰은 정성국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군사청장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프랑스가 고집을 부릴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말인데 김봉길 2함대 사령관이 괜찮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김봉길 2함대 사령관이? 무슨 이야기일지 대충 짐작은 되는데...”
정성국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군사청장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예. 짐작하시는 대로 협상이 결렬되면 2함대를 움직여 서인도제도에 있는 프랑스의 섬을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내용입니다. 이건 그에 관한 작전 계획이 담긴 보고서입니다.”
군사청장이 가져온 보고서를 정성국에게 건네자 정성국은 이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2함대에 소속된 전선 대부분이 4함대로 편제되면서 2함대가 쪼그라들었지만, 작년에 새진주의 조선소에서 열심히 전선을 건조해 현재 2함대에는 지급 전선 2척과 인급 전선 8척, 총 10척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봉길은 프랑스가 협상을 거부한다면 이 2함대로 프랑스가 장악한 섬 중 그나마 가깝고 가장 핵심적인 생도맹그를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건의해왔고.
이는 해상 운송량이 부족해서 전선이 수송 업무를 담당하는 현실에서 전쟁이 길어져 봐야 프랑스보다 북미왕국이 더 손해라는 사실과 누벨 프랑스의 모피보다 더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이 서인도제도의 설탕이라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리라.
예전 에스파냐가 북미왕국의 공격으로 태평양 방면의 해안가가 불타올라 아시아 무역이 봉쇄될 처지에 놓이자 곧바로 종전 협상을 요청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인도제도와의 무역이 위협받으면 프랑스도 어쩔 수 없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특히나 현 프랑스는 루이 14세가 왕위에 오른 후 계속된 전쟁 덕분에 재정이 빠르게 고갈되는 상황이었으니 이곳을 공격해 북미왕국이 서인도제도의 무역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프랑스는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이러한 김봉길의 판단에 정성국도 내심 동의했다.
현재 생도맹그는 아직 전성기 시절이 아니라 서인도제도에서 가장 부유한 섬은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생산하는 각종 신대륙 작물은 유럽에 비싸게 팔리고 있었고 덕분에 프랑스의 재정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더불어 이곳을 공격하고 협상을 하지 않으면 다른 서인도제도의 섬도 공격하겠다고 이야기한다면 프랑스는 결국 협상장에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정성국은 에스파냐를 떠올리고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흐음...생도맹그를 공격하겠다니. 괜찮긴 한데 나중에 얄미운 에스파냐인들이 손쉽게 이득을 챙길 것 같아 좀 그렇긴 하네.”
서인도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히스파니올라 섬은 에스파냐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은이 나오는 남미 지역에만 신경 쓰는 사이 프랑스가 은근슬쩍 섬의 서반부를 차지하고 원래 에스파냐가 부르던 이름인 산토도밍고의 프랑스식 언어인 생도맹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쇠락하던 상황이라 이런 프랑스를 막기 어려워 지켜보고 있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만큼 북미왕국이 이 생도맹그를 공격해 이곳을 지키는 프랑스 함대와 요새를 박살 낸다면 당연히 에스파냐는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이 기회에 이를 되찾으려 할 수도 있었고.
이러한 사정을 잘 아는 조용한 곰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요. 먼저 비밀 동맹을 제의해놓고 본국의 사정을 들어 이번 전쟁에서 쏙 빠진 에스파냐이니만큼 그들이 손쉽게 이득을 챙기는 꼴을 보고 싶진 않습니다만...그렇다고 프랑스를 위협하기 위해 유럽 본토로 함대를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쩌겠습니까. 다만 이를 알려 약간의 도움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요.”
아마 북미왕국에서 생도맹그를 공격할 생각이니 제대로 된 지도를 달라고 한다면 에스파냐는 곧바로 최신 해도를 건네주고 이곳에 능숙한 선원까지 붙여주지 않을까 싶었기에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나. 아무튼,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네. 프랑스가 협상을 거부하면 김봉길 2함대 사령관의 의견대로 2함대를 움직이도록 하지. 다만 이곳은 열대우림 기후라 각종 질병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김봉길에게 꼭 당부하게. 절대 상륙하지 말라고 전하고.”
전생의 생도맹그에서 일어난 혁명을 제압하기 위해 프랑스는 6만 명이 넘는 병사를 보냈지만, 이들 중 5만 명이 넘는 병사들이 황열병과 말라리아를 이기지 못해 사망했고 결국 프랑스는 이 지역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기억한 정성국이 군사청장에게 신신당부하자 군사청장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꼭 전하겠습니다. 김봉길 2함대 사령관은 예전 멕시코 지역 남쪽 해안가를 불태울 때도 함대를 잘 관리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 * *
멕시코시티의 안토니오 부왕은 보좌관이 전해준 소식을 듣고 되물었다.
“그래? 예상대로 누벨 프랑스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북미왕국의 영토가 되었다는 뜻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보좌관의 대답에 안토니오 부왕은 감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북미왕국은 원하는 대로 북미 대륙의 유럽 세력을 모조리 몰아낸 셈이로군. 잉글랜드와 프랑스. 둘 다 만만한 국가가 아닌데 잉글랜드는 협상을 통해서, 프랑스는 힘으로 몰아내 결국 북미 대륙을 장악한 셈이니...”
이에 보좌관 역시 안토니오 부왕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요. 솔직히 대단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북미왕국의 국력이 대단한데 저 거대한 북미 대륙을 장악했으니...시간이 흐를수록 얼마나 더 강력해질지 짐작하기 어려워 두렵기도 하고요.”
보좌관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나마 다른 유럽 국가가 저 거대한 북미 대륙을 장악하는 것보다야 북미왕국이 장악하는 것이 나아 보이긴 했는데...앞으로를 생각해보니 정말 무섭긴 하군.”
그나마 유럽은 여러 강국이 존재했고 한 국가가 세력을 확장하면 다른 국가들이 연합해 이를 막아왔지만, 이곳의 사정은 전혀 달랐다.
이 신대륙에서 북미왕국을 제외하고 그나마 가장 세력이 큰 자신들도 감히 북미왕국을 견제할 생각을 하기 어려웠고 북미왕국에서 철수하고 서인도제도에서 영역 확장을 시도하는 잉글랜드와 야금야금 서인도제도에서 세력을 키우는 프랑스와 연합하기는 어려웠으니 북미왕국이 아무런 견제 없이 성장할 것을 생각하면 미래가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보좌관은 그런 안토니오 부왕의 굳은 얼굴을 보고 살짝 웃으며 아부하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부왕 전하의 안목으로 북미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만큼, 그리고 저들은 북미 지역에만 신경을 쓸 뿐이지 멕시코 지역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만큼 계속 우호적으로 지낸다면 에스파냐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안토니오 부왕 역시 이제 와서 북미왕국을 견제하려다 저들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보다는 북미왕국과 우호적으로 지내면서 최대한 떡고물을 챙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 전쟁을 통해 떡고물을 챙기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뭐 그렇기야 하겠지. 그보다 누벨 프랑스는 항복했지만, 아직 북미왕국은 프랑스와 전쟁 중인 상황이니 북미왕국을 이용해 이득을 챙겨야 할 것 같아.”
“예? 어떻게 말입니까?”
비밀 동맹을 통해 이번 전쟁에 개입해 이득을 챙길 수 있었지만, 본국의 사정 때문에 결국 개입하지 못했고 덕분에 아무런 이득을 챙기지 못한다고 여겼던 보좌관이 의아한 듯 안토니오 부왕을 바라보자 안토니오 부왕이 씩 웃으며 말했다.
“북미왕국과 프랑스가 열심히 치고받고 싸우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이득을 챙길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서인도제도와 유럽에 소문을 내게. 누벨 프랑스의 총독이 북미왕국의 함대를 보자마자 지레 겁먹고 곧바로 항복했다고. 그리고 루이 14세 역시 북미왕국에 겁먹고 항복할 거라고.”
그 말에 보좌관은 안토니오 부왕의 의도를 파악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아...프랑스를 자극해 종전 협상을 막을 생각이시군요.”
에스파냐가 확인한 북미왕국의 성향상 북미왕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한 이상 프랑스와 종전 협상을 바랄 것이 뻔했으니 프랑스를 자극해 이를 막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안토니오 부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루이 14세의 성격상 이러한 소문이 들리면 결코 종전 협상을 하려 들지 않을 거야. 그리고 거리가 있는 만큼 함대를 보내 북미왕국에 프랑스의 힘을 과시하려 들 테고.”
“그 함대가 본국의 함대든 서인도제도의 함대든 북미왕국의 함대와 붙으면 박살 날 테니...저들의 해상 전력이 약화되겠군요!”
“그렇지. 그리고 상황을 봐서 산토도밍고 서쪽에 있는 프랑스인들을 몰아내면 될 테고. 쯧. 이 기회에 북미왕국이 서인도제도로 진출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는데.”
안토니오 부왕이 투덜대자 보좌관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 어쩌겠습니까. 저들은 북미 대륙 외엔 큰 관심이 없어 보이니까요. 아무튼, 알겠습니다. 바로 상인들과 접촉해 최대한 빠르게 소문을 퍼트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