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제이콥은 잭의 집에 들어오다가 멈칫하면서 말했다.
“어우. 추워. 잭. 어? 너도 그 꾸러미 받았어?”
“아. 이거?”
잭의 집 탁자 위에는 밀가루가 담겨 있는 큰 포대와 설탕이 담겨 있는 작은 포대, 그리고 술이 들어 있는 유리병이 올려져 있었다.
제이콥은 다가와 탁자에 있는 물품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밀가루와 설탕, 술이 담긴 꾸러미. 오늘 아침에 소리가 들려서 나가봤더니 문 앞에 그 꾸러미가 있던데...”
그런 제이콥의 말에 잭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래? 난 북미왕국의 병사에게 직접 받았는데?”
“응? 그걸 북미왕국의 병사가 준 거라고? 대체 왜?”
생각지도 못한 잭의 답변에 제이콥이 당황해 급히 묻자 잭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어...새해 잘 보내라면서 주던데?”
“엥?”
기괴하다는 표정을 짓는 제이콥을 보고 잭은 이 꾸러미를 넘겨 준 북미왕국 병사에게 들었던 내용을 이야기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바뀌잖아? 북미왕국에선 새해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양이더라고. 해서 새해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으라면서 왕실에서 백성들에게 식량을 준다는데?”
잭의 대답을 듣고 제이콥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물품들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북미왕국이 부유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건 좀 놀라운데? 어떻게 이런 나라가 다 있는 건지...”
그런 제이콥의 중얼거림에 잭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세금도 받지 않는데 새해를 잘 보내라고 식량에 술까지 왕실에서 직접 나눠주다니...뭔가 내 상식과는 반대인 느낌이야.”
“그러니까. 보통은 각종 세금으로 미친 듯이 뜯어가야 정상인데...”
이런저런 명목으로 세금을 뜯어내려 했던 잉글랜드 시절과는 너무 달랐기에 제이콥이 말을 잇지 못하자 잭은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우리처럼 혼자 사는 남자들에게 이 밀가루는 그다지 필요가 없다는 점이지. 차라리 술이나 왕창 주지.”
“쩝...그렇기야 하지. 결혼 못 한 것이 이렇게 서러울 줄은 몰랐는데...”
제이콥의 중얼거림에 잭도 한숨을 내쉬었다.
요리할 줄 아는 아내가 있었다면 이 밀가루를 사용해 북미왕국이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새해에 먹을 음식을 만들었겠지만, 잭과 제이콥은 혼자 살았고 요리도 할 줄 몰랐기에.
그렇게 잠시 침묵만이 감돌았을 때 잭이 애써 기운을 내며 입을 열었다.
“다행이라면 북미왕국에서도 이곳의 성비가 불균형하다는 문제를 인식했는지 여성들에 한해서 이주민을 받아들여 꾸준히 데려오겠다고 했잖아? 믿어 보자고.”
북미왕국에서 최근 성비가 불균형하다는 문제를 인식한 것인지 포고문을 통해 유럽에서 여성 이민자를 받아들일 생각이라고 알렸기에 이를 잭이 이야기하자 제이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믿어야지. 북미왕국이니까. 그보다 진짜 이거 어떻게 하지? 아무리 봐도 최고급 밀가루라 그냥 남에게 주긴 아까운데...”
이에 잭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제빵소에 가서 이걸로 빵을 만들어달라고 해야지 어쩌겠어.”
“어휴. 천상 그래야겠네.”
* * *
1673년 새해가 밝아오자 새한성 주민들은 잔뜩 기대하고 대로로 나가 왕실이 마련한 각종 먹거리를 즐기며 새해를 즐겼다.
그리고 그 외 지역 주민들은 왕실에서 내려준 식량과 술로 기분 좋은 새해를 보냈지만 12월 중순부터 이를 위해 고생한 정성국을 비롯한 왕실 가족은 새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아내들과 아이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정성국이었지만 조용한 곰의 보고에 어쩔 수 없이 회의실로 나섰다.
“그래. 메타코멧에게 연락이 왔다고?”
정성국의 질문에 조용한 곰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드디어 마지막 동맹 부족의 설득마저 끝났다고 합니다.”
“허면 누벨 프랑스의 동맹 부족은 더는 없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전하.”
조용한 곰의 말이 끝나자 관리청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전하. 누벨 프랑스의 동맹 부족이 모두 이탈했다면 더는 걸릴 것이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누벨 프랑스를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청장도 관리청장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이로쿼이 연맹을 충동질한 자들 아닙니까. 그냥 내버려 두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하루라도 빨리 누벨 프랑스를 공격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겉으로는 조용하던 누벨 프랑스가 뒷공작을 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청장들은 하나같이 분노하며 누벨 프랑스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로쿼이 연맹이 이야기하기를 처음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가 자신들의 영역을 떠난 직후 누벨 프랑스에서 사람이 와 화약과 무기를 팔면서 은근슬쩍 북미왕국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는 말엔 청장들은 발 빠른 외무청의 움직임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청장들이 알기로 이로쿼이 연맹은 꽤 호전적이라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면 두고두고 골치 아팠을 수도 있었기에.
그런 청장들의 주장에 정성국은 진정하라는 듯 손을 내밀어 청장들은 조금 진정시킨 후 군사청장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군사청장. 병력의 배치는 끝났지?”
이에 군사청장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전하. 현재 북미 동해안 지역에는 경비대 1만 8천 명과 탐사대 5천 명, 총 2만 3천 명의 병력이 전에 보고드린 대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전하께서 명령만 내리신다면 2주 안에 경비대 1만 2천 명과 탐사대 5천 명, 총 1만 7천 명이 매사추세츠 지역에 집결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었습니다.”
군사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병력 이동을 계획하고 준비해두었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저들의 행동을 볼 때 저들은 순순히 북미 대륙을 떠날 생각은 없는 것이 확실하고...그렇기에 최소한의 피해로 누벨 프랑스를 이 땅에서 내쫓으려면 최대한 많은 병력을 동원해 저들이 감히 북미왕국에 저항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병력의 이동 계획을 짜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군사청장은 병력의 이동 계획이 쓰여 있는 보고서를 정성국에게 건넸고 이를 받아든 정성국은 보고서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뉴펀들랜드 섬에 주둔한 3천 명의 경비대를 제외한 1만 5천 명의 경비대가 북미 동해안 지역에 적당히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다.
캐롤라이나 지역에 배치된 병력이 제일 적었고 매사추세츠 지역에 배치된 병력이 제일 많았는데 이는 인구와 성향 때문이었다.
매사추세츠 지역이야 다른 지역에 비해 2배나 많은 인구를 자랑했기에 자연스럽게 많은 경비대를 배치했다.
그에 반해 캐롤라이나 지역의 인구는 북미 동해안 지역 중 2번째로 인구가 많았지만, 이곳의 주민들은 노예 출신이었던 흑인들이 주민이었고 이들은 자신들을 해방해 준 북미왕국의 명령에는 무조건 따랐기에 굳이 많은 경비대를 배치할 이유가 없었고.
그렇게 북미 동해안 지역 곳곳에 경비대가 배치된 상황에서 군사청은 정성국의 명령만 떨어지면 캐롤라이나, 버지니아, 뉴욕 지역에 딱 1천 명의 경비대만 남겨놓고 모든 병력을 매사추세츠로 집결할 수 있게 준비를 해둔 것이다.
이를 보고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흐음...물자 비축도 다 해두었고...명령만 떨어지면 2주 안에 매사추세츠 지역에 총 1만 7천 명의 병력이 집결해 그중 5천 명은 퀘벡 방면으로 진군, 5천 명은 북동쪽 아카디아 방면으로 진군, 5천 명은 4함대의 도움으로 퀘벡 북쪽의 세인트로렌스 강 하류로 이동, 남은 2천 명은 만약을 대비해 매사추세츠에 남는다라...”
“만약을 대비한다고는 했지만 2천 명의 경비대는 매사추세츠 지역의 치안을 유지할 예정입니다. 동시에 뉴펀들랜드 섬의 3천 명의 경비대 중 2천 명이 움직여 뉴펀들랜드 섬을 장악할 예정이고요.”
뉴펀들랜드 섬에는 북미왕국의 거점 항구인 세인트존스 항과 누벨 프랑스의 거점 마을인 플라센티아가 존재했기에 북미왕국이 퀘벡을 공격하면 뉴펀들랜드 섬에 배치된 경비대를 움직여 뉴펀들랜드 섬을 완전히 장악하겠다는 군사청장의 이야기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잘 해뒀네.”
정성국의 표정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군사청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면 바로 병력 이동 명령을 내릴까요?”
하지만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여긴 따뜻하지만, 북미 동해안 지역은 무척 춥잖아? 물론 그곳에 배치된 모든 병사는 방한 장비를 갖추고야 있지만...그것과는 별개로 한겨울에 병력을 이동하는 것은 좀 그렇지.”
정성국의 말처럼 이곳 새한성의 기후와 매사추세츠의 기후는 전혀 달랐고 매사추세츠는 이곳에 비한다면 꽤 추운 편이었다.
그 때문에 군사청에서는 병사들의 방한 장비를 마련하느라 꽤 고생했고.
특히나 군사청에 소속된 병사 대부분은 겨울에도 포근한 남쪽 지역에 사는 원주민 출신이 대부분이었기에 북미 동해안 지역의 추위를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런 정성국의 걱정에 군사청장도 어느 정도는 동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요. 조선 출신들은 그나마 괜찮은데 원주민 출신들은 아무래도 추위를 많이 타서...”
“그래. 그러니 당장 병력을 이동해봐야 좋을 것은 없어. 이보게. 외무청장. 누벨 프랑스의 동맹 부족이 바로 누벨 프랑스와 동맹을 파기한 것은 아니지?”
정성국의 질문에 조용한 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메타코멧이 나름 조용하게 움직이기도 했고 섣불리 이것이 알려지면 누벨 프랑스가 자신들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원주민 부족들이기에 알아서 입단속을 했다고 합니다.”
메타코멧이 누벨 프랑스의 동맹 부족들을 설득했지만 그렇다고 이들 부족이 곧바로 누벨 프랑스에 동맹을 파기한다고 연락한 것은 아니었다.
북미왕국은 누벨 프랑스를 공격할 때 원주민들이 말려들어 피해 보는 것을 꺼렸고 그 때문에 자신이 누벨 프랑스의 모든 동맹 부족을 설득할 때까지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고 이야기한 만큼 이러한 내용을 동맹 부족에게 알려 당분간은 평상시대로 행동하고 북미왕국이 누벨 프랑스를 공격하면 그때 동맹을 파기하고 전투에서 빠지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원주민들이야 생존을 위해 북미왕국에 붙은 만큼 메타코멧의 말을 환영하며 필사적으로 부족을 단속했고.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럼 우리가 누벨 프랑스에 선전포고하면 그때 움직인단 뜻이지?”
“그렇습니다.”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굳이 일찍 움직일 필요는 없지. 날씨가 풀리면 병력을 이동하자고.”
“허면 언제쯤 병력을 이동할까요?”
군사청장의 질문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병력이 집결하는 데까지 대략 2주가 걸린다 했으니...2월 15일쯤에 병력을 이동시키게. 미리 명령을 내려 둬.”
“알겠습니다. 전하.”
군사청장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하자 정성국은 피식 웃고 덧붙였다.
“그리고 4함대 사령관인 이정운에게도 미리 연락을 보내. 3월이 되기 전에 물자를 최대한 옮겨 두라고. 병력을 세인트로렌스 강 하류에 옮기고 일부는 함께 움직이며 퀘벡을 공격하고 일부는 아카디아 해안가를 공격하며 일부는 세인트로렌스 만을 봉쇄하고 혹시 모를 프랑스 본국에서 오는 선박까지 막아야하니 바쁠 테니까 말일세.”
현재는 아무래도 배가 부족한 상황이라 4함대는 물자 수송에 치중하고 있었기에 덧붙이자 군사청장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연락을 보내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군사청장과의 이야기를 끝낸 정성국은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외무청에서는 사전 작업을 좀 해줘야겠어.”
“물론입니다. 말씀만 하시지요.”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일단은 에스파냐와 잉글랜드에 이야기해둬. 저들이 먼저 이로쿼이 연맹을 움직여 우리를 공격하려 했다고.”
북미왕국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진 상황에서 북미왕국이 누벨 프랑스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선제공격했다고 알려지는 것보다는 프랑스에서 먼저 수작을 부려 북미왕국이 공격했다고 알려지는 것이 북미왕국의 이미지에도 좋았고 추후 협상에서도 유리했기에 정성국이 이야기하자 조용한 곰은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본국에 그렇게 알려지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유럽에도 그렇게 소문내도록 하지요.”
정성국은 조용한 곰의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그리고 4함대의 도움을 받아 3월 1일에 퀘벡으로 사절을 보내.”
정성국이 보내라는 사절이 선전포고를 위한 사절임을 파악한 조용한 곰이 조금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음...이번엔 기습 선제공격은 하지 않습니까?”
에스파냐와의 전쟁에서 기습 선제공격을 통해 재미를 보았기에 조용한 곰은 이번에도 정성국이 누벨 프랑스의 영역을 기습 선제공격할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기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생각이네. 뭐 사절을 보내면서 세인트로렌스 강 수심을 파악하고 주변을 정찰할 수 있으니 그것만 하더라도 나쁠 것은 없지.”
정성국의 말에 군사청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둘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별말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지요.”
“아. 물론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선전포고를 하면서 항복도 권유해보게. 철수는 보장하겠다고.”
정성국이 피식 웃으면서 덧붙이자 청장들은 다들 피식거리며 웃었고 조용한 곰 역시 슬쩍 미소지으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