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유철은 퇴궐한 후 한동안 집에서 휴식을 취했다.
알게 모르게 먼 길을 여행하며 쌓인 피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후 유철은 정태화의 집을 방문했다.
정태화는 사랑방에서 유철을 반갑게 맞이했고 유철이 가져온 책에 관심을 보였다.
이에 유철은 웃으며 가져온 책을 정태화에게 넘겨주었고.
“이것이 북미왕국에서 가져온 책입니까?”
“그렇습니다. 영상 대감.”
정태화는 책장을 넘겨 종이를 손으로 매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음? 생각보다...종이의 질이 좋은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습니다. 그들도 종이의 질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더군요. 해서 오래 보관해야 할 문서의 경우 조선의 한지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정태화는 유철의 대답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조금 의외긴 하군요. 북미왕국의 기술은 무척 발달해서...이런 물품들의 질은 북미왕국의 물품이 더 나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런 정태화의 말에 유철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북미왕국의 종이의 장점은 질이 아닙니다. 양이지요.”
“양이요? 아. 싸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특히 북미왕국은 모든 백성을 가르치고 이 모든 백성에게 교과서를 나누어 줍니다. 그것도 여러 권을요. 허니 이들은 종이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값싸게 많은 종이를 대량 생산하는데 주력한 겁니다.”
유철의 대답에 정태화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분명 북미왕국이 모든 백성을 가르치려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책까지 나누어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허어...그렇군요. 허허허. 모든 백성에게 책을 나누어준 다라...아무리 종이를 값싸게 대량 생산한다 해도 그 많은 책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겁니까? 아. 설마 증기기관을 사용해 책을 만드는 기물이라도 있는 겁니까?”
북미왕국은 이 증기기관을 이용해 신묘한 기물을 만들어 물품을 대량 생산했기에 급히 묻자 유철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 그건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절단이 방문했던 인쇄 공방의 풍경은 조선과 크게 다르지 않더군요. 사람이 직접 인쇄기라는 기물을 사용해 인쇄하고 있었습니다. 푸른 안개 공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증기기관을 이용하는 방식도 연구 중이긴 한데 아직 성과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리고 이 인쇄기라는 기물도 조선에서 금속 활자를 사용해 인쇄하는 방식과 외견상 큰 차이는 없었습니다만...”
“다만?”
“인쇄기 하나로 하루에 약 1500장 정도를 찍어낸다고 하더군요.”
처음 푸른 안개의 안내로 인쇄 공방에 들렀을 때 이곳의 풍경을 보고 사절단은 사람들이 인쇄기라는 기물을 이용해 일일이 인쇄하는 광경에 내심 맥이 풀렸다.
그동안 방문했던 공방들은 증기기관을 이용해 물품을 대량생산하는 곳이 대부분이었기에 사람 손으로 인쇄기라는 기물을 사용해 한 장씩 인쇄하는 것이 썩 대단하게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대략적인 풍경은 조선의 교서관(校書館)과 비슷할지언정 끊임없이 빠르게 인쇄기를 조작해 계속해서 종이를 인쇄하는 풍경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푸른 안개가 저 인쇄기 하나로 하루에 약 1500장 정도를 찍어낸다고 이야기하자 사절단은 역시 북미왕국의 기술은 대단하다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선의 경우는 금속 활자는 하루에 약 40장 정도의 종이를 인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정태화도 알고 있었기에 감탄사를 토해냈다.
“허어...우리 조선의 인쇄술도 나름 발달했다고 생각했는데 비교가 안 되는군요.”
“그렇지요.”
조선의 인쇄 방식은 금속 활자 위에 먹물을 바르고 그 위에 종이를 두드려 인쇄하는 마치 탁본을 뜨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허나 이를 사람 손으로 하다 보니 잘못하면 먹이 번져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거나 혹은 글자가 제대로 인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인쇄 속도는 낮을 수밖에 없었고.
하지만 북미왕국은 깔끔하고 빠른 인쇄를 위해 유럽처럼 인쇄용 잉크를 따로 개발했고 조선과는 달리 기계로 찍어 균일하게 힘을 가할 수 있게 만들었기에 인쇄 속도가 월등히 빨랐다.
정태화는 유철의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인쇄기의 설계도는...”
이에 유철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설계도는 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쇄기를 팔 수는 있다고 하더군요. 해서 인쇄기를 주문했습니다.”
증기기관을 비롯한 각종 기계 장치라면 함부로 조선에 넘길 수 없었지만, 인쇄기는 좀 다른 문제였다.
인쇄기 역시 중요한 기계 장치이긴 했지만,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기로 인해 유럽에선 지식의 전파가 빨라지고 대중화되어 유럽의 발전을 이끄는 방아쇠가 된 만큼 조선의 발전을 위해 넘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북미왕국 인쇄기의 금속 활자는 조선의 정음과는 다른 북미왕국의 한글로 되어있었기에 조선에서 인쇄기의 규격에 맞는 금속 활자를 만들지 않는 한 북미왕국 인쇄기로 대량으로 찍어내는 책은 자연스럽게 한글을 사용하게 될 테니 아주 먼 훗날에는 한자보단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고.
해서 인쇄기와 잉크를 함께 묶어 무척이나 싸게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런 유철의 말에 정태화는 인쇄기가 조선에 들어오면 더 많은 책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활짝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오. 그렇습니까? 허면 이번에 인쇄기를 가져온 겁니까?”
“아닙니다. 남는 것이 없어 제작한 후 내년에 가져다주겠다고 했습니다. 대금은 그때 지불하라고 하더군요.”
“허허허. 고생하셨습니다.”
정태화와 유철은 이 일을 조정 대신들에게 알리고 대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상의했다.
그 후 정태화는 조금 진정하고 유철이 가져다준 책을 확인했다.
그리고 조금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흐음...북미왕국의 책은 좌에서 우로 가로쓰기를 택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띄어쓰기를 활용해 가독성을 높였더군요.”
조선의 방식과는 달랐지만, 오히려 보기에는 나쁘지 않았기에 정태화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쁘지 않군요. 헌데 이거 언문과는 조금 다른 듯한데...”
“예. 언문을 조금 개량했다고 하더군요. 북미왕국인들은 이를 한글이라고 부릅니다. 허나...언문과는 크게 다르지 않아 읽는 데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한글이라...그렇군요.”
유철의 말처럼 북미왕국의 한글은 언문과는 조금 달랐지만 몇 가지 문자가 빠진 것에 불과해 이 책을 읽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해서 내용을 빠르게 살펴보다 유철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고 하셨지요?”
“정확히는 초등학교에서 다니는 학생들이 보는 교과서라고 하더군요.”
“초등학교?”
유철의 대답에 정태화가 처음 듣는 단어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유철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대전에서 북미왕국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설명할 때 대학교에 대해선 간단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 조선으로 치면 성균관과 비슷한 북미왕국 최고 교육 기관이라던 그 대학교 말씀입니까?”
“예. 기억하시는군요.”
“허허허. 그림으로만 보기엔 궁보다 커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실제 면적도 북미왕국의 궁보다 더 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조금 놀랐지요.”
이는 실제 대학교를 방문했던 유철도 놀란 부분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북미왕국은 그런 부분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풍토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요. 아무튼, 그때는 단순히 대학교에 관해서만 짧게 이야기했었지만...”
그러면서 유철이 정태화에게 북미왕국의 교육 체계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고 이를 모두 듣고 정태화는 교육 체계에 감탄했다.
“허어...북미왕국의 교육 체계가 무척 짜임새 있군요.”
“예. 그리고 북미왕국의 급격한 기술 발전은 바로 그러한 교육 체계가 뒷받침해주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북미왕국이 이러한 교육 체계를 만든 것은 결국 계속해서 기술적인 우위를 차지하기 위함임을 눈치챈 정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이를 조선에 적용할 방법이 없을까 싶었지만 그건 어려웠기에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부럽긴 하지만 이러한 체계를 조선에 가져올 수는 없겠군요.”
“예. 솔직히 어렵지요. 북미왕국의 교육 체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국가에서 이 모든 것을 담당한다는 것인데...조선에선 이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조선의 관리들조차 현실적인 녹봉을 주지 못하는 판국에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수많은 선생을 고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해서 정태화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들고 있던 책의 맨 앞에 쓰여 있는 세계사라는 글자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아무튼,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 그런지 이해하기 쉽게 잘 풀어쓴 책이군요. 그리고 어릴 때부터 이렇게 세상이 무척 넓고 수많은 나라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신기하고요.”
정태화의 말에 유철도 아쉬움을 털어내고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저들은 유럽을 극도로 경계하는 눈치였고 그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그건 투로시노도 비슷했지요.”
정태화가 제물포에서 만났던 투로시노도 유럽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이들은 청나라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잖습니까. 해서 물어보니 유럽은 자신들처럼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는 풍토가 있어 발전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이야기하더군요. 더불어 저들도 자체적으로 증기기관을 개발해 연구 중이라고 하니...”
그 말에 증기기관이라는 기계가 얼마나 대단하고 유용한지를 파악한 정태화가 화들짝 놀라 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렇습니까? 허면 저들도 북미왕국처럼 증기기관을 이용하는 겁니까?”
그런 반응에 유철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아직은 그런 수준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건네주었던 초기의 증기기관 수준이라고 하더군요.”
“흐음...그렇다면 조선에도 희망은 있군요.”
정태화의 말에 유철은 과연 그럴까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 선비들이 북미왕국의 학문에 흥미를 갖고 이를 연구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북미왕국에서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부르는 것이 조선에서는 잡학으로 분류되는지라...”
조선에서는 유학과 무학(武學)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잡학으로 분류했고 그 때문에 양반들은 유학과 무학을 제외하면 흥미로 잠깐 공부하는 정도가 다였다.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유철이 과연 선비들이 북미왕국의 학문을 계속 연구할까 싶은 표정이었지만 정태화는 고개를 저었다.
북미왕국으로 사절단이 떠난 이후에도 북미왕국에 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북미왕국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북미왕국에 다녀온 이들이 한양에 도착하자 이들에게 북미왕국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해 한양은 무척 떠들썩한 상황이었고.
자신과 조정 대신들이 대전에서 북미왕국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보고 북미왕국의 발전에 놀란 것처럼 북미왕국에 관심을 두고 있던 양반들도 북미왕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북미왕국이 고작 10년 만에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위기는 바뀔 것으로 생각해 정태화가 입을 열었다.
“허나 이번 사절단이 돌아와서 한양이 무척 떠들썩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많은 사람이 북미왕국의 발전에 관심을 두고 있고 북미왕국 발전의 기반이 우리가 무시했던 그 잡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생각이 조금 바뀔 거라 믿습니다.”
정태화의 말에 유철은 슬쩍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이 기회에 잡과에 기술과를 추가해 뛰어난 장인들을 선발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증기기관을 연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은 모든 조정 대신들이 인정하고 있으니 반대하지는 않을 테고요. 그리고 이참에 잡과의 위상을 조금 높이는 것도 괜찮아 보이고요.”
유철을 정태화의 말에 무릎을 쳤다.
“아. 그렇군요! 역시 영상대감이십니다.”
유철의 반응에도 정태화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이러한 분위기는 한양에 국한되어 있지요. 지방의 양반들도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니...예판 대감께서 북미왕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책으로 써 퍼트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유철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음?”
“이미 배 안에서 북미왕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써 북미왕국 견문록이라고 이름 붙였고 책을 찍어내기 위해 목판을 만드는 중입니다.”
갑작스럽게 웃는 유철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던 정태화는 유철의 이야기에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그렇습니까?”
“예. 다만 북미왕국의 수많은 기물은 글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감이 있어 간단한 그림까지 집어넣었기에 목판 제작에 시간이 조금 걸리는 중입니다만...조만간 책을 최대한 많이 제작해 퍼트릴 생각입니다.”
확실히 그림이 없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기물이 많았기에 정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그 북미왕국 견문록이 지방에도 널리 퍼지면 조선은 조금이나마 변할 겁니다.”
“그러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그 북미왕국 견문록이 발간되면 한 권 보내주실 거지요?”
“하하하. 물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