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곡식이 누렇게 익어 수확하는 계절이 다가왔기에 정성국은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행정청장이 정성국의 집무실로 들어와 들고 있던 묵직한 보고서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전하. 이번에 새진주에서 올라온 보고입니다. 북미 동해안 지역의 근황 보고를 취합한 자료입니다.”
“그래? 수확량은 어떻다던가?”
“각 지역 행정청에서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수확량 자체는 아무래도 이곳과 비교하면 떨어진다고 하더군요.”
“그럼 현지 분위기는?”
정성국은 행정청장의 대답에 조금 안색을 찌푸리며 급히 되물었다.
물론 북미 동해안 지역의 수확량이 이곳에 미치지 못할 거라는 것은 예상했다.
북미왕국의 주요 곡창지대라 할 수 있는 새한강 유역과 새한성-새나주 지역의 경우는 에스파냐를 통해 들여온 구아노를 비료로 사용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번 수확은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에 진출하고 처음으로 수확하는 해였고 특히나 북미왕국이 이 지역 주민들이 주로 재배하던 담배의 재배를 금지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작물을 재배한 터라 작황이 좋지 못하다면 북미왕국의 정책에 불만을 토해낼 수 있었기에 정성국이 걱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성국의 질문에 행정청장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현지 주민들의 분위기는 무척 좋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기엔 평작에도 못 미치는데...저들은 이 정도면 풍작이라며 무척 기뻐한다고 합니다. 더불어 북미왕국에선 수확 일부를 세금으로 가져가지도 않으니 현재 북미 동해안 지역의 농가 분위기는 거의 축제에 가깝답니다.”
“아. 다행이군. 솔직히 조금 걱정했는데.”
행정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이 안도하자 행정청장 역시 이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특히 버지니아 지역의 주민들은 아무래도 담배 농사에 주력했었기에 새로운 작물을 재배했다가 수확이 좋지 못할 것을 우려했습니다만 농업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덕분에 순조롭게 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정성국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럼 잉글랜드인과 원주민 간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겠는데?”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에 진출한 후 이곳에 농업 연구소 분소를 세우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오던 원주민들을 연구원으로 채용했다.
새한성에서 이 북미 동해안 지역으로 이동한 연구원들은 이 원주민들의 경험을 잘 정리해 새로운 작물을 재배하는 데 애를 먹던 잉글랜드인들에게 알려 주었고 덕분에 잉글랜드인들이 이번 수확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으니 예전 일 때문에 감정이 남아있어 서로 거리를 두던 원주민과 잉글랜드인의 사이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묻자 행정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덕분에 별다른 마찰도 없었고요. 이대로만 간다면 잉글랜드인과 원주민들이 나름대로 화합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만...”
“다만?”
“최근에 여자를 두고 서로 다툰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끙...”
정성국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지만, 행정청장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캐롤라이나 지역은 전하의 결단으로 계속해서 흑인 여성 노예들을 사들여 해방하고 있는 터라 상황이 조금 나은 편입니다만...뉴욕 지역이나 매사추세츠 지역의 잉글랜드인들은 여성이 부족해 원주민 여성에게 구애하다 원주민 남성과 싸운다는 보고가 자주 올라오고 있습니다.”
“하아...”
북미 동해안 지역 전체가 성비가 불균형한 상황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지역은 캐롤라이나 지역이었으나 다른 지역도 남성이 많은 편이었다.
이는 이곳으로 이주한 사람 중 절반 가까이가 농장에서 일하는 계약 노동자 출신으로 홀로 신대륙으로 넘어와 일하면서 돈을 벌어 독립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캐롤라이나 지역으로 이동한 흑인들의 경우는 이 성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성국의 허락을 받아 외무청에서 노예 상인과 접촉해 흑인 여성 노예를 사들이고 있어 꾸준히 여성이 유입되는 터라 당장 여성이 부족해도 시간이 흐르면 나아질 거라는 믿음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적지만 잉글랜드인이 주로 사는 세 지역은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에 진출하면서 유럽과의 연결이 끊긴 상태였다.
더불어 북미왕국에서는 당분간 북미 동해안 지역에 유럽 선박의 방문을 금지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였고.
당연히 당분간은 새로운 이주민, 특히 이곳에 정착한 남성들과 결혼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하는 여성이 없다는 소리였기에 짝이 없는 잉글랜드인 남성들은 주변의 원주민 여성에게 구애하려 했고 당연히 원주민 남성들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자신의 짝이 없어지는 셈이라 원주민 여성에게 접근하는 잉글랜드인 남성들에게 시비를 걸어 싸운다는 보고가 자주 올라오고 있었다.
정성국은 원주민과 잉글랜드인의 화합을 위해선 이를 내버려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보았다.
원주민은 원주민끼리, 잉글랜드인은 잉글랜드인끼리 결혼하는 것보다는 서로 뒤섞여 살아가는 것이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원주민 여성이 많아야 가능한 일이었고 당장 이를 방관했다간 이번엔 영토 문제가 아니라 여성 때문에 원주민 남성과 잉글랜드인 남성이 다툴 판이라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답은 하나뿐이지. 유럽에서 북미왕국으로 이주할 여성들을 구하는 것. 에스파냐나 잉글랜드는 비교적 우리에 우호적이니 외무청에서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가능할 것 같고. 뭐 이곳으로 이주하려는 여성들이 얼마나 있을까 싶긴 한데...그래도 아예 없지는 않겠지.”
정성국은 저 북동쪽에 있는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북미 동해안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까진 유럽에서 이주민을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어 여성에 한정해서 이주민을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이 시기 뱃길은 무척 위험했기에 대서양을 넘어 북미왕국으로 오려는 여성이 얼마나 있을까 싶긴 했지만, 북미왕국은 꽤 부유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 지역이 잉글랜드의 식민지였을 때 보다는 여성 이주민이 조금 많지 않을까 싶긴 했다.
그리고 그런 정성국의 말에 행정청장은 고개를 끄덕인 후 정성국의 눈치를 살피며 슬쩍 말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성비를 맞추기 위해선 꽤 많은 여성이 필요한데 당장 그 많은 여성을 데려오긴 어렵겠지요.”
“어쩌겠나. 다른 방법이 없는데.”
“...다른 방법도 있긴 합니다.”
“음? 무슨 방법?”
정성국이 생각하기엔 유럽에서 여성 이주민을 구하는 방법 외엔 없다고 생각했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행정청장을 바라보자 행정청장은 무척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캐롤라이나 지역처럼 노예를 사들여 해방하는 방법이지요.”
그제야 정성국은 왜 행정청장이 자신의 눈치를 살핀 것인지 이해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성국은 노예 상인과의 거래가 썩 탐탁지는 않았지만, 노예 상인과의 거래를 통해 당면한 북미왕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에 노예 상인과 거래를 허락했다.
그런 만큼 흑인 여성 노예를 더 사들이는 것도 못 할 것은 없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흐음...아직 캐롤라이나 지역의 성비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흑인 여성들을 뉴욕 지역과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보내라고?”
“흑인 여성들이 아닙니다. 백인 여성들이지요.”
“엥?”
행정청장의 대답에 정성국은 당황해 그를 바라보았고 행정청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 문제는 행정청에서 해결하기보다는 결국 외무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해 예전에 조용한 곰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조용한 곰이 그러더군요. 웅크린 늑대와 거래하는 노예 상인이 백인 여성 노예를 거래하는 다른 노예 상인과 연결해줄 수 있다고 말이지요.”
“아니...백인 여성 노예라고?”
“그렇습니다. 웅크린 늑대와 거래하는 상인은 발이 넓은 편인데...개중에 저 북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취급하는 자와도 안면이 있다고 하더군요. 헌데 그곳엔 백인 노예들이 꽤 있다고 합니다.”
행정청장의 말에 당황했던 정성국은 북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취급한다는 말에 그제야 상황을 이해하고 탄식했다.
“아! 설마 바르바리 해적이 잡은 노예들인 건가?”
정성국의 곧바로 상황을 짐작하자 행정청장은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정성국이 유럽 사정에 밝은 것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바르바리 해적은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활동하는 해적들을 통칭하며 이들은 지중해를 오가는 유럽의 선박과 해안가를 공격해 재산을 약탈하고 붙잡은 사람은 귀족이라면 돈을 받고 풀어주고 아니면 노예로 만들어 북아프리카 일대와 오스만 제국에 팔아넘겼다.
이들은 15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활동하며 100만 명이 넘는 유럽인을 노예로 만들어 각지에 팔아넘겼다는 것을 떠올린 정성국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을 때 행정청장이 말했다.
“우리 북미왕국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에 노예를 사들여 해방한다는 것을 파악한 노예 상인이 이 노예 상인과 연결해줄 테니 백인 여성 노예들도 사들여 해방해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답니다.”
정성국은 행정청장의 말에 냉소했다.
“꼴에 같은 백인에 기독교인이라 안타깝긴 한 모양이지? 헌데 자신의 돈을 들여 구하기는 아깝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행정청장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그런 것일 수도 있고...아니면 북미 동해안 지역의 사정을 짐작하고 우리의 호의를 얻기 위해 그리 이야기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행정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잠시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끙...솔직히 노예 상인들과는 계속해서 거래를 확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가 없군. 알겠네. 허락하지.”
정성국이 허락하자 행정청장은 무척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외무청에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아. 그것과는 별개로 에스파냐와 잉글랜드와도 이주 문제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라고 전하게. 그리고 일단은 여성에 한정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이것을 바로 알려 잉글랜드인 남성들을 조금 진정시켜보겠습니다. 전하.”
행정청장의 말에 정성국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주게.”
* * *
김만기는 유철이 머무는 선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유철은 선실 안에 마련된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다가 선실로 들어온 김만기를 바라보았다.
“아. 오셨습니까.”
김만기는 하와이 제도를 떠난 뒤로 선실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수정하기를 반복하는 유철을 보고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수정하고 계신 겁니까? 전에 보았던 내용도 좋았습니다만...”
그런 김만기의 말에 유철은 고개를 저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부족한 부분이 보여서 말입니다. 더불어 조선의 선비들이 과연 이 북미왕국 견문록을 읽고 저나 사절단의 일원처럼 북미왕국의 발전에 충격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도 없고요.”
비록 매년 북미왕국에 사절단을 보내기로 합의했지만 그래 봐야 북미왕국에 방문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유철은 조선 선비들에게 북미왕국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려는 생각으로 북미왕국에 방문해 보고 들었던 것을 글로 써 책으로 만들 생각을 했고 이를 북미왕국 견문록이라고 이름 붙였다.
“괜한 걱정이십니다. 충분해요. 그리고 실제 출판할 때는 화공들의 그림까지 들어갈 예정이지 않습니까. 그 정도면 조선의 선비들이 북미왕국 견문록의 내용을 이해하고 우리처럼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유철이 자세하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조선의 선비들이 북미왕국의 기물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 짐작했기에 북미왕국의 책들처럼 곳곳에 저들이 삽화라고 부르는 그림을 많이 넣을 생각이었다.
사절단에는 여러 화공이 동행하고 있었고 이들에게 이를 이야기하자 화공들은 기꺼이 이 북미왕국 견문록에 들어갈 그림을 그려주었다.
“으음...알겠습니다. 그럼 적당히 마무리하도록 하지요. 헌데 갑자기 어인 일이십니까?”
유철이 북미왕국 견문록을 집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김만기는 혹시 자신이 유철을 방해할까 우려해 함부로 선실을 방문하지 않았기에 유철이 묻자 그제야 김만기는 자신이 유철을 만나러 온 까닭을 떠올리고 활짝 웃었다.
“드디어 조선의 바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유철은 자신이 북미왕국 견문록을 집필하는 사이 벌써 조선에 당도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벌써 시간이 그리 흐른 겁니까? 허면 이곳은 어디쯤이랍니까?”
그런 유철의 반응에 김만기가 씩 웃으며 그를 재촉했다.
“곧 있으면 제주도 인근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워낙 길었던 항해인 만큼 제주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바로 제물포로 이동한다고 하더군요. 빨리 나오시지요. 오랜만에 조선의 공기를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래야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