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북미왕국의 사절단을 태운 함대가 도착했다는 소식과 이 함대가 조금 위협적으로 보인다는 보고에 아베 다다아키는 선착장으로 나갔다.
이미 바다가 보이는 선착장 인근은 소문을 듣고 북미왕국의 흑선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온 에도 백성들로 가득 했다.
이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찬 아베 다다아키는 계속해서 인파를 해치며 이동했고 마침내 에도 만에 정박해있는 북미왕국의 함대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 웅장함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해냈다.
"허. 대단하구나. 저게 바로 그 흑선이란 말인가..."
아베 다다아키는 북미왕국의 흑선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야 북부의 번주들이 기를 쓰고 수군을 육성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저 거대한 배 한 척을 잡지 못해 수십 척의 세키부네가 침몰했었으니...북부의 번주들에게 저 흑선은 공포 그 자체였겠지. 그리고 그러한 흑선이 저렇게 많이 나타났으니 빚까지 지어가며 수군을 육성했을 테고.'
그렇게 아베 다다아키가 북미왕국의 함대를 보고 감탄하는 사이 선착장을 관리하던 무사가 급히 아베 다다아키에게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그래. 저기에 북미왕국의 사절단이 타고 있는 것이 맞나?"
"그렇습니다. 사절단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헌데 수가 좀 많지 않나? 저들이 처음 이야기한 것은 사절단이 탄 배를 호위하는 소규모 함대가 동행한다고 했었는데? 혹시 사절단이 왜 저런 대규모 함대와 함께 온 것인지 물어보지는 않았나?"
아베 다다아키의 물음에 무사가 대답하기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그것이..."
"괜찮네. 말해보게."
아베 다다아키의 재촉에 무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들은 고작 12척의 배에 불과한데 일본에선 이게 대규모 함대인 거냐고 의아한 기색이었습니다."
"끙..."
북미왕국의 배들은 큰 편이었기에 처음 북미왕국의 함대를 보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그 웅장함에 감탄하고 자연스럽게 저 함대를 대규모 함대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저들의 말처럼 고작 12척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 흑선의 전투력을 생각해보면...과연 우라가에 주둔한 수군 함대로 저 함대를 막을 수 있을까? 힘들 것 같은데...'
에도 만 입구에 해당하는 우라가에 주둔해있는 수군 함대의 규모가 거의 100척에 가까웠지만, 대부분이 세키부네인 만큼 과연 저 북미왕국의 함대를 막을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북미왕국의 함대도 크고 작은 2종류의 배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저 작은 배만 하더라도 세키부네보다 몇 배는 컸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들의 배가 클 뿐이지 실제로는 12척에 불과했기에 이것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막부의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기에 아베 다다아키는 무사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북미왕국의 함대를 선착장에 정박시키고 사절단을 하선시켜 준비해 둔 숙소로 모시게."
"알겠습니다."
* * *
아베 다다아키의 보고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무척 흥미로운 기색으로 되물었다.
"그래? 정말 그렇게 북미왕국의 흑선이 대단했다는 뜻인가?"
"솔직히 그렇사옵니다. 저들의 흑선은 두 종류였는데 커다란 흑선은 크기가 대단했고 작은 흑선은...참으로 기묘했사옵니다."
"기묘하다?"
배가 기묘하다는 아베 다다아키의 말에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의아한 기색을 보이자 아베 다다아키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작은 흑선이라 해도 우리의 안택선보다 큰 배인데 돛도 노도 없이 스스로 움직였사옵니다."
"뭐? 그게 말이 되는가?"
"정말이옵니다. 혹시나 해 우라가에 주둔해있던 자들에도 물어보았는데...작은 흑선은 돛도 노도 없이 움직여 수군 병사들이 이를 확인하고 무척 놀랐다고 했사옵니다."
"허..."
아베 다다아키의 설명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북미왕국의 흑선에 흥미를 보이다가 중얼거렸다.
"스스로 움직이는 거대한 배라...그렇다면 막부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북미왕국의 흑선을 한 척 사들였으면 좋겠는데..."
이에 아베 다다아키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신 역시 스스로 움직이는 흑선이 무척이나 신기해 사절단을 숙소로 안내하면서 혹시 흑선을 팔 수 있겠느냐고 묻자 그건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사옵니다."
"그래? 흐음..."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무척 아쉬워하자 아베 다다아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허나 에조 지역의 문제를 거론하며 사절단을 압박한다면...가능하지 않을까 싶사옵니다."
"아."
어차피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북미왕국과 우호적으로 지낼 생각으로 사절단을 불러들였기에 에조 지역의 문제는 덮어둘 생각이었다.
솔직히 저들이 뒤에서 원주민들을 선동해 결국 에조 지역을 차지한 것은 괘씸하긴 한데 저들이 먼저 사절단을 보내는 것으로 머리를 숙인 셈이나 다름없었고 북미왕국과 우호적으로 지내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득이었으니 괜히 에조 지역의 문제를 거론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저들을 압박해 흑선을 한 척 구할 수 있다면 적당히 이 문제를 거론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묘안이군."
* * *
투로시노는 정일신이 붙여준 호위병들과 함께 하선해 막부에서 마련해 둔 숙소에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에도성으로 입궐해 아베 다다아키에게 기본적인 예법과 자신들을 왜국이 아닌 일본으로 불러달라는 요청을 들은 후 대전으로 이동해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알현했다.
"북미왕국 사절단의 총 책임자인 투로시노가 막부의 쇼군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북미왕국은 저 거대한 바다 건너 존재하는 대륙에 존재하는 나라라고 들었네. 그렇게 먼 곳에서 이곳까지 온 것을 환영하네."
그 후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투로시노가 건네준 친서와 예물 목록을 확인한 후 북미왕국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졌고 투로시노는 적당히 대답했다.
그러다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북미왕국의 정확한 영토를 알고 싶다며 혹시 지도가 없는지 물어보았고 투로시노는 청나라에도 넘겨주었던 지도를 꺼내 아베 다다아키에게 건네주었다.
아베 다다아키는 이를 펼쳐 확인한 후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조심스럽게 바쳤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지도를 펼쳐 바로 에조 지역을 확인하고 이거다 싶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음? 여긴 한때 우리 일본의 영토였고 이젠 아이누 부족 연합의 영토인데...이 지도엔 북미왕국의 영토로 표기되어 있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지적에 투로시노는 즉각 대답했다.
"아이누 부족 연합은 북미왕국에 합류하기로 마음먹었고...우리 북미왕국은 고심 끝에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해서 그 지역은 이제 북미왕국의 영토이지요."
투로시노의 대답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그게 말이 되느냐는 표정으로 투로시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에조 지역의 원주민들은 자신들끼리 살겠다면서 봉기를 일으켰고 결국 아이누 부족 연합을 세웠네. 헌데 그렇게 피를 흘려 세운 아이누 부족 연합을 기꺼이 해체하고 북미왕국에 에조 지역을 고스란히 가져다 바쳤다고?"
이에 투로시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사실이 그런 것을 어쩌겠습니까. 그리고 아이누인들은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정?"
어디 한번 들어는 보겠다는 표정으로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투로시노를 바라보자 투로시노가 대답했다.
"분명 일본은 아이누 부족 연합의 독립을 인정했습니다만 그 이후로도 아이누 부족 연합 인근의 번주들은 계속해서 배를 건조하고 수군을 키워나갔습니다. 당연히 아이누인들은 이를 위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지요."
"허?"
"그러니 아이누인들은 자신을 도와줄 세력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누 부족 연합은 북미왕국에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했고요."
투로시노의 대답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즉각 투로시노의 말을 끊었다.
"잠깐. 그 이야기는 결국 북미왕국이 원주민들과 교류를 했다는 뜻 아닌가? 그것도 당시엔 이 에조 지역이 우리 일본의 소유였으니 우리의 영토를 함부로 침범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닌가?"
이에 투로시노는 고개를 저었다.
"이 부분은 좀 명확히 설명할 필요가 있겠군요. 일본에선 이 홋카이도를 비롯한 북쪽의 모든 지역을 에조 지역이라고 부르며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합니다만...그건 일본의 주장일 뿐이지 실제 통치하던 지역은 홋카이도뿐이잖습니까? 하지만 우리 북미왕국은 그 북쪽의 아이누 섬의 아이누인들과만 교류했을 뿐이니 일본의 영토를 함부로 침범한 것은 아닙니다."
투로시노의 설명에 아베 다다아키가 즉각 반박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당신들이 아이누 섬이라고 부르는 섬도 엄연히 에조 지역에 포함된 곳입니다."
"글쎄요...오히려 청나라는 이 아이누 섬을 고혈도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던데요."
투로시노의 대답에 도쿠가와 이에쓰나와 아베 다다아키는 금시초문이었기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 섬의 아이누인들은 이 땅은 자신들의 땅이고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이누인들을 이 섬의 주인이자 독립적인 세력이라고 판단해 교류한 것뿐입니다."
투로시노의 말처럼 홋카이도를 제외한 다른 섬들은 실질적으로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기엔 어려운 면이 있었고, 특히 아이누 섬은 청나라에서도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투로시노의 말에 계속해서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기 어려웠던 아베 다다아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급히 입을 열었다.
"허나...홋카이도의 원주민들이 봉기해 이를 진압하려고 바다를 건너는 막부의 병사들을 북미왕국의 흑선이 공격했습니다. 이 부분은 명백히 북미왕국이 우리 일본을 공격한 것이 아닙니까?"
그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투로시노를 바라보았고 이 부분은 사실이었지만 이를 인정할 생각이 없는 투로시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것도 자세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서 투로시노는 청나라에 이야기한 것처럼 적당히 각색한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이를 듣던 아베 다다아키는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투로시노의 말을 끊었다.
"잠깐만요. 그럼 북미왕국은 이곳으로 오는 항로를 개척하려다 파손된 흑선 한 척을 원주민들에게 넘겨주었을 뿐이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먼바다를 항해하긴 무리였고 배를 수리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터라 탐사대는 고민 끝에 물자를 제공해 준 아이누인들에게 배를 내어주었을 뿐입니다. 물론 배의 수리법과 운용법을 알려주긴 했습니다만."
그러니 자신들은 개입한 것이 아니라는 투로시노의 말에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끼어들었다.
"허나 보고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조총도 사용했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건가?"
"아이누인들에게 내어준 배에 조총이 실려있었을 뿐입니다. 항해하다 해적을 만날 수도 있으니 배에는 조총이 꽤 실려있었으니까요."
투로시노의 대답에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바로 이거라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당장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배가 파손되었으니 수리하고 사용하라며 원주민들에게 줄 수는 있네. 허나 조총과 화약을 원주민들에게 주었다고?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투로시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조총이 대단한 무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탐사대가 개척한 항로는 바다가 거칠 뿐이지 해적은커녕 항해하는 동안 배 한 척도 보지 못했으니 굳이 조총을 싣기보다는 식량과 물자를 싣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더불어 아이누인들은 사냥을 해서 먹고 사는 만큼 조총을 요긴하게 사용할 거라고 생각해 넘겨주었을 뿐입니다."
"허면..."
"그렇게 북미왕국의 탐사대는 아이누 섬의 아이누인들에게 배 한 척과 물자 일부를 넘겨주고 떠났고...아이누 섬의 아이누인들은 우리가 넘겨준 배를 수리하고 조총을 이용해 사냥하면서 살았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홋카이도의 아이누인들이 봉기하자 같은 민족이기에 이들을 도와주었다고 하더군요."
"끙..."
투로시노의 말대로라면 막부의 진압군은 북미왕국이 아닌 고작 에조 지역의 원주민에게 패한 셈이었기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탄식했다.
하지만 투로시노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아이누인들은 일본에 독립해 아이누 부족 연합을 세웠지만...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아이누인들은 남쪽에 있는 일본의 번주들이 새롭게 배를 건조하고 수군을 육성하자 일본이 다시 침략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도와줄 세력이 필요하다고 느껴 우리 북미왕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 북미왕국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북미왕국은 아이누 부족 연합의 동맹이 되었지요."
"동맹이라고?"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동맹이었지요. 하지만 우리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누인들은 안타깝게도 자신들끼리 나라를 운영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남쪽의 번주들은 계속해서 수군을 키우니 동맹으론 부족하다고 여겨 결국 북미왕국에 합류한 겁니다."
"으음..."
투로시노의 설명이 끝나자 도쿠가와 이에쓰나와 아베 다다아키는 허탈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북미왕국을 압박해 흑선을 한 척 얻어보려 했는데 투로시노의 철벽 방어에 결국 막힌 셈이었으니.
물론 투로시노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일단 북미왕국과는 우호적으로 지내기로 마음먹은 만큼 이를 대놓고 지적할 수는 없었다.
잠시 생각해보던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결국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알겠네. 그동안 우리는 자세한 사정을 몰라 오해했었네. 이처럼 서로 간에 교류가 없으면 사정을 모르고, 사정을 모르면 오해할 수밖에 없지. 그리고 우리 일본과 북미왕국은 이웃 국가인 만큼 이러한 오해가 쌓이면 분쟁이 발생할 터이니 이는 양국에 좋지 않으리라 보네. 그러니 앞으로는 서로 사절단을 보내면서 우호적으로 교류를 해 나갔으면 좋겠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말 속에는 일본은 더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었기에 투로시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쇼군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