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화
에조 지역의 아이누인들이 아이누 부족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왜국에서 독립한 이후 아이누인들과 왜인들간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특히 이 지역에 다수의 흑선이 출몰한 이후 인근의 번주들은 흑선이 얼마나 강력한지 뼈저리게 실감했기에 지레 겁을 먹었지만, 새로 등장한 흑선들은 에조 지역과 본토 사이의 해협을 순찰하며 북쪽으로 향하는 어선들을 제지했을 뿐이지 공격하지도, 남하하지도 않았기에 최근엔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흑선 한 척이 남하해 히로사키 번 인근 앞바다에 등장했으니 당연히 히로사키 번주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한 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한 척에 당한 배가 어디 한두 척이던가.
해서 곧바로 주변 번에 전령을 보내려는 찰나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흑선이 선착장에 다가와 백기를 들었기에 선착장에 나가 있던 무사가 쪽배를 타고 흑선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해서 히로사키 번주는 일단 지원 요청은 미루고 병사들을 소집해 전투준비를 하면서 흑선에 올라탄 무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무사가 돌아와 저들이 갑자기 나타난 이유를 전하자 히로사키 번주는 급히 에도로 전령을 보냈다.
아베 다다아키는 북쪽에서 도착한 긴급 보고를 확인하고 급히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알현했다.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아베 다다아키의 말을 듣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허...사절단을 보내겠다라...그것도 아이누 부족 연합의 사절단이 아닌 북미왕국의 사절단이라고? 드디어 직접 나서겠다는 뜻인가?"
"그렇다고 판단되옵니다. 쇼군 전하."
아이누 부족 연합 뒤에 북미왕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서양 상인들에 의해 알게 된 이후 막부는 서양 상인들을 통해 북미왕국의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제대로 된 정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북미왕국이 저 신대륙 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나라라는 것과 서반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 그리고 서양의 여러 나라가 북미왕국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애조 지역을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애초에 에조 지역에 큰 미련은 없었고 식량 생산조차 어려운 척박한 에조 지역을 되찾으려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북미왕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낭비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북미왕국이 개입한 덕분에 에조 지역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이었기에 이쪽에서 먼저 북미왕국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은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해 저들이 먼저 사절단을 보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북미왕국이 사절단을, 그것도 전처럼 아이누 부족 연합이라는 이름이 아닌 북미왕국의 이름으로 먼저 접촉할 뜻을 내비치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아베 다다아키가 조심스럽게 바친 히로사키 번주가 쓴 서찰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친선 교류를 위한 사절단이라...그동안 수군에 집착하던 북부의 번주들은 무척 환영하겠군."
북미왕국에서 에조 지역에 흑선을 대거 배치한 후 당연히 북부의 번주들은 흑선이 남하할 것을 걱정해 번의 사정이 좋지 못함에도 수군 육성에 열을 올렸다.
그 후 북미왕국이 에조 지역 인근만 순찰할 뿐 남하하지 않았기에 조금 안도하긴 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해서 수군을 키우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북미왕국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며 사절단을 보낼 생각이니 답변을 달라고 연락해왔으니 이것이 알려진다면 북부의 번주들은 이를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사옵니다. 더불어 서양 상인들을 통해 북미왕국이 청나라에 비견되는 부유한 국가라는 것이 일본 전역에 알려졌기에 북미왕국과의 무역을 내심 기대하지 않겠사옵니까."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에조 지역을 탈환할 생각을 버렸지만 이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결정을 뒤에서 흉보며 공공연히 에조 지역을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막부 세력을 견제하고자 의도적으로 북미왕국의 국력을 무척 부풀려 알렸다.
덕분에 반막부 세력은 더는 에조 지역을 탈환하자는 주장을 하지는 못했지만, 본토 북부의 번주들은 북미왕국을 두려워해 번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무리해 수군을 육성하고 있었다.
애초에 북부의 번들은 부유한 편은 아니었고 에조 지역의 반란에 참여했다 막대한 피해를 보았으니 이를 복구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였는데 북미왕국의 존재가 알려지자 수군을 포기할 수 없어 번의 재정 상태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과 북미왕국이 정식으로 교류를 시작한다면 당연히 북부의 번주들은 저 부유하다는 북미왕국과의 무역에 참여하고 싶어할 것이 뻔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흠...그건 썩 달갑진 않군. 북부의 번들도 무역을 통해 부유해지기 시작하면 통제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물론 그건 그렇사옵니다만...현재 북부에 위치한 번들의 사정이 워낙 좋지 않은지라...차라리 나중에 북부의 번들도 부유해지면 북미왕국에 대규모 사절단을 요청하면 되는 것 아니겠사옵니까."
아베 다다아키가 막부가 서부에 위치한 번들을 견제하는 방책 중 하나인 조선 통신사를 언급하자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 통신사처럼 말이지? 흠...차라리 그게 낫겠군."
"그리고...이번에 방문하는 사절단을 이용하면 쇼군 전하의 위엄을 더욱 드높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음?"
아베 다다아키의 말에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아베 다다아키를 바라보았다.
"저 북미왕국은 이미 일본 내에 청나라에 비견되는 강국으로 알려져 있사옵니다. 그런 저들이 먼저 우리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사절단을 보내겠다고 청해왔으니 이는 저들이 우리의 국력을 인정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호오..."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반응이 나쁘지 않자 아베 다다아키는 계속해 입을 열었다.
"또한, 저들도 우리의 사정을 전혀 모르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저들은 교토가 아닌 이곳 에도로 사절단을 보내고 싶으니 괜찮겠냐고 물어왔사옵니다. 그 뜻은 곧 저들이 쇼군 전하를 이 땅의 진정한 지배자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러니 이를 적당히 포장해 널리 알린다면 쇼군 전하의 위엄이 이 일본 전역에 널리 퍼질 것이옵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아베 다다아키의 해석이 마음에 들었던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입을 열었다.
"흐음...나쁘지 않군. 저들을 이용해서 막부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라...알겠네. 연락해서 사절단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하게."
"알겠사옵니다. 쇼군 전하."
* * *
히로사키 번에 보냈던 인급 전선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인급 전선을 타고 히로사키 번을 방문했었던 외무청 관리의 보고를 받은 투로시노는 바로 정일신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일신은 집무실에서 나와 부관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리다가 3함대 사령부 건물로 들어오는 투로시노를 보고 말했다.
"아. 왔나? 먼저 집무실에 들어가 있게."
"알겠습니다."
투로시노가 집무실에서 기다리길 잠시.
정일신이 집무실로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막부에서 사절단을 보내도 좋다고 허락했다지?"
투로시노는 정일신이 외무청의 관리와 함께 히로사키 번에 다녀온 인급 전선의 함장에게 간단한 보고를 받았으리라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절단은 직접 바닷길을 통해 에도 만에 도착할 거라고도 이야기해두었습니다."
"그리고 한 척이 아니라는 것은 이야기해두었지?"
정일신의 질문에 투로시노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약간의 호위선들을 대동한 소규모 함대가 움직일 거라고 이야기해두었지요."
"하하하. 소규모 함대라. 그래. 그럼 조금만 기다리게. 명령을 내려두었으니 4일 후면 출발할 수 있을 거야."
정일신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투로시노는 호기심이 들었기에 슬쩍 물었다.
"헌데 이번엔 몇 척이나 움직이는 겁니까?"
이에 정일신은 짓궂게 웃으며 대답했다.
"3함대 전부."
"예? 잠시만요. 3함대 전부요?"
정일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투로시노는 무척 당혹스럽다는 표정으로 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3함대가 전부 자리를 비우면 이 지역의 경계는 어쩌고요?"
투로시노의 질문에 정일신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설마 우리가 자리를 비운 틈에 저들이 공격이라도 할까 봐?"
"뭐 그렇지야 않겠지만..."
처음에야 정일신의 말에 놀랐던 투로시노였지만 생각해보니 북미왕국의 배가 모두 자리를 비운다고 요 몇 년간 별다른 충돌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국의 수군이 이곳을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 수긍하는 투로시노에게 정일신이 덧붙였다.
"그리고 당분간 이번에 포로나이에 도착한 이주 선단이 우리를 대신해 주변 해역을 순찰할 걸세."
"아! 이주 선단이 있었군요!"
이주 선단 역시 최소한의 무장을 한 상태였다.
그런 만큼 3함대의 빈자리를 충분히 메워줄 수 있었고.
이에 안도하는 투로시노를 보고 정일신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아아. 현재 포로나이에 정박해 있는 이주 선단 소속 지급 함선 6척이 모두 출항 준비가 끝나는 대로 마쓰마에 항으로 움직일 테니 걱정하지 말게. 그리고 박경수에게도 방금 부관을 보냈으니 아이누 경비대도 당분간은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할 거야."
이미 조처를 다 해둔 정일신을 무척 믿음직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라본 투로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 4일 후에 떠나는 것으로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그러게."
* * *
미우라 반도 동쪽의 우라가는 에도 만의 입구에 해당하는 터라 만약을 대비해 막부의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세키부네의 갑판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던 한 병사는 에도 만 입구로 접근하는 생소한 외향의 선박들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옆에 앉아있던 다른 병사에게 말했다.
"야. 저게 대체 뭐지? 처음 보는 배 같은데?"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병사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다 기겁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음...? 헉! 저건 흑선이잖아? 그것도 대규모 함대야!"
이에 처음 흑선 함대를 발견했던 병사가 놀라며 눈을 찌푸리고 접근하는 대규모 함대를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아. 저게 흑선이라고?! 이대로 가면 저 흑선 함대는 에도 만에 들어갈 텐데? 깃발을 확인해봐! 너무 멀어서 잘 안 보여."
앉아있던 병사는 눈이 밝았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흑선에 달린 깃발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저런 깃발은 처음 보는데?"
그 대답에 눈을 찌푸리며 에도 만에 접근하는 함대를 바라보던 병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외쳤다.
"젠장. 그럼 빨리 무사님께 알려!"
"으...응!"
병사는 급히 세키부네에서 내려 선착장 근처의 건물로 들어가 그곳에서 쉬고 있는 무사에게 자신이 본 흑선 함대에 대해 급히 설명했다.
무사는 처음 병사가 급히 들어올 때는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병사의 설명을 다 듣고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아! 북미왕국의 사절단이 자신들의 배를 타고 온다고 했었지. 아마도 그들인가 보군."
대수롭지 않은 무사의 반응에 병사는 안도하며 중얼거렸다.
"아...그렇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요새 에도에 소문이 자자한 그 북미왕국 사절단이 바로 저들이었나 보군요!"
아베 다다아키는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이야기한 대로 북미왕국의 사절단이 에도로 온다는 것을 널리 알렸다.
이미 일본 내에는 북미왕국이 대단하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북미왕국이 막부에 사절단을 보내고 싶어한다는 소문을 퍼트리는 것만으로 막부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북미왕국이 먼저 사절단을 보내 쇼군을 알현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그만큼 북미왕국에선 막부를 높이 평가한다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소문을 퍼트리면서 은근슬쩍 이번에 오는 사절단이 마치 조공을 바치기 위해 오는 것처럼 포장하기도 했고.
"그래. 저들은 자신들의 배에 삼태극기를 걸고 다닌다고 하던데...확인했나?"
북미왕국은 혹시나 해 사절단이 탄 배는 북미왕국의 국기인 삼태극기를 달고 있다고 알렸기에 무사가 이를 묻자 병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조금 기묘한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 걸려있긴 했는데...생각해보니 그게 삼태극의 문양이긴 했습니다."
병사의 대답에 무사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북미왕국의 배가 확실하군. 어차. 북미왕국의 배가 그렇게 대단하다던데...어디 구경이나 해볼까?"
에조 지역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병사들을 가득 태우고 이동하던 배들이 북미왕국의 흑선 한 척에 막대한 피해를 본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북미왕국의 흑선에 무척 관심을 두고 있었고.
무사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건물에서 나와 에도 만의 입구를 향해 다가오는 커다란 배로 구성된 함대를 바라보고 기겁했다.
"헉! 저...저게 뭐야!"
그런 무사의 반응에 병사는 조금 당황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북미왕국의 배잖습니까? 저기 삼태극이 그려진 깃발을 보십시오."
병사의 말에 정신을 차린 무사는 삼태극기를 확인하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하. 약간의 호위선을 대동한 소규모 함대라더니...저게 소규모 함대라고?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