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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92화 (292/850)

292화

조선의 사절단은 떠나기 전날 궁에 들어 정성국을 알현해 하직 인사를 올렸고 정성국은 송별연을 열어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

밤늦게까지 진행된 송별연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온 유철과 김만기는 방 한쪽의 티테이블에 앉아 오랜만에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후우...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하는군요. 참으로 아쉽습니다. 조금 더 머물면서 북미왕국을 파악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김만기가 살짝 불콰해진 얼굴로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자 유철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기는 하지요.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를 수야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리고 전 하루라도 빨리 조선에 가서 이곳에서 보았던 것들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선이 안주하는 사이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조선의 선비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그런 유철의 말에 김만기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 허나 다른 선비들이 과연 이를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야 하지요. 솔직히 저도 다른 사람이 물을 끓여 나온 힘으로 거대한 쇳덩이가 움직이고 기물들이 알아서 움직여 면포를 짠다고 이야기했다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조선의 사절단은 푸른 안개의 안내에 따라 정말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논밭과 어마어마한 규모의 철을 대량 생산하는 제철소, 증기기관을 이용해 만드는 수많은 기물까지.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증기기관을 이용해 최대한 인력을 배제하며 대량생산하는 공방들이었다.

특히나 가장 마지막에 들렀던 면포를 생산하는 공방들은 그나마 증기기관을 활용하는 공방에 익숙해졌던 조선 사절단에게도 충격적이었다.

방적기 하나가 뽑아내는 실이 물레 수십 개 분량이라는 것에 조선의 사절단은 모두 기겁했고 그 실을 가지고 기물이 알아서 움직여 면포를 빠르게 짜내는 모습을 보고 나선 조선의 사절단 모두 공포를 느꼈다.

그러한 기억이 되살아나자 김만기는 웃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다른 무엇보다 그 방적 공방과 방직 공방은...솔직히 충격이었습니다. 그나마 푸른 안개는 면포를 화폐 대용으로 사용하는 조선의 사정을 아는 만큼 면포를 수출하진 않겠다고 했습니다만..."

조선은 화폐 대신 쌀과 면포를 사용하고 있었다.

허나 북미왕국은 드넓은 땅에서 막대한 식량을 생산하고 있었고 더 많은 땅을 개간할 예정이라 식량의 가격은 더 내려갈 거라고 이야기했었다.

거기에 이렇게 공방에서 증기기관을 통해 대량으로 면포를 생산해 이를 조선에 들여온다면 자연스럽게 조선의 경제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전 원나라가 발행했던 저화의 가치가 폭락한 후 고려가 흔들려 결국 조선이 건국했다는 것을 아는 사절단 일행들은 당연히 눈앞의 광경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사절단의 표정에서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눈치챈 푸른 안개는 웃으며 조선의 사정을 모르지 않는 만큼 조선에 면포를 수출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이야기해주었기에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미왕국의 생산력을 직접 확인하자 언제까지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공감대가 조선 사절단 전체에 형성되었고 이는 유철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언제까지 면포나 쌀만으로 거래할 수는 없다는 것은 확실하지요. 돌아가는 대로 어떻게 해서든 화폐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입니다."

"그래야지요. 그리고 저는 조선에도 북미왕국처럼 인재를 육성하는 체계를 갖췄으면 좋겠는데..."

김만기는 각종 공방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북미왕국의 교육 체계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해 입을 열자 유철이 쓰게 웃었다.

유철 역시 모든 백성을 단계별로 구분해 가르치는 북미왕국의 교육 체계가 무척 인상 깊긴 했지만 이를 가져가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북미왕국의 체계를 그대로 가져갈 수야 없겠지요. 조선과 북미왕국의 상황은 너무 다르니까요."

"그렇긴 하지요."

"그리고 교육 체계보다는 무엇을 가르치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북미왕국의 교육 체계를 가져가서 유학을 가르친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흐음...그건 그렇지요."

유철의 말은 틀리지 않았기에 김만기는 한숨을 쉬며 술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유철이 품에서 무척 조심스럽게 종이를 꺼내 들었다.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증기기관의 초기 설계도이긴 합니다만...솔직히 이걸 조선에 가져간다 하더라고 과연 10년 만에 북미왕국처럼 증기기관을 활용할 수 있을까 싶긴 합니다. 북미왕국과 조선의 상황은 너무 다르니까요."

공방을 돌아다니면서 증기기관의 효용성에 감명을 받은 조선의 사절단은 어떻게든 이 증기기관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살 수 있는 서점의 책들은 모조리 사들였고 그 소식을 들었는지 푸른 안개가 초창기에 만들어졌던 증기기관의 설계도라면서 유철에게 슬쩍 건네주었다.

이에 유철은 떨리는 손으로 설계도를 받아들면서도 괜찮겠냐고 몇 번이고 물었지만 푸른 안개는 조선 사절단의 소식을 듣고 정성국이 내어준 것이니 괜찮다고 이야기해주었고.

그렇게 얻게 된 증기기관의 초기 설계도였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과연 조선에서 이 증기기관을 가지고 북미왕국처럼 응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유철의 말에 김만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확실히 북미왕국이 이렇게 급격하게 발전한 것은 역시 장인들의 대우와 위상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이 북미 대륙에 도착하기 전의 기술 수준은 별거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조선 장인들이 이러한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인데...조선에선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못한 조선 장인들이 이 북미 대륙의 땅을 밟자마자 대오각성을 한 것이 아니라면야 북미왕국이 정책적으로 장인들의 대우와 위상을 높여주었기에 가능했겠지요."

조선의 사절단이 북미왕국을 둘러보고 은근슬쩍 북미왕국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경악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곳에서 원주민들끼리 살아갈 때만 하더라도 이들의 수준은 예전 야인들 수준에 가까웠다.

헌데 조선인들이 이 북미 대륙에 도착한 이후 고작 10년 만에 감히 조선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기술을 자랑하고 있었으니 조선의 사절단은 도대체 이게 말이 되나 싶었던 것이고.

그리고 조선의 사절단은 그 원인을 교육과 장인들의 대우로 보고 있었기에 김만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철이 덧붙였다.

"그리고 학교의 아이들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연구원이나 장인이 되는 것이 소원이라고. 관리가 아니라 말입니다."

보통 조선에서는 관리가 되는 것이 모든 양반의 꿈이었지만 북미왕국은 달랐다.

"확실히...그건 조금 의외긴 했지요. 관리보다 그 연구청 소속 연구원과 장인들을 더 높게 쳤으니."

"그리고 북미왕국은 모든 아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요. 그중에 가장 똑똑한 아이들이 연구청에 들어가 다시 기술 연구에 매진하니 북미왕국의 기술 발전은 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이고요."

유철의 이야기에 김만기는 동의하면서도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조선에선 이러한 방책을 따라 하긴 어렵다는 것인데..."

북미왕국은 왕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평등했지만, 조선은 명백히 신분제가 존재했기에 이러한 방책을 따라 하자고 주장했다간 반상의 법도를 어지럽힌다는 명목으로 탄핵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이에 유철도 쓰게 웃으며 술잔을 들이킨 후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번에 최대한 모은 북미왕국의 서적들을 필사해 여러 선비에게 풀어 선비들이 이 실용적인 학문에도 관심을 두게 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매년 사절단을 보내 최대한 많은 조선의 선비들이 북미왕국의 발전을 직접 목격해 스스로 변하게 만들어야겠지요."

재작년의 기상이변으로 인해 조금은 변해야 한다는 것은 조정 대신들도 공감하고 있었지만 급격한 개혁은 무리였고 그런 만큼 유철의 방법이 최선이었기에 김만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다행히도 매년 사절단을 보내는 문제야 북미왕국에서 허락해주었으니 다행입니다만...유학생을 보내도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불허된 것은 못내 아쉽습니다."

처음 조선의 사절단이 매년 사절단을 보내겠다는 이야기엔 북미왕국이 조금 난색을 보였다.

조선의 사절단이 북미왕국에 매년 사절단을 보내면 북미왕국 역시 매년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야 했으니까.

거기에 조선에 사절단을 보내는데 아무나 보낼 순 없었으니 외무청 고위 관리의 수가 부족한 북미왕국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양국 간의 우호 관계를 위해서는 꾸준히 사절단을 보내 교류해야 한다는 조선 사절단의 이야기에 결국 외무청에서 이를 승낙했다.

이에 고무된 조선 사절단은 북미왕국의 학문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북미왕국에 유학생을 보낼 테니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지 문의했지만, 이 부분에선 단칼에 거절당했고.

물론 유학생들은 권세가의 자식들일 테니 이들을 가르쳐 북미왕국에 우호적으로 만드는 것은 북미왕국 입장에서도 나쁠 것 없었지만 당장 교수가 부족해 가르치는 학생을 엄격하게 선별하는 상황에서 유학생을 받을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더불어 조선인들이 배우길 원하는 학문은 당분간 외국인에겐 가르칠 생각이 없는 학문이었기에.

그리고 유철 역시 김만기처럼 이 부분은 아쉬웠기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쩌겠습니까. 그나마 의원들은 입학할 수 있다고 하니..."

북미왕국에선 조선의 의원 1, 2명 정도는 대학교에서 받아주겠다고 이야기했었기에 이를 유철이 언급하자 김만기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의원들을 보내 배울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만...이들의 의술은 좀 기묘해서...그 두창을 막는 방법이라는 것도 그렇고요."

정성국이 푸른 안개를 통해 보낸 것은 초기 증기기관의 설계도뿐만 아니라 우두 법에 관한 책도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들이 보기에는 항체니 항원이니 하는 단어들은 생소했고 결국은 소의 우두를 이용해 마마를 이겨낸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미신처럼 느껴졌기에 북미왕국의 의술을 신용하긴 어려웠다.

그런 만큼 의원을 북미왕국으로 보내야 하는 건가 싶었고.

그런 김만기의 반응에 유철이 슬쩍 웃으며 그를 달랬다.

"물론 이들의 의술이 우리의 의술과는 많은 면에서 다르긴 하나...배울 것이 없지야 않겠지요."

"흐음..."

* * *

푸른 안개는 새김포의 선착장에 보이는 원상의 배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조선의 배가 보이는군요. 저 배를 타고 돌아간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유철의 대답에 푸른 안개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유철과 김만기를 바라보고 말했다.

"아마 돌아가는 길은 무척 힘들 겁니다. 하와이에 정박한 이후는 조선에 도달할 때까지 배 위에서 생활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워낙 넓은 바다인지라 뱃멀미가 더 심할 수도 있을 테고요."

원상의 배는 범선이었기에 당연히 돌아갈 때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이 항로를 이용하는 천급 함선과 원상의 인급 함선은 속도에서 너무 차이가 나는지라 이곳에 왔을 때처럼 함께 함대를 구성해 이동하는 것도 아니었고.

물론 북미왕국에서 이 항로를 잘 아는 선원 몇을 붙여주었지만 푸른 안개는 걱정이 되어 말하자 초반 뱃멀미로 고생했던 김만기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찌푸렸다.

"윽..."

푸른 안개는 그런 김만기의 행동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북미왕국의 배를 용선해 이를 타고 오시지요. 외무청에서 준비해 두겠습니다."

매년 사절단을 보내기로 했고 실제 배를 타고 이동해보니 배는 크면 클수록 좋다는 것과 범선보단 북미왕국의 기선이 더 낫다는 것을 체감했기에 유철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까?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군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허허허. 신세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푸른 안개가 너털웃음을 짓자 유철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증기기관의 설계도를 넘겨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초기 설계도에 불과한지라 그걸 내어주고 이렇게 감사를 받으면 내가 다 민망합니다. 다만 이 증기기관을 발전시킨 사람들도 조선의 장인들이었으니...조선도 그 설계도를 가지고 증기기관을 독자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런 푸른 안개의 덕담에 유철과 김만기는 어제의 대화가 떠올랐기 때문인지 서로를 바라보고 쓰게 웃었다.

이에 푸른 안개가 어리둥절하자 유철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덕담 감사합니다. 그럼 출항 준비가 끝난 듯하니 이제 가보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조선에 돌아가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배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푸른 안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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