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더위가 한창일 무렵 조용한 곰이 정성국의 집무실로 급히 들어왔다.
"전하. 아이누 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 그래?"
정성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용한 곰이 건네주는 보고서를 바로 확인했다.
그리고 보고서를 확인하며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음...? 아이누 섬이 청나라의 영토였다고?"
정성국은 전생의 사할린이 공식적으로 청나라의 영토가 되는 것은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로 생각하고 있었다.
애당초 청나라는 흑룡강 남쪽의 자신들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만주 지역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가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겪으면서 흑룡강 북쪽까지 관심을 두게 되고 결국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북만주의 경계를 정하다가 사할린 역시 청나라의 영토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거기에 아이누인들 역시 청나라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고.
헌데 청나라는 전부터 아이누 섬을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투로시노의 보고에는 정성국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이 설명했다.
"일단 저들은 아이누 섬을 외만주의 일부로 여기고 있었답니다. 다만 이미 우리 북미왕국이 아이누 섬을 장악한 지 오래여서 결국 청나라의 황제가 거래를 제시했다고 하더군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정성국은 빠르게 보고서를 살펴보다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흠...3년간 총 30만 석을 지원하는 것으로 아이누 섬이 우리 북미왕국의 영토임을 인정하겠다라...다행이긴 한데 조금 의외이긴 하네. 그 콧대 높은 청나라가 거래를 제시할 줄은..."
명나라를 결국 멸망시키고 대륙을 장악한 청나라는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나 현 청나라의 황제는 청나라의 영토를 엄청나게 확장한 그 강희제 아니던가.
그런 강희제가 영토를 거래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에 정성국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조용한 곰이 말했다.
"예상보다 청나라의 사정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거기에 청나라 황제는 투로시노의 말과 서양에 알려진 정보를 통해 우리 북미왕국의 국력을 나름 높게 평가한 모양입니다. 해서 그러한 결정을 내렸을 거라고 투로시노가 짐작하더군요."
그 말에 정성국은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강희제는 청나라의 영토를 확장한 인물이었지만 청나라를 부국으로 만든 현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강희제가 관리를 보낸 적도 없는 머나먼 섬 하나를 지키기 위해 북미왕국과 전쟁을 벌일 이유가 없었다.
물론 청나라의 사정이 안정된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으니 말이다.
"제대로 관리도 하지 않던 머나먼 섬 하나로 우리와 싸우고 싶진 않았다는 뜻이지? 뭐 나쁘지 않네. 괜히 청나라와 분쟁이 일어나는 것보다야 30만 석을 내어주는 것이 낫지."
식량이야 남아도는 상황이었고 아이누 섬의 식량 창고가 텅 빈 상황이라 이주 선단이 유민들을 내려놓고 식량을 가득 실어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1년에 10만 석씩 내어주는 것은 큰 부담이 없었기에 정성국이 이번 협상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조용한 곰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지요. 거기에 교역도 허락했으니 오히려 남는 장사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매년 입항하는 배의 수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어차피 북미왕국의 배는 큰 편이니만큼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이득을 취할 수 있었기에 정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그러면서 보고서를 모두 확인한 정성국은 조용한 곰이 보고서와 함께 건네준 강희제의 친서를 확인했다.
친서의 내용은 보고서에 확인한 내용과 비슷했다.
청나라가 북방에서 아라사와 대치하고 있으니 이를 돕는다면 아이누 섬을 북미왕국에 내어주겠다는 내용이었달까.
다만 강희제는 북미왕국을 자극해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묘하게 청나라를 북미왕국보다 윗줄로 놓고 하대하는 느낌의 글이긴 했기에 역시나 싶으면서도 청나라에 적당히 숙이는 것으로 실질적인 이득을 챙길 수 있다면 기꺼이 받아줄 수 있었기에 정성국은 크게 개의치 않고 친서를 한쪽에 내려놓고 답례품의 목록이 담긴 종이를 확인했다.
"허. 답례품으로 생사를 엄청나게 가지고 왔네?"
아쉽게도 대국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며 가져온 예물보다 많이 돌려주었던 명나라와는 달리 청나라는 북미왕국이 가져간 예물의 가치를 정확히 계산해 그에 해당하는 생사를 내어주었다.
하지만 건해삼과 건전복은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보양식이었기에 청나라에서 무척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그런 건해삼과 건전복을 인급 전선 3척에 해당하는 물량을 예물로 들고 갔으니 당연히 그에 해당하는 생사의 양도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인급 전선 3척에 다 싣기 어려울 정도라 일부는 그냥 금으로 바꾸어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정성국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조용한 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생사를 모두 비단으로 만들어 유럽에 판다면 꽤 짭짤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청나라에서 교역을 허락한 이상 계속해서 생사를 들여와 비단으로 만들어 유럽에 수출하면 막대한 이익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비단을 구하기 위해 먼 아시아로 배를 보내는 것보단 대서양을 건너 우리에게 사들이는 것이 나을 테니까."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만 막대한 무역 흑자를 보는 게 썩 좋지만은 않은데...'
북미왕국이 막대한 무역 흑자를 올린다는 뜻은 다른 나라는 막대한 무역 적자를 본다는 것과 동일했다.
대청무역에서 유럽 각국은 청나라의 여러 물품을 구하려 했지만, 청나라에 팔 것은 마땅치 않았기에 막대한 무역 적자를 보고 있었고.
그러다 이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잉글랜드는 아편을 팔아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 들었고 그 때문에 결국 아편 전쟁이 일어난 것을 기억하는 정성국은 도자기를 팔면서도 최대한 무역 수지를 맞추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비단까지 팔기 시작하면 무역 수지를 어떻게 맞춰야 할지 고민인 정성국이었다.
그러다 정성국은 이 문제는 정평국에게 떠넘기기로 하고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아직 상돈이 녀석이 별다른 보고는 하지 않았으니 일단 생사는 가져오는 데로 창고에 보관해두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전하.“
* * *
누에바 에스파냐의 부왕 안토니오는 본국에서 온 서찰을 확인하다 탄성을 내질렀다.
"허. 본국에서 북미왕국의 기술을 파악한 모양이군."
"예? 뭐라고 하던가요?"
누에바 에스파냐는 그동안 새진도나 새진주를 드나드는 북미왕국의 배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었다.
북미왕국의 배는 바람을 무시하고 움직이는 만큼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러다 북미왕국의 배는 모두 출항 전 석탄을 대량으로 적재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단순히 항해 중 불을 피우기 위한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석탄을 가져간다기엔 너무 많은 양이었고 이것이 북미왕국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한 안토니오 부왕은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렸고 본국에선 학자와 기술자들을 불러 북미왕국의 배는 마법이 아닌 석탄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야기하자 몇몇 기술자들은 증기기관을 언급했다.
석탄을 연료로 사용해 배를 움직일 동력을 얻는다면 그건 증기기관이 유력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에 에스파냐 본국에서는 불러모은 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증기기관을 연구케 하고 이를 안토니오 부왕에게도 알린 것이다.
"아마 북미왕국은 증기기관을 이용해 배를 움직이는 게 아닐까 한다는군."
"증기기관이요?"
보좌관은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안토니오 부왕 역시 증기기관은 이 편지로 알게 된 만큼 편지를 건네주자 보좌관은 편지에 적힌 증기기관의 설명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음...유럽에도 증기기관을 연구하는 기술자들이 있다니 다행이긴 하지만...생각보다 기술의 격차가 심한 모양이군요."
우스터의 후작인 에드워드 서머싯은 1663년 최초의 공업용 증기기관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광산채굴업을 하려고 했지만 그 전에 사망해 실제로 이 증기기관이 사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죽기 전 자신이 발명한 물품들의 모음집을 발간했기에 이 증기기관을 아는 사람이 있었고 이를 토대로 즉각 증기기관을 만들어 보았지만, 이 증기기관으로 전열함에 가까운 거대한 배를 움직인다는 것은 턱도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안토니오 부왕 역시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게 좀 걱정이야. 물론 본국에서는 이들을 지원해주어 증기기관을 발전시켜보겠다고는 했는데...과연 하루아침에 그게 될지 모르겠어. 그렇다고 북미왕국을 통해 증기기관 기술을 얻기는 힘들 테고."
북미왕국이 얼마나 이 증기기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기에 과연 협상을 통해 이 증기기관을 얻을 수 있을지 회의적인 안토니오 부왕이었고 이에 보좌관 역시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직 새진주에서의 활동도 제한이 많은 터라 증기기관의 기술을 확보하기도 어렵고요."
보좌관의 말에 안토니오 부왕은 표정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불법적으로? 큰일 날 소리. 잘못했다간 북미왕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어그러질 거야. 우린 저들의 남하를 막을 병력이 없네. 분명 그 증기기관이라는 기술이 중요해 보이기는 하는데 그것이 누에바 에스파냐 전체와 비견될 것 같지는 않아."
처음에는 멕시코 북쪽에나 텍사스 지역, 플로리다 지역에 배치된 병사가 예상보단 많지 않았기에 혹시 북미왕국의 병력이 생각보다 적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에스파냐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잉글랜드가 떠나고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 계속해서 병사들을 보내자 북미왕국은 병력이 적은 것이 아니라 굳이 병력을 남쪽에 배치하지 않았을 뿐이었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저들은 후장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만큼 증기기관의 기술을 얻기 위해 배를 탈취하거나 기술자를 납치했다 걸리기라도 하면 그 뒷수습이 어렵다는 것은 보좌관도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지요."
"그러니 일단은 지금처럼 북미왕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선으로 그치도록 하고...그보다는 루이 14세가 저지대를 침공했다는군."
안토니오 부왕의 말에 보좌관은 마침내 올 것이 온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허...그렇습니까? 전에 저지대 놈들이 압박한 것이 거슬리긴 한 모양이군요."
"그러게 말이야. 허나 이건 기회가 아닐까 싶은데..."
"예?"
보좌관이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안토니오 부왕을 바라보자 안토니오 부왕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정보를 북미왕국에 넌지시 알려주도록 하게."
그제야 보좌관은 안토니오 부왕의 뜻을 파악하고 탄성을 질렀다.
"아! 북미왕국이 누벨 프랑스를 공격하게 만들 생각이시군요."
"그렇지. 잉글랜드가 북미 대륙을 떠난 이상 북미 대륙에 남아있는 유럽 세력은 프랑스뿐이니...이를 알려주면 북미왕국은 프랑스 세력을 북미 대륙에서 축출하려 들 거야. 어차피 북미 대륙의 누벨 프랑스의 세력은 큰 편도 아니니 북미왕국을 막아내긴 힘들 테고. 그리고 우리는 나중에 둘을 중재해 적당히 이득이나 챙기고 말이지."
안토니오 부왕은 북미왕국의 힘을 이용해 신대륙에서 잉글랜드나 프랑스의 세력을 줄이려고 북미왕국과 비밀 동맹마저 맺었다.
허나 예상과는 달리 잉글랜드는 북미왕국과 싸우기보단 협상을 택했기에 안토니오 부왕은 프랑스 역시 잉글랜드처럼 곧바로 북미왕국과 협상하고 북미 대륙에서 떠날 거라 생각해 안타까워했고.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프랑스는 북미왕국과 협상하지 않고 있었으니 지금이 프랑스를 공격할 적기라는 것을 북미왕국에 알려주어 이득을 챙길 생각이었다.
물론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공격하기 전 에스파냐 본국과 밀약을 맺었다고 알려왔기에 비밀 동맹을 빌미로 참전하긴 힘들 것 같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북미왕국과 프랑스의 협상을 중재해 적당히 이득을 챙길 수 있어 보였기에.
"알겠습니다. 새진도로 바로 연락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 그리고 본국이 프랑스와 밀약을 맺은 상태라 참전하긴 어렵다는 것과 대신 북미왕국에 물자 운송을 도와줄 수 있다고 전하도록 하게."
안토니오 부왕은 당장 북미왕국이 대서양 방면의 배가 적어 물자 운송에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때문에 북미왕국이 프랑스를 공격하는 것을 주저할까 싶어 덧붙이자 보좌관은 슬쩍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부왕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