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투로시노는 북경에서 예부의 관리들과 실무적인 협상을 끝낸 후 강희제가 작성한 친서와 예물에 대한 답례품을 잔뜩 가지고 아이누 섬으로 돌아왔다.
투로시노는 포로나이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정일신이 주로 머무르는 3함대 사령부로 향했고 사령관실에 업무를 보고 있던 정일신에게 강희제와 나눈 내용을 설명했다.
이를 듣던 정일신은 투로시노의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렸다.
"흐음...내륙으로 식량을 수송해야 한다라..."
"그렇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면서 투로시노는 예부의 관리가 넘겨 준 외만주 지도를 꺼내 정일신에게 넘겨주었다.
정일신은 흥미롭다는 듯 이 지도를 살펴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지도에는 흑룡강이 어떤 식으로 뻗어있는지는 대략적으로 나와 있었지만, 강의 수심이 얼마나 깊은지, 폭이 얼마나 넓은지 등은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았기에 이 지도만 보고 무어라 이야기하긴 어려웠다.
거기에 3함대의 관심은 아무래도 남쪽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아이누 섬 최북단의 해협 맞은편에 위치한 흑룡강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고.
"글쎄...일단 흑룡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진입한 적은 없으니까 이 지도만 보고 뭐라고 이야기하긴 어렵지. 헌데 청나라 황제가 우리가 식량을 지원해줘야 청나라에서도 아이누 섬을 북미왕국의 영토로 인정하겠다고 말했다며? 거기에 교역까지 허락하고? 그럼 어떻게든 해 봐야지. 그리고 이 기회에 흑룡강 일대를 확실히 탐사하며 만주의 정보를 확보할 수 있으니 나쁠 것도 없고."
"하하하. 감사합니다."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활짝 웃는 투로시노를 보고 피식 웃은 정일신은 청나라에서 가져온 지도를 살펴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음...일단 흑룡강의 수심과 폭을 정확히 모르니 인급 전선을 보내기는 좀 그렇고...200톤급 수송선에 식량 일부와 병사들을 태워 보내보자고. 그리고 흑룡강을 탐사한 후 식량을 어떻게 보낼지 정하면 될 테고."
어차피 여러 준비도 해야 하는 만큼 내년부터 3년간 식량을 보내기로 청나라에 이야기한 만큼 투로시노는 정일신의 말에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아. 이건 청나라에서 써준 허가서입니다. 청나라군과 조우하더라도 이것을 보여주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투로시노가 품에서 허가서를 꺼내 정일신에게 건네주자 정일신은 허가서를 살펴본 후 별다른 내용은 없었기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알았네. 그보다 이제 왜국으로 가야지?"
"예. 가야죠."
청나라와 성공적으로 접촉한 이상 남은 것은 바로 왜국뿐이었기에 투로시노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함대를 준비할까?"
정일신은 어선으로 위장해 은근슬쩍 홋카이도로 접근해 정보를 얻으려는 왜인들의 집요함에 살짝 짜증이 난 상태였고 이번에 대함대를 이끌고 남하해 그런 왜인들을 기겁하게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씩 웃으며 물었다.
"아니요."
"응?"
왜국은 믿을 만한 족속들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힘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은 투로시노 역시 동의했었는데 이제 와 투로시노가 고개를 흔들자 정일신은 조금 당황했다.
이에 투로시노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덧붙였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남하해 도쿄로 향하고 싶습니다만...저들은 우리 북미왕국을 극히 경계하는 만큼 곧바로 도쿄로 향하면 저들이 오해해 극단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허니 일단은 외무청 관리를 히로사키 번으로 보내 사전에 연락해둘 생각입니다. 아이누 부족 연합이 아닌 북미왕국이 사절단을 보내려 한다고요."
확실히 저들이 집요하게 어선을 보내 3함대의 동태를 파악하려는 것도 그만큼 3함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예전 고작 한 척의 배에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으니.
그런 상황에서 3함대의 대부분이 일제히 남하한다면 당연히 왜인들은 대경실색할 수밖에 없었고 잘못한단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사전에 접촉해 사절단을 보내겠다고 알리는 것이 낫겠다는 투로시노의 의견에도 일리는 있어 정일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저들이 허락하면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가겠다?"
이에 투로시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요."
투로시노의 대답에 정일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자네가 그렇게 판단했다면야...알겠네. 그럼 실제로 연락이 오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일단 난 흑룡강 탐사 문제에 집중하도록 하지.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빠르게 탐사해야 할 테니. 아. 인급 전선을 한 척 내어줄 테니 히로사키 번을 방문할 외무청 관리를 정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 * *
모호크 족 추장은 롱하우스 안에 앉아있는 다른 추장들의 얼굴을 살피며 말문을 열었다.
"요사이 꽤 자주 모이는 것 같군요."
모호크 족 추장의 말에 생각이 많아 보이던 추장들은 실소했고 오논다가 족 추장이 입을 열었다.
"허허. 상황이 상황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보다 다들 표정이 복잡한 것을 보면 북미왕국에서 돌아온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군요."
오논다가 족 추장의 말에 다른 추장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북미왕국을 방문했던 이로쿼이 연맹의 부족원들은 대부분 추장의 자식들이었고 이들은 돌아온 이후 북미왕국을 궁금해하는 추장들에게 북미왕국에 가서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북미왕국은 이로쿼이 연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국가인 만큼 하루라도 빨리 북미왕국에 합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그런 자식들의 반응에 추장들은 자연스럽게 생각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자식들의 설명을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해한 일부만 하더라도 확실히 대단하기는 했고 북미왕국에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굳이 자신이 직접 북미왕국에 갈 필요가 있겠느냐며 툴툴거리던 자식들의 생각이 180도 달라졌으니 말이다.
"내 자식놈은 이로쿼이 연맹의 미래를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북미왕국에 합류해야 한다고 강력주장하던데..."
오네이다 족 추장이 주변 추장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다른 추장들도 공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허. 제 자식만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때 세네카 족 추장이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헌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아서..."
이에 다른 추장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그렇습니다. 철길을 따라 달리는 거대한 쇳덩이를 타고 다닌다니...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처음엔 북미왕국에 갔다가 머리라도 다친 것이 아닌가 걱정했었습니다."
그때 카유가 족 추장이 입을 열었다.
"전 제 아들이 잔뜩 흥분해서 북미왕국에 관한 이야기를 떠드는 것을 보고 왠지 익숙한 느낌에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처음으로 유럽인과 만나 철제 무기와 화약 무기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지요."
이에 다른 추장들은 생각해보니 그렇다는 듯 탄성을 질렀고 오네이다 족 추장이 중얼거렸다.
"아...확실히 그렇군요. 그러면 그만큼 북미왕국의 기술이 발전했다는 뜻이군요."
이에 카유가 족 추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북미왕국에 다녀온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고 조바심에 하루라도 빨리 북미왕국에 합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들 녀석이 그러더군요. 북미왕국에 합류하지 않는다면 이로쿼이 연맹의 미래는 없을 거라고. 우리가 지금처럼 사냥하는 동안 먼저 북미왕국에 합류한 범 알곤킨 족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 아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긴 했지요. 이로쿼이 연맹과 북미왕국의 격차가 너무나 커서 북미왕국에 합류하지 않으면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입니다.“
“예. 제 아들놈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군요. 결국, 주변 원주민 부족은 모두 북미왕국에 합류할 테니 미래에 비버가 사라지더라도 더는 확장하지 못해 언젠간 몰락할 거라고...”
카유가 족 추장의 말에 다들 수긍하자 모호크 족 추장이 나섰다.
"북미왕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일제히 그런 이야기를 할 정도면 북미왕국이 대단하긴 한 모양인데...그렇다고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당장 이로쿼이 연맹의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호크 족 추장의 말에는 다른 추장들도 동의했다.
분명 이로쿼이 연맹의 젊은이들은 북미왕국에 다녀와서 당장 북미왕국에 합류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기에 정말 북미왕국에 합류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식들의 말만 듣고 이로쿼이 연맹을 해체하고 북미왕국에 합류하는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지요. 허면?"
"모든 추장을 소집해 현 상황을 이야기하고 이번엔 추장들 일부를 북미왕국에 보내 저들을 파악한 후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로쿼이 연맹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이로쿼이 연맹에 속한 모든 추장의 의견을 종합해 만장일치로 결정을 내렸기에 추장들이 직접 북미왕국을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모호크 족 추장의 말에 다른 추장들이 동의할 때 오논다가 족 추장이 입을 열었다.
"음...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전에 북미왕국의 사절단이 온 후로 추장들에게 북미왕국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북미왕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추장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설마 그들 위주로 보내자는 겁니까?"
오논다가 족 추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정말 북미왕국이 자식 녀석들의 말처럼 대단하다면 북미왕국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추장들도 자신의 판단을 바꾸지 않겠습니까?"
이로쿼이 연맹은 연맹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만장일치제를 원칙으로 했으나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 많은 추장의 의견이 모두 만장일치를 한다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물론 서로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통해 서로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긴 하지만 계속해서 의견이 엇갈리면 연맹의 특성상 부족 별로 자기 생각에 따라 행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결정은 사실상 이로쿼이 연맹의 해체에 관련된 문제인 만큼 만장일치로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나 싶은 오논다가 족 추장이었다.
그런 만큼 북미왕국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추장들 위주로 보내는 것이 어떻냐는 이야기에 다른 추장들도 차라리 그편이 낫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좋군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거기에 우리 중에서도 일부는 가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네카 족 추장이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럼 제가 가지요. 아들놈이 하도 떠들어대서 솔직히 궁금하긴 했는데."
"어? 그건 저도..."
이에 다른 추장들도 급히 손을 들며 북미왕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은 북미왕국을 다녀온 자식들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은 만큼 북미왕국에 관한 호기심은 더 커진 상태였기에.
추장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모호크 족 추장이 실소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 기회에 다들 북미왕국에 다녀오시지요. 프랑스인들과의 교역 문제도 있으니 제가 남도록 하지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오네이다 족 추장이 반색하자 모호크 족 추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야 나중에 따로 방문하도록 하지요. 그보다 프랑스인들이 노골적으로 우리를 충동질하며 우리가 북미왕국과 전쟁을 벌이기를 바라는 눈친데...슬슬 북미왕국에 이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번에 프랑스인들이 모피와 화약을 거래하는 중에 은근슬쩍 북미왕국이 동부 해안가 지역의 장악에 열을 올리고 있다면서 곧 북미왕국이 동부 해안가를 완전히 장악할 텐데 그러면 모피를 구하기 위해 내륙으로 영역을 확장할 테니 이로쿼이 연맹이 걱정스럽다고 몇 번이고 말했었다.
이미 북미왕국의 외무청 관리와 대화를 나눴던 모호크 족 추장은 내심 실소했지만, 겉으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러냐며 맞장구쳐주었고.
그런 모호크 족 추장의 반응에 프랑스인들은 반색하며 북미왕국이 안정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식의 말을 넌지시 돌려 했기에 몇 번의 거래로 충분히 화약을 비축해둔 만큼 누벨 프랑스와는 슬슬 거래를 끊고 북미왕국에 이를 알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모호크 족 추장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을 자주 들었기에 오네이다 족 추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요. 이번에 북미왕국을 방문해서 프랑스의 일을 알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