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이건 뭐냐?"
정성국은 갑자기 찾아온 이상돈과 강평화가 가져와 정성국의 책상 위에 올려둔 상자를 보고 질문을 던지자 이상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시계입니다."
"시계?"
"왜...예전에 스승님께서 가지고 다닐 만한 조그마한 시계를 만들어보라고 이야기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정성국은 원상 시절 청나라를 방문하는 역관들을 통해 구한 서양의 시계를 당시 원상 소속 장인들에게 건네주며 이를 연구해 더 정확한 시계를 만들어보라고 이야기했었다.
당시에도 정성국의 지시에 따라 기상천외한 각종 물품을 만들던 장인들은 서양의 시계를 분해해 작동 원리를 파악하고 어렵지 않게 복제에 성공한 이후 꾸준히 시계를 연구하며 더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었다.
또한, 정성국이 가끔 조언도 해 주었기에 북미왕국이 들어선 이후에는 기존의 시계에 비해 오차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일 오차가 10초 내외로 줄어들자 정성국은 마을마다 들어선 행정청 건물 옥상에 거대한 시계탑을 세워 북미왕국 백성들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고.
하지만 장인들은 시계의 정확성 만에 집착한 탓에 북미왕국의 시계들은 꽤 큰 편이었다.
그나마 제일 작은 시계라고 해봐야 경도를 계산하기 위해 선박에 탑재되는 두 손으로 들어야 하는 상자 형태의 시계였으니.
이것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정성국은 시계 장인들에게 들고 다닐 수 있는 회중시계를 만들어보라고 이야기했었다.
처음 시계 장인들은 시계의 소형화보다는 오차를 줄여 더욱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유럽의 시계 장인들은 이미 100년도 전에 회중시계를 만들어 유럽의 귀족들도 회중시계를 사용한다는 정성국의 말에는 표정을 싹 바뀌면서 즉각 연구에 돌입했다.
그 후로 별다른 보고가 없었기에 그 일을 잊고 있었던 정성국은 이상돈의 말에 기억을 떠올리며 이상돈이 가져온 상자가 생각보다 작은 편이었기에 나름 기대를 하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정성국의 예상보다도 작은 회중시계가 들어있었다.
이에 정성국은 조심스럽게 회중시계를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회중시계의 덮개는 왕실의 상징인 흰머리수리가 양각되어 있었고 뚜껑을 열자 유리 덮개 안의 문자판 역시 보석을 박아 화려하기 그지없었기에 전생에서 시계에 별반 관심이 없던 정성국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허어...멋진데?"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이상돈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지요? 잘만하면 괜찮은 수출품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정성국은 크기에 비해 조금은 무게감이 있는 회중시계를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특히 청나라에서 잘 팔릴 것 같은데. 이 회중시계의 개발이 조금만 빨랐으면 이 시계도 청나라로 보내는 예물에 포함하는 건데 좀 아쉽긴 하네."
이 시기 대청무역에서 유럽의 거의 유일한 수출품이 바로 시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정성국이 조금은 아쉽다는 투로 중얼거리자 이를 듣고 이상돈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청나라도 그렇고 조선도 그렇고 시계의 수요가 제법 있지요? 전 유럽의 귀족들에게 비싸게 팔아먹을 생각이었는데..."
이상돈의 말에 정성국은 북미왕국 시계 장인들이 만든 회중시계를 바라보았다.
분명 잘 만들었고 정성국이 기억하는 전생의 회중시계와 비슷해 보였지만 유럽은 이미 1500년대부터 회중시계를 만들어 왔기에 과연 북미왕국의 시계가 팔릴까 싶었다.
"저들도 이런 회중시계가 있는데 과연 팔릴까?"
그런 정성국의 의문에 이상돈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물론 저들이 회중시계를 먼저 만들긴 했습니다만 에스파냐를 통해 구했던 유럽의 회중시계는 그렇게 정확한 편은 아니던데요 뭘. 거기에 우리 장인들이 만든 회중시계가 더 작고 가벼운 편이기도 하고요."
"그래?"
이미 이상돈은 에스파냐를 통해 유럽의 회중시계를 입수해 비교까지 한 모양이라 정성국이 정말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되묻자 이상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그렇다고 많이 차이 나지는 않지만요. 그래도 정확도는 확실히 앞서있으니 충분히 팔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해보았다.
이 회중시계는 유럽에 북미왕국의 기술력이 이 정도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었고 유럽의 귀족들은 북미왕국산 물품을 고급품으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유럽에 파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에스파냐에 한 번 팔아봐. 반응이 좋으면 이것처럼 주문 제작 형식으로 왕가나 귀족들의 문장을 새겨서 비싸게 파는 것도 괜찮겠네."
어차피 에스파냐 내에서 북미왕국의 물품들은 최고급품으로 인정받고 있었기에 제대로 고가 정책을 펼쳐보라는 정성국의 의견에 이상돈은 히죽 웃었다.
"어? 그거 좋네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상돈과의 대화를 마친 정성국은 함께 온 강평화가 가져온 상자를 보며 물었다.
"평화야. 네가 가져온 것은 뭐냐?"
정성국의 질문에 강평화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번에 새롭게 개발한 기병용 6연발 단총입니다."
"뭐?!"
정성국은 급히 강평화가 가져온 상자를 열었고 상자 안에 있는 물체들을 보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건 아무리 봐도 리볼버잖아? 맙소사...'
전생의 서부 영화에서 흔히 나왔던 리볼버가 2자루나 떡하니 상자 안에 들어있었기에 정성국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에게 바치는 무기라서 그런지 집무실 한쪽에 잘 장식되어 있는 두 자루의 단총처럼 손잡이 부분은 흑단목과 자개로, 그 외의 부분은 금 입사 기법을 사용한 덕분에 무척이나 화려해 보이는 2자루의 리볼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리볼버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아마 평화나 장인들이 연발 소총을 연구하는 와중에 나온 건가? 확실히 사람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구나. 연속으로 발사하려면 약실을 여러 개 만드는 것이 제일 편하긴 하지.'
그러면서 정성국은 상자 안에 있는 리볼버를 들어 올려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크기는 집무실 한쪽에 장식된 단총과 비슷한 크기였으며 덕분에 꽤 묵직했다.
'이런 무게라면 서부 영화에서 나오는 한 손가락으로 총 돌리기는 못하겠는걸?'
정성국이 그런 쓰잘데없는 생각을 하며 아쉬워하고 있을 때 강평화가 입을 열었다.
"전에 군사청에서 번역한 유럽의 전쟁 기록이 담긴 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좀 흥미로운 기병 전술이 있더라고요."
이에 정성국은 정신을 차리고 강평화의 말을 듣다가 물었다.
"혹시 카라콜 전술을 말하는 거냐?"
카라콜 전술은 16세기에 나타난 기병 전술로 기존의 기병과는 달리 단총으로 무장한 기병이 적에게 접근해 단총을 발사하고 물러나는 전술이었다.
파이크로 무장한 창병의 밀집 방진을 깨려는 시도 중의 하나였고 나름 효과적이기도 했고.
물론 시간이 흐를수록 파이크로 무장한 창병보다는 머스킷으로 무장한 총병이 많아지면서 근거리까지 접근해 단총으로 총병과 교전해봐야 피해가 막심했기에 30년 전쟁 후반에는 카라콜 전술보다는 돌격 전 단총을 사용해 적 대형을 흐트러트린 후 그대로 돌격하는 전술을 구스타프 아돌프가 선보이기도 했고.
정성국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묻자 강평화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역시 아시는군요. 물론 카라콜 전술은 단점도 많습니다만...기병대의 화력이 증가하면 나름 그 단점을 보완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거기에 처음에야 탐사대원들도 말에 익숙하지 못해 마상 전투는 꿈도 못 꾸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그런지 나름 능숙하게 말을 다룬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긴 하지. 그것 때문에 탐사대원들에게 마상 전투를 가르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이야기가 들려오긴 했는데...그래서 이걸 만든 거냐?"
정성국이 말을 가져오기 전까지 이곳엔 말이 없었기에 원주민들은 말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탐사대도 말을 타고 이동해 전투 시엔 하마해서 싸우는 용기병으로 육성한 것이었고.
허나 군사청에서는 최근 탐사대원들이 말에 익숙해졌기에 마상 전투를 가르쳐 제대로 된 기병으로 육성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예. 군사청의 연구원들은 어차피 탐사대가 유럽의 잘 훈련된 대군과 싸울 일은 없어 보이니 마상 전투를 가르쳐 탐사대를 제대로 된 기병으로 육성하겠다는 건데...그런 상황이라면 카라콜 전술도 괜찮아 보였거든요. 물론 기병대의 화력이 증가한다는 가정하에서요. 그리고 기병대의 화력이 증가하려면 결국 연발로 발사되는 단총이 필요했기에 연구와 수많은 개량 끝에 나온 게 바로 이 기병용 6연발 단총입니다."
강평화의 설명에 정성국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고 있는 리볼버를 살펴보다 물었다.
"이거 장전은 어떻게 해?"
"가운데 있는 약실을 옆으로 열고 총알을 장전하면 됩니다."
강평화가 알려준 대로 약실을 열어본 정성국은 내심 만족했다.
'음...다행히 현대식 리볼버와 동일하네. 더 개량할 필요는 없겠는데? 스피드 로더나 문클립을 만들어서 재장전을 더 빠르게 만들면 꽤 쓸만하겠네.'
초창기 리볼버는 이 약실을 장전 구멍까지 회전시켜 한발씩 장전하다가 몸체를 꺾어 약실을 드러나게 만드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내구도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기에 결국 약실을 옆으로 여는 현대의 리볼버가 탄생했고.
헌데 강평화와 장인들은 처음부터 재장전을 신경 썼는지 약실을 옆으로 열 수 있는 형태로 만들었으니 만족스러웠고 덕분에 장전을 돕는 스피드 로더나 문클립만 개발한다면 될 것 같아 슬쩍 운을 띄웠다.
"이거 약실이 이렇게 열리면 일일이 총알을 넣는 것보다 한 번에 총알을 넣을 수 있게 이 약실 형태에 맞춘 보조 도구를 만드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데?"
스피드 로더나 문클립이나 둘 다 한꺼번에 총알을 넣을 수 있게 총알의 형태를 잡아주지만 스피드 로더와는 달리 문클립은 총알과 함께 약실 안에 들어가는 형태였다.
허나 정성국이 보기에 이 리볼버는 그런 공간이 나올 것 같지 않아 고무로 만드는 스피드 로더의 형태에 관해 설명해주자 이를 듣고 강평화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그런 방법도 있었네요! 실전에서 빠른 재장전을 위해 그냥 그 약실 전체를 교체할 생각으로 약실을 옆으로 열리게 만든 건데!"
"아...그랬냐. 근데 약실 여러 개 들고 다니기엔 무게가 좀 나갈 것 같으니..."
단가도 그렇고 무게도 그렇고 이 약실을 추가 보급하는 것보다 정성국이 설명한 장전 보조 도구를 보급하는 게 싸게 먹혀 보였기에 강평화는 곧바로 대답했다.
"예! 바로 만들어보겠습니다."
이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들고 있던 리볼버를 상자 안에 내려놓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이렇게 가져온 것을 보면 제대로 작동하는 모양이지?"
"그야 물론이죠."
"효율은 어때? 구조를 생각해보면 기존의 단총보다 비쌀 텐데.“
"음...그렇긴 하죠. 단총에 비하면 가격은 한 4배 정도 비싸긴 합니다. 하지만 탐사대원들에게 기존의 단총 4자루를 쥐여주는 것보다 이 기병용 6연발 단총 한 자루를 쥐여주는 것이 더 많은 총알을 단숨에 발사할 수 있는 만큼 오히려 효율적이라고 봐야겠지요. 거기에 스승님께서 이야기해주신 장전 보조 도구까지 생각하면 재장전은 훨씬 빠를 테고요."
"그렇단 말이지?"
정성국이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이상돈이 강평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건 기병용이라 단총으로 만든 거 같은데...저 구조로 만든 새로운 소총은 없어?"
이에 강평화는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들어보긴 했는데 단총과 소총의 사용법이 달라서 저 구조로 소총을 만들면 위험하더라."
그 말에 잠시 의아한 표정이던 이상돈은 강평화가 완벽하게 밀폐된 것이 아니라 총알을 발사하면 약실 부근에서 발사 압력이 일부 새어 나온다고 이야기하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소총은 조준하겠다고 얼굴 가까이게 가져다 대고 다른 손을 총열 밑을 잡으니까 다칠 위험이 있다?"
"응."
비슷한 이유로 리볼버 카빈이 결국 대중화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정성국은 속으로 웃으며 이상돈과 강평화를 바라보았다.
"그래. 둘 다 수고했다. 그리고 이 녀석의 양산 문제는 일단 군사청장과 상의한 후에 결정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스승님."
그건 당연했기에 강평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성국은 잠시 리볼버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기병용 6연발 단총은 너무 기니 좀 줄이지 그러냐?"
정성국의 말에 강평화는 별다른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그럼 기병용 단총으로 할까요?"
이에 이상돈이 옆에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야. 회전 약실이니 회전 단총이 더 낫지 않냐? 아니면 6연발 단총이나. 그게 이 총의 정체성을 나타내주잖아."
이상돈의 타박에 강평화는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나쁘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네. 음...그럼 회전 단총으로 하겠습니다."
강평화의 대답에 정성국은 내심 실소했다.
리볼버라는 이름은 회전하다는 영어 단어에서 유래한 만큼 결국 정성국이 아무런 개입을 하지 않았음에도 전생과 비슷한 이름을 같게 되었으니 신기했던 것이다.
그렇게 기병용 6연발 단총의 정식 이름을 정한 정성국은 강평화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리고 조만간 민간에 신식 소총을 풀 생각인데 총도 그렇고 총알도 그렇고 충분히 양산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둬라."
이에 강평화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이미 잉글랜드인들은 머스킷이 있으니...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