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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86화 (286/850)

286화

조선 사절단 일행은 새한성에 도착해 두 부류로 나뉘었다.

대부분의 수행원은 외무청에서 마련해 둔 숙소에 짐을 풀러 이동했고 정사인 유철과 부사인 김만기, 그리고 사절단의 기록을 맡은 서장관인 이정민만 푸른 안개를 따라 궁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북미왕국의 수도인 새한성에 도착했기에 마차의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새한성의 풍경을 바라볼 만도 하건만 마차에 타고 있는 조선 사절단 일행은 곧 북미왕국의 궁에 도착해 국왕을 알현한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해 새한성의 풍경을 감상할 상황이 아니었다.

마차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고 그때 김만기가 푸른 안개를 보고 입을 열었다.

"정말...곧바로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를 알현하는 겁니까?"

이에 푸른 안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배가 새한성에 도착했을 때 이미 궁으로 연락을 보냈으니까요."

대화와 함께 침묵과 긴장감만이 가득했던 마차 안의 분위기가 조금 풀리자 유철이 푸른 안개를 보고 물었다.

"으음...혹시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를 뵙게 되면 지켜야 할 예법이라던가..."

유철이 빠르게 여러 질문을 던질 기색에 푸른 안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저었다.

"허허허. 진정하세요. 북미왕국은 예법에 그렇게 까다롭지 않습니다. 하물며 당신들은 타국의 사절단이니 일반적으로 판단하기에 무례한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될 겁니다."

"으음..."

그 말에도 유철은 조금 복잡한 표정이었기에 푸른 안개가 덧붙였다.

"아. 전하를 알현하게 되면 적당히 머리만 숙여 인사하시면 됩니다. 그것 외에는 뭐..."

이에 마차 안의 조선인들은 고개를 끄덕였을 때 마차가 멈춰섰다.

"아. 도착한 모양이군요. 내리시지요."

마차의 문을 열고 푸른 안개가 마차에서 내리자 조선의 사절단도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주변엔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그 정원 가운데 커다랗고 화려한 북미왕국의 건물이 보여 유철이 입을 열었다.

"이곳이...?"

"그렇습니다. 이 건물이 바로 전하께서 평소 머무시며 업무를 보는 곳입니다. 그럼 가시지요."

조선의 사절단은 푸른 안개를 따라 커다란 건물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 복도에는 호위대원들이 대열을 맞추어 서 있었고 중앙에는 커다란 문이 보였기에 조선의 사절단은 내심 저곳이 대전이라고 생각해 더욱 긴장했다.

사절단의 예상처럼 푸른 안개는 중앙의 커다란 문으로 이동하자 커다란 문이 열렸고 가장 안쪽에 조선 사절단이 보기엔 생소하지만 묘하게 위엄과 격식 있어 보이는 의복을 입고 옥좌에 앉아있는 정성국이 보였다.

그리고 옥좌 옆에는 북미왕국의 청장들이 양복을 입고 1층의 대전으로 들어오는 조선 사절단을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고.

조선 사절단은 푸른 안개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고 곧 옥좌의 앞까지 다가갔다.

"전하. 조선에서 온 사절단이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장인어른."

정성국이 웃으면서 푸른 안개에게 한 말을 듣고 조선 사절단은 기겁했다.

단순한 외무청 관리인 줄만 알았더니 왕의 장인이었다니.

하지만 푸른 안개가 정성국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청장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자 유철은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고 이에 부사인 김만기와 서장관인 이정민 역시 유철을 따라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 후 유철이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께 인사드리옵니다. 사절단의 정사인 유철이라 하옵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북미왕국에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정성국이 빙긋 웃으며 답하자 유철은 내심 기겁하며 황망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찌 존대를...편히 말씀하시옵소서."

유철의 반응에 정성국은 살짝 웃었다.

"하하하. 한 나라를 대표해 이곳에 온 사절단인데 어찌 함부로 말하겠습니까. 그보다 먼 길을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바로 부르게 되어 미안합니다."

"아니옵니다."

"그래. 조선의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면서요?"

이에 유철이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의 도움 덕분에 재작년 갑작스럽게 닥친 흉년을 큰 피해 없이 넘길 수 있었사옵니다. 또한, 작년 초에도 북미왕국에서 다시 식량을 지원해 준 덕분에 식량을 수확하기 전까지 버틸 수 있었사옵니다. 이에 진심으로 감사드리옵니다."

그 말과 함께 조선 사절단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정성국에게 큰절을 올렸고 청장들은 묘한 표정으로 이를 바라보았지만, 정성국은 이를 보고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과한 예를 취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큰절을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유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것은 과례가 아니옵니다. 북미왕국의 도움의 도움으로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으니 조선을 대표한 사절단으로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뿐이옵니다."

유철의 말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에 유철은 안도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국의 국왕 전하께서도 북미왕국의 도움과 북미왕국 국왕 전하께서 사절단을 통해 보내신 예물에 무척이나 고맙다고 이야기하시며 이를 꼭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 말과 함께 푸른 안개를 쳐다보자 푸른 안개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유철에게 전해 받은 친서와 예물의 목록이 담긴 종이를 정성국에게 다가가 건넸다.

"전하. 조선의 사절단이 가져온 친서와 예물이옵니다."

정성국은 먼저 친서를 펼쳐 대충 내용을 살펴보았다.

현종이 쓴 친서에는 재작년과 작년에 걸쳐 조선이 어려울 때 식량을 지원해준 일에 무척 감사하다는 내용과 앞으로도 좋은 이웃으로 잘 지내보자는 내용이 다였기에 정성국은 바로 예물의 목록이 담겨있는 종이를 확인했다.

'오...인삼이 꽤 많은데? 잘됐네. 뭐 이곳에도 삼이 나긴 하지만 역시 인삼은 고려 인삼이 제일이니. 그 외에는...호피를 비롯한 각종 모피와 도자기, 비단 정도인가? 모피와 비단은 바로 서양에 팔아버리면 되니 나쁘지 않네. 그보다 생각보다 수량이 많은데...전에 보낸 예물때문에 좀 무리한 모양이네.'

조선에서는 처음 북미왕국에서 보낸 예물이 있었기에 최대한 많은 모피와 비단, 인삼을 그에 대한 답례품으로 보내왔다.

허나 조선의 사정을 뻔히 아는 정성국으로서는 생각보다 무리한 것으로 보이는 이 물량에 내심 혀를 찼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조선의 국왕 전하께 친서와 예물은 감사히 받았다고 전해주세요. 그보다 조선과는 나름의 인연이 있어 뒤늦게 조선의 사정을 전해 듣고 도운 것인데 그 덕분에 조선의 사정이 나아졌다 하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리고 북미왕국의 영역이 아이누 섬 일대까지 확장되어 북미왕국과 조선은 이웃이나 다름없으니 이 친서에 적혀있는 대로 앞으로도 서로 도와가며 우호적으로 지냈으면 좋겠군요."

이에 유철은 다시 허리까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북미왕국 국왕 전하의 말씀처럼 조선과 북미왕국 간의 우호를 위해 신명을 다하겠사옵니다."

* * *

대전에서의 공식 알현이 끝난 후 조선 사절단은 정성국이 준비해 둔 조선 사절단을 환영하는 만찬에 참석해 저녁 식사를 한 후 마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대기하던 수행원들 역시 북미왕국의 외무청에서 환영 만찬을 열어주어 한창 술을 마시며 흥겹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유철 일행은 바로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유철의 방에 함께 들어온 김만기는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휴. 다행이군요. 북미왕국에서 식량을 지원해 준 것을 빌미로 상국 행세를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이번 일로 북미왕국을 무척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번 일을 구실 삼아 북미왕국이 내심 상국 행세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대신들도 몇 있었다.

투로시노와 직접 대화를 나누었던 정태화나 유철은 그럴 일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땅덩이와 국력이 너무 차이가 나는 만큼 혹시 모른다며 이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아예 없지는 않았었다.

김만기도 북미왕국은 청나라와 비견될 정도의 국가로 보이는 만큼 혹시나 했었지만, 그런 걱정과는 달리 정성국은 시종일관 조선을 대등한 국가로 대우해 주었다.

이에 김만기가 안도하며 중얼거리자 이정민 역시 이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던지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유철이 이를 확인하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괜한 걱정이라고."

이에 멋쩍게 웃은 김만기는 잠시 머릿속에서 정성국을 떠올리다가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께서는...듣던 대로 소탈하신 분 같았습니다. 조정 대신들의 예상과는 좀 다르더군요."

투로시노나 푸른 안개는 공통으로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는 소탈하다면서 알현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다만 조정 대신들은 투로시노가 한 이야기를 통해 정성국을 무척 걸출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정 대신들은 정성국을 꽤 무게감 넘치는 인물이라고 예상했고.

하지만 실제 정성국을 보니 묘하게 위엄있기는 한데 행동은 소탈하고 거기에 북미왕국인들 특유의 단발과 깔끔하게 자른 수염 덕분에 무척 젊어 보였으니 확실히 예상과는 다르긴 했다.

그런 김만기의 말에 이정민이 동의하며 덧붙였다.

"그렇지요.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묘하게 위엄과 기품이 넘치는 것 같았습니다만..."

"오. 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군요."

"대전과 옥좌의 화려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그리고 의복도 묘하게 격식 있고 단정해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은근히 화려한 편이었고요."

이정민의 말에 김만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대전도 그렇고 정성국이 앉았던 옥좌도 무척 화려한 편이었다.

특히 옥좌에 부리가 황금으로 장식된 왕가의 상징이라는 흰머리수리라는 새 조각들은 무척 인상적이기도 했고.

허나 자리를 옮겨 만찬에 참석했을 때의 정성국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정성국의 말투나 행동 자체는 일국의 국왕답지 않게 무척 소탈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묘한 위엄과 기품이 넘쳐 흘렀다.

헌데 이것이 단지 정성국이 입고 있던 의복 때문이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어 고개를 갸웃하자 유철이 입을 열었다.

"뭐 그런 부분도 없지는 않겠습니다만...그보다는 현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께서는 이 북미왕국을 건국한 건국 군주이지 않습니까. 거기에 10년도 되지 않아 서양 국가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거대한 영토를 손에 넣은 정복 군주이기도 하지요. 그 위엄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철의 말에 김만기가 과연 그렇다는 듯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아. 그렇군요.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특히 현 북미왕국의 국왕 전하는 일반적인 건국 군주와는 좀 다른 상황이지 않습니까? 스스로의 힘으로 이곳 원주민을 정복해 나라를 세운 것은 아니니까요."

"그건 그렇지요."

투로시노가 대충 둘러대었던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만기가 말했다.

"해서 어쩌면 실권은 별로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마치 절대 군주처럼 보이더군요."

"확실히..."

이정민이 확실히 그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찬에 참석했던 청장들이 정성국을 대하던 태도는 자신들의 예상과는 확실히 달랐다.

이에 유철이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처음에야 실권이 많지 않았을지라도 이 10년간 이룬 업적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 위엄에 신하들이 숙일 수밖에 없겠지요."

"아. 그건 그렇지요."

그러면서 유철과 김만기, 그리고 이정민은 대화를 나누며 자신들이 파악한 북미왕국의 정보를 교환했고 그 대화가 끝나자 유철이 입을 열었다.

"그보다 푸른 안개가 왕실 인사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외무청 관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단순히 외무청 관리가 아니라 왕의 장인이 직접 조선의 사절단을 맞이하러 나온 모양새였기에 김만기는 놀라기는 했지만, 그만큼 북미왕국에서 조선을 신경쓴다는 뜻도 되었기에 표정이 나쁘지 않았고 이는 이정민 역시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하지만 유철은 살짝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 제 기억이 맞다면 푸른 안개가 처음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곳에 있는 동안 자신이 직접 조선의 사절단을 안내하겠다고?"

그 말에 김만기는 기억을 회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 분명 그랬습니다. 이거 영광이기는 한데...조금 부담스럽군요. 그리고 한층 더 조심해야겠습니다."

"음...그거야 그렇지요. 이곳에선 조선말을 다 알아들은 테니...행동뿐만 아니라 말까지 조심해야 할 겁니다."

유철이 동의하자 기록하는 일 외에도 사절단의 실무를 맡고 있는 이정민은 살짝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허면 수행원들에게도 다시 한번 주의를 환기하겠습니다."

"음...그러는 편이 낫겠지요."

유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만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밤도 깊어졌으니 저도 일어나보겠습니다. 내일부터 북미왕국 곳곳을 돌아다닌다고 했으니 쉬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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