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정성국이 집무실에서 수많은 서류와 씨름 중일 때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노크하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오라버니."
정성국은 자신을 보고 방긋 웃는 전아라를 보고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음? 여긴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그동안 전아라는 정성국의 집무실에는 방문한 적이 드물었기에 정성국이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전아라는 급히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냥 와봤어요."
이에 정성국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아라를 티테이블에 앉히고 말했다.
"커피 마실래? 아니면 차라도?"
"음...커피 주세요."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내려 전아라에게 건넸고 전아라는 정성국이 건네준 커피잔을 두 손으로 잡고 조심스럽게 입가에 가져다 대고 향을 즐기며 홀짝였다.
그리고 정성국이 자신의 커피를 챙겨서 전아라의 맞은 편에 앉자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내려주시는 커피는 참 맛있어요."
정성국은 자신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 전아라를 보고 그녀가 갑자기 왜 집무실을 방문했는지를 눈치채고 슬쩍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전아라는 정성국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내가 걱정돼서 온 거잖아? 백호 어르신과 의제 형이 떠나서 적적해할까 봐. 아니야?"
정성국의 말에 전아라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너무 티 났나요?"
그리고 정성국은 그런 전아라가 귀여워 보였기에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일단 윤휴와 윤의제는 조정 몰래 북미왕국에 온 것인 만큼 이곳에서 조선 사절단과 마주치면 여러모로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조선의 사절단이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떠났고.
다만 윤휴와 윤의제는 정성국의 벗이나 다름없었고 그들이 북미왕국에 온 뒤로는 떠나기 전까지 꽤 자주 궁을 드나들며 여러 대화를 나눴기에 그들이 떠난 후 조금은 쓸쓸하긴 했다.
허나 그것을 딱히 티 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전아라는 용케 이를 눈치채고 정성국을 걱정해 이렇게 찾아온 것이고 말이다.
이에 정성국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백호 어르신과 의제 형이 떠난 것은 좀 아쉽긴 해. 다시 보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딱히 적적하진 않아. 너도, 하얀 들꽃도, 그리고 안문이와 나리와 매일 저녁 함께 보내는 시간이 항상 기다려지는데 적적할 리가 있나."
정성국의 대답에 전아라는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아. 다만 그동안은 간간이 백호 어르신이나 의제 형과 커피를 마셨는데 이제 혼자 마시려니 좀 심심하긴 하네. 그러니까 오늘처럼 가끔은 집무실로 와. 하얀 들꽃과 함께."
전아라는 그런 정성국의 대답에 배시시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문이와 나리도 있으니 함께 오긴 그렇고...가끔씩 교대로 올게요."
전아라도 하얀 들꽃도 안문이와 나리를 무척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긴 했다.
하지만 아직 이 시대는 의술이 발전하지 못한 만큼 이해하고 넘어간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정성국이 커피잔을 들어 그윽한 커피 향을 음미하며 커피를 마실 때 전아라가 슬쩍 입을 열었다.
"헌데 오라버니."
"음?"
"언제까지 아이시로를 저렇게 내버려 둘 생각이세요?"
"풉!"
정성국은 커피를 마시다 커피를 뿜을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 커피를 넘긴 후 말했다.
"갑자기 아이시로 이야기는 왜 나와?"
정성국은 또 자신을 놀리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전아라는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긴요. 이미 아이시로의 이야기는 새한성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리고 언젠가 아이시로를 들일 거라면 최대한 빨리 들이는 게 낫지 않아요?"
전아라의 말에 정성국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시로는 샤쿠샤인의 장녀로 북미왕국에 왔다가 함께 방문했던 샤쿠샤인과 투로시노의 결정에 따라 이곳에 남아 관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던 아이누인들 중의 한 명이었다.
다만 다른 아이누인들은 교육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간 것과는 달리 홀로 이곳에 남아 탁월한 업무 능력을 과시하며 빠르게 진급했고 현재는 행정청장의 보좌관 자리까지 꿰찬 상황이었다.
능력도 좋고 집안도 좋은 편이고 아름다운 만큼 당연히 이런 아이시로와 사귀려는 수많은 관리가 있었지만 아이시로는 칼같이 잘라내면서 자신은 아이누인들의 미래를 위해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답하니 당연히 사람들은 아이시로가 정성국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아이시로는 행정청장의 보좌관으로 행정청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었기에 관리들은 아이시로를 제2의 하얀 들꽃이라고 평하며 아이누인들을 생각해서라도 정성국이 아이시로를 조만간 왕비로 들이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고 이곳이 새한성 내에 알려진 것이다.
당연히 새한성의 주민들이야 왕실이 번창해 나쁠 것은 없다는 반응이었고 이러한 소문이 돌자 전아라나 하얀 들꽃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언제쯤 잔치 국수를 먹을 수 있는 거냐며 가끔 놀려대기도 했었다.
헌데 이번엔 전아라가 진지한 표정이었기에 정성국은 입을 열었다.
"뭔가 전제 조건이 잘못된 것 같은데? 왜 내가 아이시로를 언젠가 들일 거라고 생각해?"
"그게 북미왕국을 위한 행동이니까요."
전아라의 대답에 정성국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음?"
"물론 아이누 섬의 조선 유민들이 아직 아이누인들을 무시한다는 보고는 없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조선 유민들의 세력이 늘어나면 이곳과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전아라의 말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나왔다.
"흐음..."
"그리고 꼭 아이누 섬 인근 지역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이누인들은 우리와 생김새가 조금 다르죠. 지금이야 아이누인들 대부분이 자신의 고향에서 살아가지만, 시간이 흐르고 여러 교육을 받은 아이누 젊은이들은 점차 본토로 올 거라고 생각해요."
이에 정성국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을 수도 있을 거다?"
"예. 솔직히 북미왕국의 통합과 미래를 생각한다면 아이시로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인이나 잉글랜드인과도 혼인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아라의 말에 정성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휴...그건 좀...그리고 아이시로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볼게."
정성국의 대답에 전아라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오라버니. 하지만 오라버니. 저도 하얀 들꽃도 오라버니가 다른 여인을 들이는 것을 절대 반대하지 않아요. 북미왕국을 위해서도 그렇고 왕실이 번창한다고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오라버니와 혼인하면서 충분히 각오한 일이고요. 그러니 저와 하얀 들꽃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정략결혼을 주저하진 마세요."
* * *
조용한 곰의 보고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들이 이제 돌아간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북미왕국을 방문한 이로쿼이 연맹의 부족원들은 새한성을 방문해 꽤 오랜 시간 머물며 외무청의 안내에 따라 북미왕국을 파악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이번에 이들이 돌아간다는 보고에 정성국은 피식 웃으며 조용한 곰을 바라보고 물었다.
"그래. 외무청에서 원하는 것처럼 될 것 같나?"
"물론입니다. 이로쿼이 연맹의 젊은이들은 북미왕국의 국력을 확인하고 내심 충격받은 눈치였습니다. 뭐 이곳에 오기 전에 기차를 탔을 때부터 그런 경향은 있었습니다만...이곳에 와서 외무청의 안내를 받아 여러 시설을 둘러본 이후로는 그런 경향을 숨기지 못하더군요. 허니 이들이 돌아간다면 이로쿼이 연맹은 절대로 북미왕국에 맞서려 들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이들이 훗날 이로쿼이 연맹을 이끌어 가게 된다면 이로쿼이 연맹도 북미왕국에 합류할 거라고 예상합니다."
조용한 곰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정성국은 슬쩍 웃었다.
물론 정성국은 아직까진 내륙으로의 영역 확대는 조금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지만 이로쿼이 연맹이 북미왕국에 합류하게 되면 북미왕국은 오대호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만큼 나쁠 것은 없었으니까.
'남부의 석유와 북부의 철광석은 전생의 미국을 강력한 공업 국가로 만들어 주었으니 오대호 인근으로 진출하는 것도 썩 나쁘진 않아. 뭐 인력이 문제긴 하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정성국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군. 그리고 누벨 프랑스의 동맹 부족들에 대한 것은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고가 올라왔나?"
이에 조용한 곰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매사추세츠 지역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자리한 세 부족을 설득했다는 보고가 이번에 전해졌습니다."
"오! 그래?"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이 기뻐하자 조용한 곰은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메타코멧은 이번에 북미왕국으로 합류한 세 부족의 추장과 함께 다른 부족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도 함께 전해졌고요."
그러면서 조용한 곰이 정성국에게 최근 매사추세츠 지역의 외무청에서 올라온 보고를 정성국에게 이야기하자 정성국은 이를 듣고 중얼거렸다.
"허...메타코멧의 공이 무척 크군."
그런 정성국의 말에 조용한 곰도 동감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해서 이번 일이 다 끝나면 외무청으로 배속해 교육을 받게 하고 교육이 끝나면 바로 고위급 관리로 올릴 생각입니다만..."
조금은 파격적인 인사였기에 정성국의 눈치를 살피는 조용한 곰이었지만 정성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각 청의 인사권이야 청장들에게 맡겼으니 자네의 생각대로 하게. 그리고 메타코멧이 그동안 북미왕국에 합류시킨 부족의 숫자를 생각하면야..."
정성국의 대답에 조용한 곰은 안도하며 웃었다.
"하하하. 그렇지요."
그리고 정성국은 슬슬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는 조선의 사절단을 떠올리고 말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조선에서 사절단이 도착할 텐데...저들을 맞이할 준비는 다 되었나?"
이에 조용한 곰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입니다. 이미 외무청에서 만반의 준비를 끝냈고...이번 이로쿼이 연맹의 부족원들을 안내했던 것처럼 안내할 생각입니다."
조용한 곰의 대답에 정성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로쿼이 연맹의 부족원들은 새김포의 훈련소부터 각종 시설을 두루 견학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과하지 않을까 싶긴 한데...뭐 상관없나? 이 기회에 조선의 선비들에게 세상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제자리에서 안주하다가는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만 깨닫게 해도 조선은 변할 테니...'
"음...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그러도록 하게."
그렇게 대화가 끝나자 조용한 곰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정성국에게 말했다.
"하옵고...전하. 이번에는 1층의 대전에서 조선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것이 어떠십니까?"
조용한 곰이 정성국이 봉인해버리고 그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1층의 대전을 언급하자 정성국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한 곰을 바라보았다.
"...나보고 그 화려한 옥좌에 앉아 조선의 사절단을 맞이하란 소린가?"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물론 전하께서 그런 허례허식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만 조선의 사절단은 한 나라를 대표해 이곳에 방문하는 만큼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추어 저들을 맞이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한 곰의 말은 틀리지 않았기에 정성국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조용한 곰은 한층 더 열을 올려 정성국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외국 사절단의 새한성 방문을 막았습니다만 언제까지 전하를 알현하려는 외국의 사절단을 막을 수야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러니 이 기회에 1층의 대전을 열고 외부 사절을 만나는 알현실로 사용하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동안이야 외국 사절의 새한성 방문을 막긴 했지만, 언제까지 이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에스파냐나 잉글랜드의 외교관들은 이따금 수도를 방문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그렇기에 정성국은 새나주-새진주 철도 공사가 마무리되어 새진주에서 기차를 이용해 바로 새한성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고 프랑스를 북미 대륙에서 몰아내면 그때는 외국 사절단의 새한성 방문을 허락할 생각이었고.
그런 만큼 이 기회에 1층의 대전을 외국 사절 등을 맞이하는 용도로 사용하자는 조용한 곰의 설득에 정성국은 마지못해 수락했다.
"쩝...알겠네."
정성국의 승낙에 조용한 곰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하루빨리 이를 개발청장에게도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개발청장과 개발청 소속 장인들은 대전에 들어서면 옥좌에 앉은 이를 경외할 수밖에 없게끔 설계하고 혼신을 다해 만든 1층의 대전을 정성국이 전혀 이용하지 않아 내심 낙담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조용한 곰은 이 기회에 한 장인이 정성국에게 바쳤지만, 정성국은 딱 한 번만 입고 그 이후로는 절대 입지 않는 옷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외국 사절을 맞이할 때의 복장은..."
이에 정성국은 급히 손을 들어 조용한 곰의 말을 막았다.
1층 알현실까지야 양보한다 쳐도 그 익숙하지도 않은 곤룡포를 입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아. 그건 내가 알아서 준비하지. 최소한 격식은 갖출 수 있는 복장을 하겠네."
이에 조용한 곰은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