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북미왕국의 사절단이 천진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북경의 강희제에게 알려졌다.
강희제는 예부 상서의 보고에 생소하지만 무언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북미왕국이라...아! 재작년 조선에 식량난이 발생했을 때 식량을 구했다는 나라였지?"
"그렇사옵니다. 황제 폐하."
예부 상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자 강희제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들이 사절단을 보내왔다고?"
"그렇사옵니다. 저들 국왕의 친서와 예물을 가져왔다고 하옵니다."
그러면서 예부 상서가 환관에게 가져온 종이를 넘기자 환관은 이를 확인한 후 강희제에게 바쳤다.
강희제는 원본을 한번 훑어보고 바로 번역된 친서를 먼저 살펴보았지만, 딱히 중요한 내용은 없었고 그저 앞으로 잘 지내보자란 내용에 불과해 바로 내려놓고 북미왕국이 가져온 예물을 살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물량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어. 물량을 보니 단순한 조공품이라고 보긴 어렵겠는데...그보다 건전복과 건해삼을 이렇게 많이 가져오다니...북미왕국은 섬나라였나?"
"이것이 저들 사절단이 가져온 지도이옵니다."
예부 상서가 북미왕국이 건네주었던 지도를 꺼내 넘겨주었고 환관을 통해 이를 받은 강희제는 지도를 펼치고 의아한 표정으로 지도의 대략적인 모습을 살펴보다가 시선을 들어 예부 상서를 바라보았다.
"응? 이건 서양인들이 신대륙이라고 부르던 땅 아닌가? 이게 정말 저들의 영토라고?"
"일단 사절단의 주장에 따르면 그렇사옵니다. 해서 선교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보니 북미왕국이라는 나라가 이 신대륙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옵니다. 최근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고 이야기했사옵니다."
예부 상서 역시 강희제와 비슷한 의문을 품은 모양인지 이미 예수회 선교사를 불러 북미왕국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기에 곧바로 대답했고 이 대답에도 강희제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 표정이었다.
"최근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고?"
"실제로 서양 여러 나라가 앞다투어 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지만 그건 동쪽 해안가에 불과하고 내륙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고 하옵니다. 그러다 북미왕국이 서쪽 해안가와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그 존재가 알려졌다고 하옵니다.
그러면서 예부 상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파악한 단편적인 몇 년 전 북미왕국의 정보를 설명했고 이를 유심히 들은 강희제는 들고 있던 지도의 오른편에 크게 그려진 신대륙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흐음...그럼 이들은 이 대륙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표기했지만 실제로 지배하는 땅은 좀 작겠군."
예부 상서도 비슷한 판단을 내린 것인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마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허나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넓긴 넓군..."
북미왕국의 지도는 예수회 선교사 등을 통해 얻게 된 서양의 지도와도 조금 달랐고 이는 북미왕국에서 만든 지도였으니 어느 정도 과장이 들어가 있을 수 있다고 여겼다.
거기에 신대륙의 동쪽 해안가 지역은 서양의 여러 나라가 차지하고 있다고 들었으니 실제 북미왕국의 크기는 이 지도에 나와 있는 것보다는 작을 테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청보다는 확실히 컸기에 강희제가 중얼거리자 예부 상서는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사옵니다. 헌데..."
강희제는 예부 상서의 반응에 고개를 들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
"저...지도의 중앙 부분을 보면 외만주의 고혈도가 저들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사옵니다."
"음?"
예부 상서의 말에 강희제가 다시 지도를 확인했다.
그러자 대청 외만주의 일부이자 자국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고혈도가 마치 북미왕국의 영역이라는 듯 색이 칠해져 있었기에 강희제가 표정을 살짝 굳히고 급히 질문을 던졌다.
"아. 정말이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것이...북미왕국 사절단이 이야기하기로는..."
북미왕국 사절단과 만났던 천진의 예부 관리는 자신이 들었던 것을 그대로 적어 북경으로 보냈고 예부 상서는 이를 확인했기에 조심스럽게 강희제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강희제는 북미왕국이 대청을 침공한 것이 아닌가 싶어 심각한 표정으로 이를 듣다가 사정을 파악하고 혀를 찼다.
"허...이곳 원주민들은 이 땅이 대청의 영토라는 사실도, 자신들이 대청에 소속되었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건가?"
이에 예부 상서는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사옵니다."
강희제는 잠시 북미왕국의 지도를 바라보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으음...원주민들이 왜국에 독립해 북미왕국에 보호를 요청했다고 했지? 그게 최근의 일이라던가?"
"벌써 5년 전의 일이라 하옵니다."
5년 전에 북미왕국이 고혈도를 접수했는데 대청은 지금껏 북미왕국의 존재도, 고혈도가 북미왕국에 넘어간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고혈도는 거리가 워낙 멀었기에 대청에서 직접 관리를 보내 통치하는 지역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고혈도의 주민들이 교역하기 위해 모피를 조공으로 바치고 필요한 물품을 가져가는 조공 무역을 하는 정도였지.
거기에 현 대청의 북방은 대청의 발원지인 만주로 남하하려는 아라사와 대치하느라 저 멀리 있는 척박한 섬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고.
이에 강희제는 북방의 상황을 떠올리고 혀를 찼다.
"쯧...워낙 먼 외지이기도 하고 현 북방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해는 하는데..."
그러면서 강희제는 북미왕국이 보내준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그런 강희제의 반응에 예부 상서와 환관은 숨을 죽이고 대기했다.
잠시 후 강희제는 무언가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 듯 예부 상서에게 명령했다.
"일단 사절단을 북경으로 데려오게. 직접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알겠사옵니다. 황제 폐하."
* * *
북경에서 강희제의 명령이 떨어지자 예부는 빠르게 움직였다.
덕분에 배 위에서 시간을 보내던 투로시노는 급히 통역사와 호위 몇을 대동하고 유철에게 들었던 북경의 자금성으로 이동했다.
삭막하지만 거대한 자금성의 풍경에 나직이 감탄한 투로시노는 강희제를 만나기 전 환관에게 붙잡혀 열심히 예법을 배우는 도중 다른 환관이 나타나 투로시노와 통역을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한 후원에서 강희제가 주변 경치를 살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유철에게 들었던 것과는 달리 조회가 아니라 후원으로 자신을 부른 것에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환관에게 배웠던 대로 적당히 예를 취하자 강희제는 피식 웃으며 북미왕국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에 투로시노는 강희제의 질문에 하나씩 대답해주기 시작했고.
"호오. 흥미롭군. 그래서 북미왕국은 확장을 시작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여 승리해 더는 저들이 북미 대륙을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최근에는 북미 대륙에 이주민을 보내 식민지를 건설하던 잉글랜드와 협상해 저들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투로시노의 대답은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파악한 정보와는 조금 달랐기에 강희제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 서반아와 영길리를 말하는 거군. 그럼 북미왕국은 북미 대륙 동해안까지 영역을 확장한 건가?"
"그렇습니다. 이제 북미 대륙에 남아있는 서양 세력은 프랑스뿐이지만 이도 얼마 가진 못할 것입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가져오는 최신 정보는 거리가 있어 실제로는 몇 년 전의 정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강희제였다.
그렇기에 작년에 영길리가 장악하고 있던 신대륙 동해안 지역까지 북미왕국이 진출했다는 투로시노의 말과 서양 국가 중 가장 강대하다고 알려진 불란서 역시 곧 몰아낼 거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투로시노의 대답에 자신의 예상보다 북미왕국의 국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해서 강희제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흐음...잘 들었네. 흥미로운 이야기였어. 북미왕국에 관한 이야기는 차후에 더 듣도록 하고...그보다 북미왕국에선 우리 대청의 고혈도를 아이누 섬이라 부르며 자신의 영토로 삼았다고?"
강희제의 말에 투로시노는 내심 긴장했지만 크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강희제는 인상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졌다.
"정말 고혈도가 대청의 영역임을 몰랐나?"
이에 투로시노는 곧바로 대답했다.
"예부의 관리가 아이누 섬을 청나라 영토라고 말한 이후 아이누인 선원들에게도 물어보았지만, 그들도 금시초문이라더군요. 애당초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신들끼리 살아왔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요. 그렇기에 왜국이 아이누 섬을 에조 지역이라 부르며 아이누 섬까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는 홋카이도 아이누인들의 말에 분개해 함께 나선 것이라고 하더군요."
"으음..."
강희제는 투로시노와 그의 말을 열심히 통역해주는 통역의 안색을 살폈지만, 딱히 거짓말을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 혹시 아라사라는 나라를 아는가?"
"아라사요?"
투로시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강희제가 말했다.
"모르나? 저 서양의 국가 중 하나로 최근 외만주 인근까지 영역을 확장 중인 자들인데?"
"아. 러시아 차르국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존재는 알고 있습니다만 갑자기 러시아 차르국은 왜...어? 설마?"
투로시노가 대답하다 무척 놀란 반응을 보이자 강희제는 생각외로 북미왕국이 대청의 사정에 밝다는 것에 감탄했다.
"호오. 우리 대청이 꽤 오랫동안 우리의 북방을 탐내며 남하하는 아라사와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이누 섬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와중에 러시아 차르국을 거론하는 것은 아이누 섬이 북미왕국의 영토임을 인정하는 대신 청나라를 도우라는 뜻이 맞습니까?"
투로시노가 정확한 강희제의 의중을 파악하자 강희제는 씩 웃으며 답했다.
"그렇네. 어떤가?"
북미왕국이 고혈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는 것을 알게 된 강희제는 한참을 생각해보았다.
아직 대청 내부는 안정된 상황이 아니었다.
일단 오배에 붙은 자들의 숙청은 끝났지만, 독자적인 정치 세력인 삼번은 강희제로서도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강희제는 삼번을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도 부담스러운데 저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간 나중에 그 후환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 뻔해 보였던 탓이다.
당장 저들에게 군비 지원금으로 내어주는 자금만 하더라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거기에 약 20년 전 뜬금없이 등장해 남하한 아라사를 조선의 도움까지 받아가며 북쪽으로 몰아내긴 했지만 아라사는 남하할 뜻을 버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북방에서 대치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고혈도 때문에 생각보다 강성해 보이는 북미왕국과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물론 이들이 고혈도 뿐만 아니라 외만주로 세력을 넓힐 뜻을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강희제도 생각을 달리했겠지만, 투로시노는 강희제의 질문에 대답하는 내내 한결같이 원주민들의 요청 때문에 아이누 섬을 북미왕국의 영토로 삼았을 뿐 본국의 영토도 넓은데 굳이 이 멀리 떨어진 아시아 지역에서 이 이상 영토를 확장할 생각은 없다고 몇 번이고 대답한 만큼 일단은 이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다만 어찌 되었든 간에 고혈도는 대청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던 만큼 그냥 내어줄 수는 없었기에 이들을 이용해 아라사를 압박하거나 혹은 군사를 지원받는 것도 나쁠 것은 없다고 여긴 강희제였고 말이다.
그런 강희제의 대답에 투로시노는 잠시 고민했다.
강희제의 제안은 북미왕국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청나라와는 달리 러시아와는 카무이 반도로 인해 육지로 연결된 상황이었으니 언젠가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만큼 이 기회에 청나라와 연합해 러시아를 공격해 제대로 국경을 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었다.
정성국 역시 러시아를 꽤 경계하며 투로시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니까.
다만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북방에 배치된 청나라 군대는 정병이 아니라는 점이다.
청나라가 실상은 모피 탐험대에 불과한 원정대를 이기지 못해 조선에 도움까지 요청한 것은 청나라의 정예병은 죄다 남방에 투입하고 북방으론 냉병기로 무장한 이 선급 병사들을 북방으로 올려보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제대로 러시아인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대치만 하는 형국이었고.
이에 대한 사정을 정성국에게 들었기에 투로시노는 북방에 배치된 청나라의 군대와 연합해 러시아인들과 싸운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불어, 병사를 파견해 함께 싸우다 보면 자연스럽게 북미왕국의 무기 체계가 알려질 것이 우려스럽기도 했고.
해서 투로시노는 생각을 마치고 대답했다.
"...듣기로 청나라가 러시아 차르국과 북방에서 대치하고 있지만, 활발히 전투를 벌이는 상황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허니 10만 석의 군량미를 현지에 직접 지원하겠습니다."
이에 강희제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나쁘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현지로 직접? 아. 강을 이용해서 내륙으로 식량을 운송하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아니면 이곳으로 식량을 가져올 수도 있고요."
투로시노의 말에 강희제는 고개를 저었다.
북경으로 가져와 봐야 북경에서 다시 북방으로 식량을 운송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해보면 저들이 직접 현지로 운반해준다는 10만 석의 가치는 꽤 큰 편이었다.
"아니. 그럼 현지로 보내게. 그리고 1년에 10만 석씩 3년간 30만 석을 지원하는 것으로 하지. 대신 민간 무역을 어느 정도 허용해주겠네."
이미 북미왕국이 자신들과 무역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희제가 덧붙이자 처음 너무 과도한 요구라고 생각하며 어찌 설득해야 하나 걱정하던 투로시노는 급히 화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 폐하."
강희제는 그런 투로시노의 반응에 이들도 서양의 여러 나라와 별반 다른 바 없다는 생각에 실소하며 말했다.
"그럼 실무 관리들을 보낼 테니 자세한 사항은 그들과 논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