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개항장은 조선에서 파견한 관리와 조선 유민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는 출입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조선 사절단은 이 기회에 조선 내에 소문이 파다한 개항장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러다 개항장에서 유민들을 가득 태운 이주 선단이 출발할 준비가 끝나자 급히 원상의 배로 돌아왔고 이주 선단과 함께 망망대해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항해한 끝에 첫 번째 기항지이자 북미왕국의 영토인 포로나이에 도착했다고 선원이 전해주자 유철은 갑판 위로 나와 점차 가까워지는 항구를 바라보다가 파리한 안색으로 갑판 위로 나오는 김만기를 발견하고 급히 다가가 말을 건넸다.
"음? 어찌 나오셨습니까.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날씨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연안과는 달리 흔들림은 심한 편이라 제물포에서 개항장으로 이동할 때는 괜찮던 사람들도 개항장을 떠나자 뱃멀미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번 사절단의 부사를 맡은 김만기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해서 지금껏 개인실에서 골골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진 섬이라고는 하나 북미왕국의 영역에 들어섰는데 어찌 선실에 누워있겠습니까."
"그래도..."
김만기의 대답에도 유철이 걱정을 감추지 못하자 김만기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슬쩍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도저히 적응될 것 같지 않았는데...어떻게 또 적응은 되는군요. 처음 개항장을 떠날 때처럼 뱃멀미가 심했다면 지금 나오진 않았을 겁니다. 정박한 후에 배에서 도망치기 위해 나왔겠지요. 하하하."
안색은 파리했지만 웃는 모습을 보니 그의 말처럼 그나마 괜찮아진 것으로 생각한 유철이 조금은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선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예 적응 못 하고 계속 뱃멀미를 하는 일도 있다 하여 걱정했는데..."
"어이쿠. 그렇습니까? 그럼 정말 다행이군요."
김만기는 유철의 말에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진저리치다가 시선을 돌려 점차 가까워지는 항구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저곳이 바로 아이누 섬입니까?"
이에 유철 역시 시선을 돌려 항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렇답니다. 저곳이 바로 아이누 섬의 포로나이라더군요."
김만기는 잠시 항구를 관찰하다가 중얼거렸다.
"으음...전체적인 풍경은 개항장이 떠오르는군요."
"그렇지요? 항구의 풍경은 확실히 비슷하지요. 다만 개항장보단 규모가 조금 더 큰 느낌입니다."
유철의 말에 김만기는 잠시 개항장의 풍경을 회상하며 눈앞의 포로나이와 비교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요. 선착장도 더 크고. 헌데 의외로 배는 많지 않군요?"
포로나이의 선착장은 개항장보다 큰데 개항장과 비교하면 텅 비어 있었기에 의아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김만기를 보고 유철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날이 풀렸으니 배들이 어디 항구에 있겠습니까?"
생각해보니 유철의 말이 맞았기에 김만기는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그건 그렇군요."
"이곳이 북쪽이라 겨울에는 무척 추운 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변 바다도 언다고 하더군요. 해서 겨울엔 이 선착장이 배로 가득 찬다고 들었습니다."
"허어..."
그렇게 유철이 김만기와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에 원상의 배는 이주 선단을 따라 선착장 가까이에 다가갔고 유철은 선착장에 나와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음? 허. 선착장에 나와 있을 줄은..."
김만기는 그런 유철의 반응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누굽니까?"
"저 사람이 바로 투로시노입니다."
"아! 북미왕국 사절단의 정사였다는 바로 그?"
투로시노는 두 번이나 북미왕국을 대표해 조선을 방문했었기에 이름은 익히 들었던 김만기가 탄성을 지르자 유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듣기로 북미왕국은 넓은 편이라 곳곳에 외무청 관리들이 상주하는데 투로시노는 저 아이누 섬에서 머물며 이 지역 외무에 관련된 모든 업무를 총괄한다고 들었습니다. 해서 이곳에 오면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이거 바로 내려야겠군요."
"그러시지요."
원상의 배가 선착장에 정박하자 유철은 제일 먼저 배에서 내려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투로시노에게 다가갔고 투로시노는 그런 유철을 보고 활짝 웃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북미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하하. 오랜만입니다. 투로시노 공."
"예. 오랜만입니다. 작년에 개항장에서 본 뒤로는 처음이군요."
"그렇지요. 어째 매년 뵙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헌데 이곳까지 나와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유철의 말에 투로시노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이곳 외무청 관리 중 직급이 가장 높은 만큼 당연히 나와야지요. 그리고 이곳을 제외하면 본토에 도착할 때까진 조그마한 보급항 뿐이라 사절단에게 제대로 대접할 수도 없는 만큼 이렇게 일정을 미루면서까지 조선 사절단을 기다린 겁니다. 그리고 유 공께 몇 가지 질문도 있고요."
"아...전에도 외무청 관리가 많지 않아 바쁘다고 하셨었지요. 헌데 질문이라면?"
유철이 의아한 기색을 보이자 투로시노는 점차 북적이는 선착장을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나눌 대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절단의 일원들도 배에서 내리고 싶어하는 눈치이니 일단 이동하시지요."
그 말에 유철이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이주 선단에 탔던 조선 유민들은 배에서 내리고 있는데 조선 사절단은 자신과 투로시노가 대화를 하는 터라 아직 선착장에 내리지 못하고 갑판 위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아차 했다.
"아. 그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유철이 김만기에게 손짓하자 김만기도 눈치를 챈 모양인지 다녀오라는 듯 손을 내저었고 유철은 바로 투로시노를 따라 북적거리는 포로나이의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유철은 투로시노의 말처럼 거리에서 들려오는 조선말에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허허. 거리의 풍경도 그렇고 조선말이 들려오니 마치 개항장 같은 느낌이군요."
이에 유철은 이해한다는 듯 표정으로 웃었다.
"하하하. 조금 그렇지요? 그나마 본토는 자연환경이 이곳과는 매우 다른지라 조선말이 들려온다 해도 느낌은 많이 다를 겁니다."
"오...그렇습니까?"
유철이 호기심을 보이자 투로시노는 예전 북미왕국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조선도 이 아이누 섬의 자연 풍경도 좋습니다만 북미대륙의 자연 풍경은 압도적인 부분이 있어요. 아마 새남포에 들르면 제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투로시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벽돌로 튼튼하게 지어진 2층 건물이었다.
그리고 유철은 투로시노와 함께 2층에 있는 그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이 누추한 곳이 제 집무실입니다."
개항장에도 비슷한 형식의 집무실이 있었기에 유철은 익숙하게 창가 근처의 티테이블로 이동하며 말했다.
"누추하긴요. 아늑해 보입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일단 앉으시죠."
투로시노는 직접 커피를 내려 유철에게 커피잔을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 본국에서 청나라와 접촉해보라는 명령이 내려와서 말입니다."
"아..."
"우리도 청나라의 사정을 나름대로 파악하고는 있습니다. 헌데 조선은 매년 사절단을 보내는 만큼 우리보다 청나라의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아 괜찮다면 조언을 좀 듣고 싶어서 말입니다."
물론 북미왕국도 청나라의 사정을 파악하고는 있었지만, 이는 현재 밀무역을 전담하고 있는 국영 상단을 통해 얻는 정보이기에 매년 사절단을 직접 북경으로 보내 북경에 체류하며 정보를 수집하는 조선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본국에서 명령이 내려온 후 바로 청나라로 떠나려다 잠시 조선에서 오는 사절단을 기다린 것이고 말이다.
그런 투로시노의 말에 유철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정도야 어려울 것 없지요."
그러면서 유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청나라와 북경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음...그렇군요. 조언 감사합니다."
유철의 설명이 끝나자 투로시노가 감사의 뜻을 표하자 유철은 이렇게나마 북미왕국을 도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별 것 아닌데요. 다만 해로를 통해 이동한다니 조금 걱정스럽군요."
유철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투로시노는 청나라의 사정을 떠올리고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아...청나라 수군 때문에 말입니까?"
청나라는 아직 정성공이 세운 동녕국을 제압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해금령을 선포한 상태였다.
더불어 해안가의 주민들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켜 해안가를 대부분 비워버리기도 했고.
그럴 정도로 동녕국의 수군을 골치 아파하는 청나라인 만큼 북미왕국의 배가 청나라의 해안가로 접근한다면 당연히 청나라의 수군이 곧바로 움직일 터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북미왕국의 배는 확연히 다른 모습인 만큼 섣부르게 공격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북미왕국의 배는 기존의 당선과는 모양이 전혀 달랐고 돛도 없는 만큼 청나라에서 북미왕국의 배를 정씨 왕국의 배로 오인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이에 투로시노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저 역시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배의 모습도 다르고 백기를 들고 가만히 있는데 공격하기야 하겠습니까?"
하지만 유철은 내심 투로시노가 걱정되어 제안했다.
"차라리 우리 조선의 사절단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배로 의주까지 이동해 조선의 사절단과 함께 육로로 이동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유철의 말에 투로시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 방문이 실패한다면 그것도 고려해보겠습니다."
유철은 투로시노의 대답에 더는 권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헌데 혹시 조선에서 청나라에 아국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까?"
투로시노의 질문에 유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작년의 기근으로 식량이 한창 부족할 때 북미왕국에서 식량을 조금 구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압니다."
원래 조선은 북미왕국이 직접 청나라와 외교 관계를 수립할 때까지는 조용히 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청나라에서도 경술년에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만주로 향한 조선 유민들을 통해 조선의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강희제는 북경을 찾아온 사절단에게 조선의 식량 사정을 캐물었고 이 때문에 북미왕국과 교역을 허락하는 대신 식량을 조금 지원받았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이에 강희제는 조선에서 능력껏 식량을 구했으니 되었다고 말했었고.
이를 유철이 이야기해주자 투로시노는 나쁘지 않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요? 그럼 청나라에서 아국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모르지는 않겠군요."
물론 북경에는 서양의 선교사들이 존재했고 이미 유럽에는 북미왕국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만큼 청나라에서도 이들을 통해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 수는 있었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북미왕국 국영 상단을 통해 알게 된 연줄을 이용해 북경에 북미왕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영 꺼림칙했고.
그 때문에 일단은 천진으로 이동하다 만나게 되는 청나라 수군에게 사정을 설명할 생각이었지만 과연 청나라 수군이 북미왕국의 존재를 알까 싶었는데 유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미왕국의 존재를 아예 모르지는 않는 것 같아 투로시노가 중얼거리자 유철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그럴 겁니다만...과연 청나라 수군들까지 북미왕국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이에 투로시노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저들이 북미왕국의 존재를 모른다면 청나라 수군을 통해 친서와 예물만 전달하고 돌아올 생각이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아. 그렇습니까."
유철은 투로시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잔을 들다가 문득 예물이라는 말에 생각나는 것이 있어 표정을 굳히며 투로시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이건 조금 조심스러운 질문입니다만...혹시 청나라에 보내는 예물 중에 그 단총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투로시노는 유철의 질문에 담긴 속뜻을 파악하고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조선이야 아국과 특별한 관계인 만큼 단총을 예물로 보낸 것이지요."
유철은 투로시노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다행이군요.”
투로시노는 그런 유철의 반응에 빙긋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했다.
'청나라가 강성해져 봐야 좋을 것은 없지. 특히 본토야 멀리 떨어져 있으니 상관없어도 이 아이누 섬은 겨울엔 육지와 연결되는 만큼...'
물론 청나라 역시 화약 무기의 위력을 모르지 않았지만, 아직 이들의 기본 무장은 전통적인 창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화약 무기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정성국도 청나라에 예물을 보낼 때 단총만은 보내지 말라고 직접 언급했기에 투로시노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커피잔에 든 커피를 마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런 이야기는 이쯤 하고 제가 이곳을 안내할 테니 일어나시지요.”
"하하하. 그거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