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퀘벡의 총독부 집무실에서 누벨 프랑스의 총독이 최근 본국에서 도착한 배로 전해진 여러 편지 가운데 하나의 겉봉을 뜯어 그 내용을 살피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신음을 들이켰다.
"으음..."
이를 지켜보고 있던 행정관 장은 총독의 반응에 설마 하는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설마 본국에서 지원이 온답니까?"
장의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편지를 계속 읽던 총독은 마침내 편지를 다 읽었는지 들고 있던 편지를 내려놓으며 장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본국에서 최근 네덜란드와 전쟁을 시작했다고 하네."
루이 14세는 1667년 프랑스의 유럽 내 영향력 확대를 위해 당시 에스파냐가 소유하고 있던 남네덜란드를 점령하려 들었지만 이에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가 당시 전쟁 중이던 잉글랜드와 급히 종전 협상을 맺고 잉글랜드와 스웨덴을 설득해 삼국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압박해 결국 프랑스의 확장을 가로막았다.
그 일로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확장을 막았던 네덜란드를 눈엣가시로 여겨 네덜란드를 침공할 마음을 품었고 이에 프랑스의 외교관들은 이 삼국 동맹을 와해시키기 위해 애쓴다는 것은 프랑스의 관리라면 모르지는 않았기에 총독의 말에 장은 대충 사정을 파악하고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끙...하필 이런 시기에..."
물론 루이 14세가 유럽 내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당장 북미왕국이 북아메리카에서 영역을 확장하는 시기에 네덜란드와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조금은 못마땅한 장이었다.
특히 재작년 말 잉글랜드가 북아메리카의 모든 권리를 북미왕국에 팔아넘길 거라는 말이 돌고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바로 본국에 알렸기에 본국도 이미 북아메리카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미 전쟁은 벌어졌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총독 앞에서 루이 14세의 결정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수는 없었던 장은 체념하고 중얼거렸다.
"그럼 본국에서의 지원은 당장은 불가능하겠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총독의 대답에 장은 무척 아쉽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지금이 무척이나 중요한 시기인데...이로쿼이 연맹과 정식으로 종전 협상을 한 후 이로쿼이 연맹이 대량으로 화약을 사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저들도 북미왕국과의 전쟁을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럴 때 본국에서 지원만 해준다면 북미왕국의 확장을 확실히 막을 수 있을 텐데 정말 아쉽네요."
최근 이로쿼이 연맹은 프랑스와 정식으로 종전 협상을 맺었고 프랑스를 통해 화약과 각종 무기를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었다.
이런 이로쿼이 연맹의 행동에 누벨 프랑스는 이로쿼이 연맹이 북미왕국에 맞설 준비를 한다고 여기고 내심 쾌재를 부르며 저들에게 화약을 팔고 있었고.
그런 만큼 이번에 본국에서 어느 정도 지원을 해 주었다면 이로쿼이 연맹이 움직일 때 함께 움직여 북미왕국의 확장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불가능해졌기에 장은 무척 아쉬워했고 총독 역시 그런 장의 생각에 공감했다.
"그렇지. 나도 그게 무척이나 아쉽네. 하지만 어쩌겠나. 국왕 폐하께서는 이곳보단 이전에 국왕 폐하를 방해한 네덜란드에 복수할 생각이 더 큰 모양이니...그나마 다행이라면 콜베르 님께서 꽤 긍정적인 답을 주셨다는 것일세."
총독이 재무부의 총감이자 루이 14세가 신임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장바스티스 콜베르를 언급하자 장이 그게 정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재무부의 콜베르 님께 서요? 아. 생각해보니 그분은 무역 때문에라도 이곳 북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서인도 제도나 아시아에도 식민지를 건설하고 확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곤 하셨지요."
장이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총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해서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북아메리카 식민지인 누벨 프랑스를 절대로 포기해선 안 된다는 내 의견에 공감해주셨네."
"휴우. 그나마 다행이군요. 전 오히려 재무부에서 돈이 안 된다면서 잉글랜드처럼 북미왕국에 식민지를 팔아버리자고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말입니다. 콜베르 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괜찮겠군요."
콜베르는 재무부를 총괄하는 인물이었기에 콜베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본국에서 잉글랜드처럼 식민지를 북미왕국에 파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장이 안도하자 총독이 덧붙였다.
"그리고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잘 풀린다면 기회를 봐서 국왕 폐하를 설득해 지원해줄 테니 최대한 버텨보라고 하셨네."
"으음...버틴다라..."
당장은 루이 14세를 방해한 네덜란드의 정벌이 우선이었지만 네덜란드를 정벌한다면 곧바로 루이 14세를 설득해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인 누벨 프랑스를 위해 지원할 테니 그때까지만 알아서 버텨보라는 콜베르의 말을 총독이 전하자 이를 듣고 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장의 표정에 총독이 바로 입을 열었다.
"다행이라면 북미왕국이 뉴펀들랜드 섬 인근과 세인트로렌스 만을 헤집고 다니기는 하지만 아직은 우리와 접촉하려 들거나 적대할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이니 선원들과 뉴펀들랜드 섬에 사는 어부들에게만 주의하라고 한다면 어려울 것 같지는 않네."
곰곰이 생각해보니 총독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들도 당장은 북아메리카 동해안 지역의 장악에 더 관심을 둘 테니까요. 결국, 저들이 북아메리카 동해안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외부로 시선을 돌리기 전에 본국이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곳으로 지원군을 보내주길 바라야 하는군요."
"그럴 것 같네. 다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 전쟁이 그리 길어질 것 같지는 않아."
"예?"
그게 무슨 뜻이냐는 표정의 장을 보고 총독이 편지에 적힌 유럽의 정세를 장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이미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시작했고 스웨덴과도 동맹을 맺은 터라 예전의 삼국 동맹은 완전히 와해된 셈일세. 아니. 오히려 포위당한 셈이나 마찬가지지. 신성로마제국의 몇몇 제후들과도 동맹이나 중립 관계를 맺었다고 하니까."
그런 총독의 설명에 장은 희망이 보인다는 생각에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혹시 모르니 선원들과 어부들에게는 북미왕국의 배 근처에 가지 말라고 다시 이야기해 두지요. 그리고 시간을 끌어야 하니 이로쿼이 연맹이 북미왕국과 오래 싸울 수 있도록 화약을 최대한 넘겨주고요."
이에 총독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맞겠지. 그리고 아직 북미왕국의 영역으로 잠입한 병사들에겐 별다른 소식이 없나?"
북미왕국이 장악한 지역의 잉글랜드인을 선동하기 위해 이미 아카디아의 병사 중 일부가 사냥꾼으로 위장해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잠입했기에 이를 묻자 장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잠입해 조심스럽게 정보를 수집한 후 움직인다 했으니 곧바로 연락이 오지는 않을 겁니다."
"으음...알겠네."
* * *
매사추세츠 외곽 지역에 있는 선술집에서 두 남성이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맥주를 홀짝거리면서도 은근슬쩍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거 어째 어렵겠는데...?"
산적 수염의 사내의 말에 염소 수염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처음에만 하더라도 잉글랜드인들은 내심 북미왕국에 불만이 많으리라고 생각했는데...북미왕국의 정책이 너무 파격적이라..."
이들은 아카디아에 주둔한 병사들로 총독의 명령에 따라 사냥꾼으로 위장해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잠입해 그간 이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위기를 파악했다.
헌데 처음 이곳으로 잠입하기 전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기에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원하면 25에이커씩 땅을 나눠주며 세금도 걷지 않는다니...거기에 생필품의 가격도 싼 편이라 그 정도면 먹고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고."
산적 수염의 사내가 기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염소 수염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목소리를 무척이나 낮춰 이야기했다.
"그래서인지 잉글랜드인들의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아. 북미왕국을 우호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북미왕국의 불만을 이야기해봐야 잉글랜드인은 공감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우리를 수상하게 생각하겠지."
이에 산적 수염의 사내는 맥주를 들이켜는 척하며 주변을 다시 한번 살피고는 마찬가지로 간신히 옆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마 북미왕국에 불만을 품을 자들이라면 예전에 대지주였던 자들 정도일까?"
"확실히 그들이라면 불만을 품을 만도 해. 하지만 대지주와 접촉하는 것은 좀 위험할 것 같은데..."
염소 수염의 사내가 꺼림칙하다는 표정을 짓자 산적 수염의 사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렇잖아. 이렇게 술집에서 적당히 취해 불만을 토해내는 자들을 은근슬쩍 선동하는 것도 아니고 대지주를 설득하려면 직접 만나야 하잖아? 저들이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서 신고할지도 모르지."
그제야 자신의 동료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파악한 산적 수염의 사내는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대지주를 설득하려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의 소속을 밝힐 수밖에 없는데 당연히 무척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지주를 전적으로 믿을 수도 없었고 말이다.
오히려 대지주들이 자신들을 북미왕국에 신고해 이득을 취할 수도 있는 만큼.
산적 수염의 사내가 수긍하자 염소 수염의 사내는 바로 덧붙였다.
"그리고 대지주를 설득해도 문제야. 그 수가 얼마나 되겠어? 그들이 움직일 수 있던 노예들은 이미 해방되었고 그들이 고용하던 계약 노동자들 역시 북미왕국에 땅을 받아 독립했는데?"
"끙...그렇긴 하네. 뭐 영향력이야 어느 정도 남아있겠지만...코 앞에 대규모의 북미왕국 병력이 주둔해 있으니...“
예전의 대지주는 돈과 함께 동원할 수 있는 인력이 많은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돈 많은 한 명의 노인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대지주를 설득한다 쳐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뻔히 매사추세츠에 대규모의 병사들이 주둔한 상황에서 대지주가 돈을 푼다 해도 북미왕국에 맞서려 들지는 않을 것이 확실했기에.
이에 산적 수염의 사내는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다가 결정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이건 답이 없어. 괜히 분란을 일으키려다 우리가 잡혀서 북미왕국에 정체가 알려지는 것보다야 그냥 돌아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일단 북미왕국은 당장 우리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이니까 말이야."
이들은 처음 매사추세츠 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이 주둔하자 북미왕국이 이 병력을 이용해 아카디아 방면으로 확장하지는 않을까 우려했지만, 북미왕국은 일단 매사추세츠 지역의 안정에만 주력하는 모양새였다.
그렇기에 괜히 일을 벌였다가 북미왕국이 자신들이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눈치챈다면 오히려 곤란하리라 판단했다.
자신들이 이곳에 와 잉글랜드인을 선동하려는 이유는 잉글랜드인을 이용해 매사추세츠 지역의 장악을 어렵게 만들어 결국 북미왕국의 확장을 지연시키기 위해서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산적 수염의 사내가 말하자 염소 수염의 사내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맞는 것 같아. 3일 후면 다른 조와도 만나기로 했지? 그때 철수하자고 주장하자.”
“그래. 그래야겠지.”
산적 수염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맥주를 모두 마신 후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선술집에 앉아있는 잉글랜드인 대부분은 여유와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했기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헌데 이들이 조금 부럽기는 하다.”
그 말에 염소 수염 사내는 움찔했지만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
산적 수염 사내도 그렇고 자신도 가족과 함께 아카디아로 이주했지만 그렇게 여유로운 삶을 살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돈을 더 벌고자 누벨 프랑스의 병사로 지원한 것이었고.
허나 이곳의 잉글랜드인들은 북미왕국이 이곳을 통치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예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으니 내심 부러울 수밖에 없긴 했다.
그때 산적 수염 사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약 북미왕국이 아카디아를 통치한다면 아카디아도 이곳과 비슷하게 통치할까?”
그 말에 염소 수염 사내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 확률이 높긴 하지만...총독부에서는 잉글랜드처럼 순순히 이 땅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니 북미왕국이 아카디아를 통치하려면 결국 북미왕국이 아카디아를 무력 점령해야 한다고. 그럼 우리와 가족들도 다칠 수 있겠지.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후우...그렇네. 쯧. 나가자.”
그렇게 산적 수염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염소 수염 사내도 따라 일어나 선술집에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대화하는 광경을 근처에서 지켜본 잭은 제이콥을 보고 소름 끼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휴. 꼭 붙어 나가는 꼴을 보게. 아무리 매사추세츠에 여자가 부족해도 그렇지...어떻게 남자끼리...”
구석에 숨어 둘이서 소곤대는 모습을 오해한 잭의 말에 제이콥도 혀를 쯧쯧 차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차라리 원주민 여성을 꼬실 생각을 하지. 멀쩡하게 생겨서...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