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참으로 좋은 차향이로군요."
김명규는 백담사의 주지인 원명이 내어준 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 차향을 맡으며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북미왕국에서 쾌속선이 포로나이 항에 도착해 여러 새로운 명령이 전해졌는데 그중에는 북미왕국에서 불법을 설파할 승려들을 모집해보라는 명령도 있었다.
투로시노는 최근 북미왕국이 북미 동해안 지역으로 확장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명령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고 곧바로 부연 설명을 써서 원상으로 보냈고 이천호 대방은 이를 확인하고 바로 김명규를 원상과 나름대로 인연이 있는 백담사로 보냈다.
김명규는 백담사에 도착하자마자 시주를 하고 이 절의 주지인 원명 스님을 뵙길 청했고 원상에서 사람이 왔다는 소리에 원명은 곧장 김명규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와 차를 내어준 것이다.
그리고 원명은 항상 이렇게 시주를 하러 올 때마다 감사의 뜻으로 차를 내어주어도 워낙 바쁜 만큼 차향을 즐기기보다는 빠르게 마시던 김명규가 이상할 정도로 느긋하게 차향을 즐기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라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 빈승에게 하실 말이라도 있는 겁니까?"
김명규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고 고심하던 찰나 원명이 먼저 말을 걸자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음...혹시 북미왕국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이에 원명은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아무리 빈승이 산속에서 산다 하나 어찌 북미왕국을 모르겠습니까. 재작년부터 조선이 어려울 시기에 도와준 나라가 바로 북미왕국 아닙니까. 그것도 별다른 대가 없이 말입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나라이지요."
김명규는 그런 원명의 반응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주지 스님께서 북미왕국을 아신다니 이야기하기 쉽겠습니다."
"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혹시...북미왕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불법을 전파할만한 스님이 없겠습니까?"
김명규의 말에 원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북미왕국이라..."
"최근 원상에서 북미왕국의 일을 몇 가지 대행해주고 있는데...북미왕국에서 이를 요청하더군요."
이에 원명은 북미왕국이 승려를 요청한 까닭을 지레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북미왕국이 승려들을 요청했다는 뜻입니까? 으음...필시 종이 때문이겠군요?"
지금껏 원상에서는 백담사에 시주하고 이곳에서 만든 종이를 가져가곤 했었다.
그리고 최근 이곳에서 만든 종이가 북미왕국으로 전량 수출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북미왕국이 승려를 요청한다는 소식에 북미왕국이 자체적으로 종이를 만들기 위해 승려들을 요청했다고 생각한 원명이었다.
하지만 김명규는 그 말에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웃으며 급히 손을 내저었다.
"예? 하하하. 아닙니다. 저들도 자체적으로 종이를 생산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 그렇습니까? 하지만..."
"아. 물론 저들의 종이가 한지에 비견될 수야 없어 종이를 일부 수입하긴 합니다. 그래서 이곳뿐만 아니라 조선 각지에서 한지를 사들여 북미왕국으로 수출하긴 합니다만...그래도 북미왕국에서 사용하는 종이 소모량을 생각하면 한지는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습니다."
김명규의 대답에 원명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그렇습니까?"
"예. 북미왕국에선 종이 제조를 위해 스님들은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그러면서 김명규는 북미왕국의 현 사정을 적당히 설명해주었다.
원명은 알려진 바가 적은 북미왕국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김명규의 설명을 유심히 듣다가 북미왕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부분에선 꽤 감명 깊다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김명규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북미왕국이 무엇 때문에 승려를 요청하는지를 이해하고 조금은 곤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으음...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는데 전통 신앙을 제외하면 북미왕국에 들어온 종교는 서양인이 믿는다는 기독교뿐이라 모든 백성이 그 기독교만 믿을 것을 우려한단 뜻입니까?"
이에 김명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북미왕국에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개인의 종교 선택권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데...북미왕국의 백성 대다수가 기독교를 믿게 되면 이것이 침해될 수 있다고 걱정하는 눈치였습니다. 물론 여러 제약이 있기에 기독교가 빠르게 퍼지기는 힘들겠지만, 또 모르는 일이니까요."
원명은 김명규의 마지막 말이 걸려 되물었다.
"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여러 제약이라니?"
이에 김명규는 북미왕국의 종교 정책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었고 이를 듣던 원명은 생각과는 조금 다른 북미왕국의 종교 정책에 중얼거렸다.
"허어...생각보다 제약이 많군요."
원명의 말에 김명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합니다. 허나 숭유억불을 이야기하는 조선보다야 나은 상황 아닙니까?"
김명규의 말은 비록 북미왕국에서 종교에 여러 제약을 걸긴 했지만 숭유억불을 주장하며 걸핏하면 사찰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양반들이 즐비한 조선보다야 낫지 않느냐는 뜻이었고 이에 공감하면서도 이러한 불만을 섣불리 입 밖으로 쏟아낼 수 없었던 원명은 그저 쓰게 웃었다.
"허허허."
그런 반응에 김명규는 북미왕국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고 제약만 있는 것은 아니라 나라에서 인정한 교단에 대해선 여러 지원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표정이 한층 나아진 원명이 잠시 차를 마시며 고민하다가 결국 마음을 정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북미왕국의 존재가 알려지며 북미왕국에 관심을 두고 있는 승려들이 몇 있긴 합니다. 허니 그들에게 한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김명규는 화색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렇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할 기회니까요."
* * *
조선에서 북미왕국으로 보내는 사절단은 순조롭게 구성되었다.
다만 북미왕국에 대한 호기심은 당상관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덕분에 이번 사절단의 정사 자리를 두고 꽤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다.
하지만 정태화의 도움 덕분에 예조판서인 유철이 이번 사절단의 정사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정태화 자신이 직접 북미왕국에 가보고 싶긴 했지만, 뱃길만 한 달이 넘게 걸리는 먼 길이었기에 금상이 직접 노구에 어딜 가느냐며 말리는 통에 결국 그나마 북미왕국의 사정에 밝고 우호적인 유철을 밀어준 것이다.
그렇게 정사가 결정되고 사절단이 구성되자마자 사절단은 즉시 제물포로 이동해 미리 준비하고 있던 원상의 배 2척에 나눠 타고 개항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선원들이 곧 개항장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유철은 바로 갑판 위로 나갔다.
"여전히 사람이 바글바글하군."
유철이 갑판 위에서 점차 가까워지는 개항장의 선착장 주변의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함께 따라 나왔던 병조참판이자 이번 북미왕국 사절단의 부사를 맡은 김만기가 개항장에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조금 놀랍군요. 강원도에 이렇게 활력이 넘치는 곳이 있을 줄은..."
물론 개항장의 인구가 강릉과 원주에 비하겠느냐마는 그곳들과는 인구 밀도 자체가 달랐기에 무척 북적거리기도 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가 이렇게 멀리까지 전해질 정도라 김만기가 놀라자 유철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이곳은 참으로 이국적이군요. 조선 땅이 아닌 것 같습니다. 괜히 개항장에 대한 소문이 도는 것이 아니로군요."
유철은 전에 육로로 이곳에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배를 타고 해안에서 바라보는 개항장의 모습은 또 다르다고 생각하며 개항장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김만기의 말에 예전 기억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건물 형식이 조선과는 좀 달라서 그렇습니다."
"확실히 독특하군요. 헌데 저 커다란 굴뚝이 달린 건물들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김만기가 손으로 가리킨 건물을 확인한 유철이 바로 대답했다.
"대부분은 목욕탕이라고 하더군요."
정성국이 있던 개척촌 시절만 하더라도 저런 건물 대부분은 공방 건물이었다.
하지만 정성국이 북미왕국으로 떠난 후 핵심 인력들이 북미왕국으로 떠나고 원상 소속 함대의 모항이 개척촌에서 아이누 섬의 포로나이 항으로 바뀌면서 선원들의 가족이 대거 포로나이로 이주함에 따라 일부 공방을 제외하면 대부분 건물은 내부를 개조해 목욕탕으로 만들어 버렸다.
유철 역시 이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김만기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자신을 안내해주던 자에게 물어본 기억이 있었기에 웃으며 바로 답하자 김만기는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목욕탕이요? 몸을 씻는 곳이란 말입니까?"
유철은 김만기의 당혹스러움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합니다. 북미왕국인들은 위생에 무척 신경쓴다고 하더군요. 몸이 깨끗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다들 믿는답니다. 그 때문인지 이곳이 개항장이 된 후 원래 있던 건물을 적당히 개조해서 대부분 목욕탕으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북미왕국에도 목욕탕은 곳곳에 있고 특히 항구 근처에 저렇게 목욕탕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듣기로는 몸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배에 오를 수 없다는군요."
김만기는 이를 듣고 묘한 표정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허어...신기하군요. 허나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몸을 드러내고 함께 씻는다니...조금...남사스럽군요."
오랑캐의 풍습이라며 질색할 만도 했지만 일단 북미왕국에 지원받은 것이 있었고 나름의 호감도 품고 있었기에 애써 단어를 고르는 김만기였다.
유철은 그런 김만기의 표정을 보고 그의 속마음을 짐작한 듯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긴 하지요. 허나 이 배를 타고 북미왕국의 항구에 도착한다면...우리도 저 목욕탕을 이용하긴 해야 할 겁니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옷을 벗고 남들과 함께 씻는 목욕탕을 이용해야 한다는 소리에 김만기가 질색하자 유철이 배에 타기 전 감성우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몸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배에 오를 수 없다고 이야기했었지요? 마찬가지로 몸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건착장의 일정 범위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답니다. 더러운 사람이 병을 옮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군요."
실제로 북미왕국의 원주민들은 전염병에 극도로 취약했고 그나마 우두 접종으로 천연두는 예방할 수 있었지만, 그 외의 전염병에는 아직도 속수무책이나 다름없었기에 전염병의 유입 통로가 될 수 있는 항구 주변은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이를 이미 알고 있던 감성우는 유철에게 이건 북미왕국의 정책이라 아마 사절단 역시 이를 따라야 하며 따르지 못한다면 선착장 주변을 벗어나긴 어려울 거라고 일러주었고.
그리고 김만기는 그런 유철의 이야기에 조금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허...꽤 발전된 문명을 자랑하는 대국인 줄 알았는데 어찌 그런 허무맹랑한 미신을..."
김만기 역시 북미왕국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컸기에 이번 사절단에 참여한 것이다.
특히 김만기는 북미왕국 사절단이 금상에게 보낸 여러 예물을 보고 기대하는 바가 컸고.
헌데 유철의 이야기를 듣자니 나라에서 한낱 미신을 굳게 믿고 나라 전체에 이를 강제하는 꼴이니 그가 생각했던 북미왕국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실망한 것이다.
그리고 실망한 것은 김만기뿐이 아니었다.
이미 배가 개항장에 거의 도착했다는 사실이 배 전체에 알려지면서 갑판 위는 사절단 소속의 사람들로 가득했기에 유철과 김만기 주변의 사람들은 시선은 개항장을 바라보고 있을지언정 귀는 유철과 김만기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철의 이야기를 듣고 김만기처럼 다른 선비들도 내심 자신들이 북미왕국을 너무 고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분위기였고.
이에 유철은 이러한 분위기가 퍼지는 것이 사절단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리라고 생각해 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좀 허무맹랑했습니다만...어찌 보면 의원들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김만기는 유철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유철이 말했다.
"의원들도 병이 생기는 것은 나쁜 기운 때문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유철의 말에 김만기는 유철이 무슨 뜻으로 그리 이야기한 것인지 깨닫고 탄성을 질렀다.
"아! 저들은 그 나쁜 기운을 더러움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들은 전염병에 의해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으니...저렇게 예민하게 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요."
그제야 김만기는 예전에 유철이 이야기해주었던 북미왕국 내부의 사정을 떠올리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긴. 북미 대륙에 각종 전염병이 돌아 인구가 크게 줄어들어 일할 사람이 부족해 조선의 유민까지 원하는 상황이니...그것을 생각해보면 북미왕국의 저런 반응도 이해가 가는군요."
그런 김만기의 반응에 유철이 고개를 끄덕인 후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저런 정책을 시행한 이후엔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는 없다더군요."
이에 김만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어...그게 참입니까?"
매일 깨끗이 씻는 것으로 정말 전염병을 막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김만기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유철 역시 확신할 수는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전 그렇게 들었습니다. 정말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북미왕국 곳곳에 저렇게 목욕탕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큰돈이 들어갈 텐데...그걸 나라에서 운영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저걸 나라에서 운영한단 말이지요?"
"그렇다고 합니다."
유철의 대답에 김만기는 생각이 많은 얼굴로 개항장으로 시선을 돌렸고 유철과 김만기의 대화를 유심히 듣던 주변 사람들도 다들 조금은 복잡한 얼굴로 점차 가까워지는 개항장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