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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탈출하라-274화 (274/850)

274화

정성국은 북미왕국을 둘러본 뒤 새한성에 머무르며 법학자들을 지휘해 북미왕국의 헌법 초안을 만들고 있는 윤휴를 집무실로 불러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법 제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간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배정해주신 관리들이 다들 서양의 법체계에 능통한 법학자들이라...그들과 토론하면 할수록 그들에게 일을 맡겨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지요.”

윤휴의 겸손에 정성국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하하.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지금껏 그들에게 맡겨두었지만 지지부진해져서 백호 어르신에게 이런 중임을 맡긴 것이고 백호 어르신이 법학자들을 잘 다루어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어 간다는 소식에 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를 겁니다.”

그도 처음부터 윤휴에게 이 일을 맡길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서양의 법과 관련된 서적만 주로 번역하던 외무청 소속 관리들을 법학자로 따로 빼서 이들에게 북미왕국의 헌법을 제정하라고 일을 맡겼지만, 지식은 있어도 이런 일을 맡아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제대로 된 구심점이 없어서인지 영 지지부진했었고 그 때문에 윤휴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이다.

그리고 최근 보고받기로는 윤휴가 이러한 법학자들을 잘 진두지휘해서 빠르게 법을 만들고 있었으니 정성국으로선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성국의 반응에 윤휴는 커피를 마시다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전하께서 이 미천한 선비를 너무 과하게 평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윤휴는 정성국과 대화를 하다 문득 묻고 싶은 것이 있는지 커피잔을 내려놓고 정성국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조용한 곰에게 듣기로 북미왕국에서 곧 청나라로 사절을 보낼거라고 들었습니다만...”

곧 날이 풀리고 북방항로가 열리면 아이누 섬의 투로시노에게 그러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낼 생각으로 조용한 곰과도 이야기했었기에 정성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이미 조선과 정식으로 조약을 맺고 교역 중인 상황이라 조만간 북미왕국에 대한 소문이 주변으로 펴질테니...그동안 미뤄왔던 청나라와 왜국에 사절단을 보내야지요.”

지금까지는 원상 소속이었다가 제물포 조약 이후 북미왕국 국영 상단으로 소속을 옮긴 선원들을 통해 청나라와 밀무역을 하고 있었지만, 점점 거래 규모가 커지는 만큼 언제까지 밀무역만 고집할 수는 없었다.

물론 청나라의 사정과 흐름을 대략이나마 꿰뚫고 있는 정성국이었기에 밀무역의 판을 키워도 당분간은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잘못하다간 나중에 현 청나라의 황제인 강희제에 찍힐 우려도 있었기에 겸사겸사 사절단을 보낼 생각이었고.

그런 정성국의 대답에 윤휴는 조금 복잡한 얼굴을 하며 커피잔을 매만졌다.

“으음...청나라라...”

그런 윤휴의 반응에 정성국은 속으로 아차 했다.

윤휴가 젊은 시절에 병자호란이 터지고 결국 금상이 오랑캐에 항복해 치욕을 보았다는 것에 한을 품고 있다는 것을 정성국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에 정성국은 윤휴를 보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아직도 북벌을 꿈꾸십니까?”

정성국의 이 물음에 윤휴는 예전 정성국이 개척촌을 떠나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개척촌에서 지내면서 힘겹게 사는 조선 백성들과 자주 접하다보니...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그래요?”

정성국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짓자 윤휴는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선은 북미왕국처럼 부유하지 못하니 북벌을 한답시고 군사를 일으키는 순간 백성들에게 그 부담이 갈 테니까요. 그리고 조선 백성들에게 그렇게 부담을 주어가면서 당시의 치욕을 갚아야 하나 싶기도 하고...”

윤휴는 개척촌을 운영하면서 지속해서 개척촌에서 잠시 머물다 북미왕국으로 떠나는 조선 유민들을 통해 조선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험난하고 피폐한지를 깨달았다.

그렇기에 윤휴는 여전히 청나라가 고까웠지만 더는 북벌을 주장하지 못했다.

그런 윤휴의 반응에 정성국은 안도했다.

“그거 다행이군요.”

윤휴가 전생에서 사형당한 것은 북벌을 주장했던 주요 인사라는 점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성국의 반응에 윤휴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 심유한 눈빛으로 정성국을 바라보았다.

이에 정성국이 슬쩍 시선을 돌리며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음미하자 윤휴는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보시기엔 북벌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얼핏 듣기로는 청나라의 내부 사정도 썩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던데...”

윤휴가 조선에 있었을 때만 하더라도 가끔 교류하던 인사들과 서신을 통해 알아보니 청나라의 내부 사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전 황제였던 순치제가 죽고 그의 셋째 아들인 현엽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긴 했으나 당시 강희제의 나이는 고작 8살에 불과했다.

당연히 아직 어렸던 강희제가 직접 친정을 할 수 없었고 이런 경우 보통은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첨정을 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태황태후는 자신이 직접 수렴청정을 하는 대신 보정 대신 네 명에게 정책 최고 의결권을 맡겼다.

허나 시간이 흐르며 보정 대신 중 한 명으로 병권을 틀어잡고 있던 병부상서 오배가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점차 장성하던 강희제는 이를 못마땅해했지만 당장은 세력이 약하기에 두고 볼 수밖에 없었고.

허나 전횡이 심해진 오배가 강희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보정 대신이었던 소극살합마저 반란죄를 뒤집어씌워 죽이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자신마저 죽이려 들자 강희제는 더는 참지 못하고 몰래 양성해둔 친위병을 이용해 자신을 알현하러 궁정에 들어온 오배를 체포해 처형하고 오배의 세력을 조정에서 모두 몰아내는 데 성공하는데 이게 바로 2년 전의 일이었다.

이 여파로 청나라 내부는 아직 어수선하다고 알려져 있었고 현 황제인 강희제는 황권을 강화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어 자연스럽게 청나라 내부의 여러 정치 세력들과 다툼이 심하리라고 보았기에 윤휴는 북벌에 대한 마음은 접었어도 조선이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한다면 청나라를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성국의 반응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 보였기에 그의 생각이 궁금했던 것이다.

자신보다는 정성국이 국가의 정세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탁월했으니까.

그런 윤휴의 질문에 정성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썩 좋지는 않지요.”

윤휴의 말처럼 현 청나라의 내부 사정은 썩 좋지 않았다.

오배의 일로 강희제는 직접 친정에 나서며 신하들에게 막중한 권한을 맡기기보다는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 했는데 문제는 오배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번(三藩)의 왕인 오삼계, 상가희, 경중명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명나라 항장 출신으로 순치제 때 남명과 인접한 중국 남쪽의 번왕으로 책봉되어 남명을 공격해 결국 남명을 멸망시키고 반청 세력을 일소했다.

문제는 이들은 지방에서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가지고 있어서 거의 독립 왕국이나 다름없다는 것이고 이미 이들이 상대해야 할 세력은 사라졌는데도 막강한 군사력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와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며 계속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중앙집권을 강화하려는 강희제로선 이들을 좌시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내년쯤에 강희제는 번을 폐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오삼계를 비롯한 삼번의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모반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삼번의 난이고 이 삼번의 난이 발생하면서 중국 남부지역뿐만 아니라 섬서, 몽골 등 여러 지역의 반청 세력이 가담하여 전란은 확대된다.

그리고 전생에선 조선 역시 이 시기에 윤휴가 청나라를 공격할 기회라며 북벌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이 주장에 전생의 윤휴와 험악한 사이였던 송시열조차 이에 동조했고.

물론 중신 대부분은 경신 대기근 직후라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 무슨 수로 군사를 내냐며 결사반대했고 후에 오삼계가 죽으면서 북벌론은 완전히 설득력을 잃게 된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후에 삼번의 난을 수습한 청나라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며 조선을 압박할 것을 우려해 결국 사약을 받고 사사되고.

이런 흐름을 알고 있는 정성국으로서는 윤휴의 의견에 일단은 동의했다.

“허면...”

“문제는 그런 청나라라도 조선이 상대하기에는 무척이나 버거운 상대니까요.”

정성국의 확신 어린 대답에 윤휴는 신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정성국을 통해 조선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조선 팔도는 생각보다 작고 중국은 무척 광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러다 무슨 생각이라도 난 것인지 정성국을 바라보며 무어라 이야기하려 할 때 정성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는 저 멀리 있는 청나라의 일에 굳이 개입하고 싶지도 않고요.”

“음...”

정성국이 먼저 그렇게 이야기하자 혹시 조선을 도울 수 없겠느냐고 물어보려던 윤휴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정성국은 그런 윤휴를 보며 커피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북미왕국에 여유가 있다면 어떻게 개입이라도 해보겠는데...’

정성국 역시 이 삼번의 난이 청나라의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결국 청나라가 승리하면서 청나라는 진정한 의미로 중국을 통일한 셈이었고 그 세력을 외부로 뻗어 나가기 시작해 청의 영토를 넓혀 나가기 시작했으니 이미 북미왕국의 존재로 인해 역사가 뒤틀리게 된 상황이라 전생처럼 역사가 흘러가진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정성국으로선 개입할 수 있다면 개입하고 싶긴 했다.

만약 청나라가 서양 세력에 시달리지 않고 무난히 근대화에 성공해 발전해나간다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에 개입하기엔 북미왕국의 실질적인 국력이 너무 미약했다.

현 북미왕국은 새나주-새진주 구간의 철도 공사와 최근 확보한 북미 동해안 지역을 장악하는데 집중하는 것만으로 모든 여력을 다 쏟아붓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 먼 청나라의 일에 무슨 수로 개입하겠는가.

차선으로 반란 세력에 신식 소총을 팔아넘기고 총탄을 비싸게 팔아 이득을 챙기는 것도 고려하긴 했으나 최근 급격히 병사를 늘리며 이들을 무장시키는 것도 벅찬 상황이었고 신식 소총이 청나라에 흘러 들어가는 것도 썩 내키진 않았을뿐더러 신식 소총 수천 정만으로 과연 오삼계가 4년 안에 그 강희제의 청나라를 빠르게 무너뜨릴 수 있을까 싶었기에 훗날 강희제에 찍힐 것을 우려해 그러한 생각도 접었고.

삼번의 난 당시 오삼계는 숱한 전투를 치른 역전의 노장이었고 청나라는 도르곤과 오배에게 줄을 섰다가 숙청된 장수가 부지기수여서 제대로 된 장수가 없었다.

덕분에 오삼계는 손쉽게 자신을 상대하러 내려온 반란 진압군을 물리쳤고.

물론 시간이 흐르며 강희제가 한족 장수를 대거 등용하면서 다른 두 번은 이에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지만, 오삼계는 운남, 귀주, 사천, 호북, 호남을 장악하며 청나라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격퇴하며 아예 주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만큼 오삼계가 오래만 산다면 오삼계에게 신식 소총을 넘겨주고 꾸준히 거래하며 이득을 챙기고 청나라의 확장을 막는 것도 나쁠 것은 없는데, 문제는 오삼계는 반란을 일으킬 당시에도 나이가 있었기에 황제에 오른 직후 5개월 만에 노환으로 사망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오삼계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던 오삼계의 군은 순식간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오삼계가 죽은 이후 강희제가 이들을 회유하자 태반은 청나라에 항복해 버린다.

그런 만큼 잘못하면 청나라에 신식 소총을 넘어갈 테고 물론 화약을 복제하진 못하겠지만 신식 소총을 확보하면서 저들이 화약 무기에 더욱 관심을 두게 된다면 좋을 것은 없었다.

잘못하면 청나라의 확장이 더욱 가속화될 수도 있었고.

거기에 항복한 자들을 통해 북미왕국이 반란군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강희제는 북미왕국을 눈엣가시로 여길 테고 북미왕국이 조선과 활발히 교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괜히 조선을 압박할 수도 있으니 아예 손을 떼는 것이 맞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정성국은 조금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휴를 보고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청나라는 한족이 아닌 만주족인 만큼...계속해서 중국을 지배하진 못할 겁니다. 그때를 대비해 조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간다면 언젠가 조선의 힘만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갚을 수도 있겠지요.”

정성국이 침울해진 자신을 위로한다는 생각에 윤휴는 표정을 바꾸어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허허허.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습니다만...괜찮습니다. 아까 전하께 말씀드린 것처럼 꼭 북벌을 통해 병자년에 있었던 치욕을 갚아줘야 한다는 생각을 더는 하지 않으니까요. 다만 제 생각엔 북미왕국이 조금 도와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거라고 생각해 여쭤본 것인데...전하는 무척 부정적이시니 제 예상보다도 청나라가 더욱 강대하다는 뜻이겠지요.”

“음...”

정성국이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윤휴는 허허롭게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꽃이 피면 언젠가 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말씀처럼 청나라는 이민족이니만큼 예전 원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오래가진 못하겠지요. 그러니 북벌을 주장하며 굳이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하기보다는 그냥 천천히 저들이 몰락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도 나쁠 것은 없겠지요. 물론 제 생전엔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전생에서야 청나라보다 먼저 조선이 멸망했지만, 북미왕국이 존재하는 이상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는 않으리라고 확신한 정성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렇지요. 분명 청나라가 몰락하더라도 조선은 건재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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